사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를 찾다
[한일평화 답사일지] 고국의 어머니를 잊지 않은 조선인 광부들의 애사
 
김영조/이윤옥   기사입력  2010/08/25 [20:44]
나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어찌하다 석탄 캐러 이역만리 끌려왔더냐!
 
막장에서 하루 종일 석탄 캐어도
주린 배 채울 길 없어
고향집 어머니 부르며 눈물지었네

눈물 들키자 감독 놈 몽둥이 날아와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네 

                  -탄광 노동자의 노래 중-


기타큐슈 치쿠호 탄광 일대에 수용된 조선인 광부들은 몽둥이를 맞으면서도 고국의 어머니를 잊지 않았다. 어찌 탄광에서뿐이랴! 군수품 수송용 비행장 활주로 건설과 철도건설, 탄약고, 탄광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던 조선인들의 삶의 흔적이 곳곳이 배어있는 곳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은 기록의 중요함이었다. 해방 65년의 세월은 숱한 조선인 강제연행 현장을 사라지게 했고 이제 남은 것은 탄광 굴뚝 몇 개와 조선인 집단거주지 몇 곳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강제연행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던 1세들의 빈자리를 메워주던 2세들마저 고령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을 때 빠짐없이 기록해야 할 책임을 답사기행 내내 절실히 느꼈다.
 

▲ 옛 미츠비시광업의 이이즈카 탄광 굴뚝만이 삐죽이 남아 조선인 노역현장을 말해준다.     © 김영조
▲ 이이즈카 탄광의 석탄을 들어 올리는 시설 앞에서 설명을 듣는 답사단     © 김영조
 
 
2010년 8월 6일 금요일 오후 저녁 7시 40분.

‘경술국치100년 한일 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 45명은 시모노세키 건너편 항구인 모지행(門司) 세코마루에 올랐다. 배는 냉방이 잘되어 있었고 배 안에는 제법 큰 욕조를 갖춘 목욕탕과 식당, 레스토랑, 편의점, 면세점은 물론 음료수를 손쉽게 빼먹을 수 있는 자판기 등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야간 항해에 지루한 손님들을 위해 안전한 갑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 밤하늘의 별을 보며 연인들은 데이트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를 만큼 여객선은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시설로 평화로운 항해를 계속했다.
  
▲ 첫 방문지 모지항 도착 대장정을 시작하며     © 김영조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떠나는 부산항의 야경을 배경으로 12일간의 대 장정에 오른 답사팀들이 기념 촬영을 마치고 하나 둘 침대로 돌아갈 때 문득 100여 년 전 관부(關釜)연락선을 타고 낯선 땅으로 향하던 조선인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불안한 눈망울의 주인공들은 우리와 피를 나눈 동포였고 겨레였다. 밤샌 항해 끝에 도달한 모지항에서는 우리를 태우고 갈 고급 전세버스와 친절한 동포안내자가 목을 빼고 우릴 기다렸지만 당시 강제연행자들은 겁먹은 얼굴로 석탄차에 짐짝으로 실려 어디론가 달렸을 것이다. 


▲ 모지항에서 답사의 동반자가 될 버스에 타며     © 김영조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국에의 연락이 끊긴 채 살아 돌아갈 희망 없이 탄을 캐며 석탄광굴 벽면 가득히 ‘광부의 슬픈 신세’를 써 내려간 징용 조선인의 강제노역 현장을 돌아보는 무거운 첫발자국은 답사일정 12일 내내 우리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어린 시절 사회과부도를 펴고 배우던 기타큐수 공업단지는 알고 보니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이 피땀이었다.

“일본에서 10여 일을 있으면서 충격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공교육에서 왜 이런 교육을 가르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였습니다. 강제연행되어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식민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모멸과 핍박과 고통 속에 살아오신 재일동포 분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제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답사단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얘기라 신기하면서도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우리가 직면하고 진실을 알아내야 할 이러한 문제를 보지 않고 뭘 고민하고 있었던 것일까? 재일동포 분들이, 일본의 양심적인 지성인들이, 우리 답사단의 선생님들이 한 마디, 한마디 하실 때마다 취직 걱정이나 하던 저의 고민이 하찮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무나, 정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답사단원인 대학생 윤지만의 고백처럼 우리는 답사 기간 내내 부끄러운 우리 자화상에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진실을 밝히지 않는 일본, 그것을 올바로 가르쳐 주지 않는 우리의 현장교육이 함께 빚어낸 무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길은 멀고 험했다. 첫 기착지 모지항에서 우리를 태운 고급버스는 그러나 겉만 말짱할 뿐 달리는 도중 에어컨이 고장 나 때아닌 사우나로 둔갑하는 바람에 더위를 먹어 답사길 내내 두통약을 달고 살아야 했던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가는 곳마다 울분을 자아내게 한 현실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 풍신수길 만행의 현장 교토 코무덤 앞에서 묵념을 하는 답사단     © 김영조

