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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4.04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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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경제학의 지혜와 한국경제의 진상
[식자우환의 경제학2] 한국경제학, 신자유주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용석
▲ 목  차
 
I. 들어가면서 : 인민경제학 서설
   1. 관점이 가장 중요
   2. 경제학은 사회과학, 곧 ‘인민의 과학’의 한 분과
   3. 격물치지와 인과관계의 ‘이론적’ 이해 (이상, 식자우환 ①)
 
II. 거시경제학의 지혜와 한국경제의 진상
   1. 거시경제학의 지혜 : ‘경쟁력’의 역설
   2. 저물가, 고금리 체제의 진실
   3. 신자유주의 경제학, 21세기의 점성술인가
   4. 한국경제학,사대의 마법에서 벗어나야! (이상,식자우환 ②)
 
 III. 한국경제의 대내외 여건과 현 상황 인식
   1. 이명박의공약과 삼성경제연 거시경제 보고서들
   2. 한국경제의 대내외적 당면 여건
   3. 한국경제의 현 상황 인식 (이상, 식자우환 ③)
 
 IV. 이명박의 5대 경제정책 비판 및 함께 대안 찾기
   (사전준비 : 인과관계의 ‘실증적’ 이해)
   1. 경부대운하 사업으로 경제 살리자 (X)
   2. 법인세 인하로 투자 활성화시키자 (X)
   3. 규제 폐지 및 완화로 투자 확대하자 (△)
   4. 의료,연금등 사회보험축소로 소비 확대하자(△)
   5. 부동산 규제 완화 등으로 소비 확대하자 (△)
 
 V. 나오면서 : 시사점 및 결론 (이상, 식자우환 ④)

II. 거시경제학의 지혜와 한국경제의 진상 

사람들 속에서, 또는 책 속에서 신자유주의(신제국주의) 사고를 대할 때마다 매번 떠오르는 상념.

“너희가 산 사람도 섬길 수 없으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단 말이냐!” (未能事人焉能事鬼!) 

신자유주의 경제학, IMF 위기를 전후하여 이 땅에 상륙해서 그간 온갖 기승을 부리더니, 드디어 오늘날 자칭 진보와 보수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의 사고와 의지를 지배하는 모습, 마치 ‘귀신들린’ 형상이다. 

참 몹쓸 것! IMF 등 국제경제기구를 앞장세운 미국을 중심으로, 21세기적 패권지배 이데올로기와 ‘나쁜’ 경제학이 교조적으로 결합된 산물이다. 

한국경제, 그 덕분으로, IMF 위기 직후 졸지에 2백만의 실업자를 양산하더니, 이젠 이른바 ‘시장의 균형’ 상태에서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등 무수한 사람들을 오늘의 인생 ‘막장’에다  몰아넣고, 그런 ‘불완전 고용’조차 모자란 지 가히 ‘3백만 백수’ 시대를 강요당하고 있다.
 
지난 18일 민주당 대표 손학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상스런 언설을 내뱉는다.

“민주당에  (한미 FTA를 체결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못한 사람이 많다.”면서 그 자신 한미 FTA에 승부수를 걸겠다나, 어쩐다나.  

이쯤 되면, 시대의 볼셰비키(Bolsheviki)가 따로 없다.

오래전 러시아 공산주의자들. 그들은 ‘인민대중을 올바른 길로 인도’(사실은 강요)한다는 자아도취의 사명감으로, 기실 어리둥절하던 인민대중을 선동하고 억압하였다. 

손학규, 계몽적 확신범인 점에서 노무현과 분명 동종이다. 하지만 노무현처럼 간혹 흔들리지 않는, 결연함을 보인다는 점에서 당연히 노무현보다 한 수 위, 진품 ‘뉴 라이트’다.

그의 말마따나 “민주당 내의 어느 누구도 노무현보다, 하물며 손학규보다 못하다.”
 
1. 거시경제학의 지혜 : ‘경쟁력’의 역설
 
거시경제의 주요 변수들인 성장과 고용, 물가와 금리 등 언뜻 따분한 통계수치로 여겨지지만, 그 안에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온갖 애환이 숨겨져 있다.

근래의 성장률, 물가상승률, 경제활동참가비율 등에 담겨있는 시대의 진실, 과연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거시경제 모델은 딱 2개의 선택변수, 곧 물가와 성장(고용)을 미지수로 하는 두 개의 일차 연립방정식 풀기다.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이다.

개방거시경제는 여기에 환율 방정식 하나 더 추가시킨 것에 불과하다. 

모델의 기본가정은 ‘국민경제’라는 이름의 가상적 시장에 딱 1명의 소비자(노동자)로 구성된 가계와 딱 1명의 생산자(자본가)로 구성된 기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현실의 소비자는 천태만상의 군상이지만, 모형 상 모든 소비자가 부동산, 동산 등 자산보유액이 똑같고, 연간 소득도 동일하고, 심지어 생김새나 성격, 인품 등까지도 똑같다는 가정이다. 생산자도 기술력이나 보유자본 등 모든 면에서 이와 마찬가지다. 

가장 단순한 모델에서 경제학사상 가장 위대한 결론, 이른바 ‘저축의 역설’이 도출된다. 거시경제학, 곧 케인즈 경제학의 탄생 배경이며 존립 근거다. 

나무가 아닌 숲을 통찰하는 지혜로, 케인즈 이전처럼 개별 시장 하나를 놓고 세세하게 이치를 따지는 게 아니라, 개별 시장 전체를 가상적인 ‘하나의 시장’으로 묶어놓고서야 찾아낸, 국민경제의 소중한 기본 운용법칙이다. 

저축의 역설, 곧 소비자(노동자) 행위의 역설이다. 이들 각 개인은 비록 오늘의 삶에 허덕이지만 내일을 위해 매우 현명하게 ‘허리띠 졸라매기’(소비를 줄이고 저축 늘리기)에 나서고자 한다.

하지만, 전체로서의 국민경제는 소비 등 내수부진의 결과 국민소득이 줄어들고, 이는 결국 각 개인의 소득 감소로 이어지게 되며, 최종적으로 각 개인은 자신의 소득 중 일부분인 저축을 늘리고자 했던 당초의 의도마저 좌절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 이보다 더 단순명쾌할 수 없다.

소비자의 개별적으