그렇게 우리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첫날 방문지인 옛 우에다광업 호슈탄광의 갱구를 시작으로 나가사키조선인 희생자 위령탑과 오카마사하루 기념관, 옛 조선인 집단 주거지 일명 똥굴동네와 오사카 츠루하시 시장, 임진왜란 치욕의 현장 코무덤, 우지시의 우토르마을과 단바 망간기념관, 시가현의 조선인학교 방문과 도쿄의 관동대지진 학살현장, 치바현 관음사 위령탑 헌화, 아라가와 강변의 학살현장, 야스쿠니 방문 저지 사건과 땀에 전 히비야공원까지의 야간 촛불행동 등... 가는 곳마다 역사의 현장에서 흘린 눈물과 땀으로 팔월의 더위는 더욱더 끈적대었다.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을 마치고 이 지역에 대한 관심과 더 많은 답사자들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답사일정 순서대로 ‘답사기행’을 연재하고자 한다. 많은 관심과 애독을 부탁드린다.


▲ 치바 관음사에 있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는 답사단     © 김영조
   
▲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을 하며 목이 터지라 외치는 답사단     © 김영조

 <글 싣는 차례>


<제1편> 기타큐슈 치쿠호 탄광에서 숨져간 조선인

<제2편> 고쿠라에서 들은 재인조선인 실상

<제3편> 나가사키의 오카마사하루 씨를 아시나요?

<제4편> 시모노세키 똥굴동네의 재일조선인 삶

<제5편> 교토 코무덤을 귀무덤이라 부르지 마라

<제6편> 일본 속의 백제 땅 오사카 츠루하시

<제7편> 일본 인권의식의 현주소 우지시 ‘우토로마을’

<제8편> 단바망간기념관(교토)을 우리 마을에 세우지 마라

<제9편> 도쿄 아라카와 학살현장, 조선인 징용자 두 번 죽였다

<제10편>웬수와 함께 잠들고 싶지 않다. 야스쿠니에서 우리를 빼라!



2010 한일평화기행단 윤지만 학생이 글쓴이에게 보내온 편지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이 답사에 참여한 목적은 우리 선조의 비애와 슬픔을 느끼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저를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대학교를 들어올 때 정말 큰 교육을 받고 싶어서 들어왔으나 두 가지 측면에서 놀랐습니다. 첫 번째는 중, 고등학교와는 너무도 다르게 시스템이 급변하여서입니다. 중, 고등학생 때는 선생님들이 이끌어 주시고 짜인 입시커리큘럼에 그저 몸을 맡기면 됐었는데, 대학생이 되자 어느 누구도 길을 알려주는 이가 없더라고요. 성인이 되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지도 알려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울타리 안에만 있다가 그 울타리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거 같았습니다. 두 번째는 막상 지내보니 중, 고등학교 때와 목표만 달라지고 바뀐 게 없는 거 같아 놀랐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는 입시라는 목표를 위해 달려가고 대학생 때는 취직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더군요. 그래서 제 대학생활은 물음표에 가까웠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만 계속 생각했습니다. 쉽게 느낌표로 전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대학생활을 좀 더 알차고 의미 있게,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려고 이번 답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첫날부터 너무 놀랐습니다. 일본에서 10여 일을 있으면서 충격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공교육에서 왜 이런 교육을 가르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였습니다. 강제연행되어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식민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모멸과 핍박과 고통 속에 살아오신 재일동포 분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제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답사단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얘기라 신기하면서도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우리가 직면하고 진실을 알아내야 할 이러한 문제를 보지 않고 뭘 고민하고 있었던 것일까? 재일동포 분들이, 일본의 양심적인 지성인들이, 우리 답사단의 선생님들이 한 마디, 한마디 하실 때마다 취직 걱정이나 하던 저의 고민이 하찮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무나, 정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이제라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되어서 너무나 기쁩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눈에 선명하게 보입니다. 우리 동포들 한 명, 한 명을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활동들로 그분들께서 자신들의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분들에게도 조국이 있고 같은 민족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재일동포 분들과 우리 강제징용 및 일제의 피해자 유가족 분들의 눈에서 더는 슬픔의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기쁨의 눈물을 같이 흘리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작은 촛불들이 시발점이 되어 전 국민이 우리가 느꼈던 것을 같이 느꼈으면 합니다.

어제 대학로 책방 아저씨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일본의 야스쿠니 문제와 같이 생각해 볼 게 우리나라 현충원이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정치인이 현충원에 가서 참배를 하는 게 일본 정치인이 야스쿠니에 가 참배를 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따지면 어떻게 하겠느냐. 한국 또한 일본과 다를 거 없이 피해자의 처지만 보여주지 않느냐. 베트남 문제 등 여러 문제가 있지 않으냐?”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니 국내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일본과 평화적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만 하는 대학생이 아니라 행동하는 대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이웃국가로서 평화를 위해 서로 노력을 다할 때까지 저도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욕심은 너무 크죠. 저의 이 욕심을 달성할 수 있게 많은 것을 알려주세요. 선생님!

                     4343(2010)년 뜨거웠던 여름날이 저물어가는 8월 
  
                                                                                         지만 드림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0/08/25 [20:44]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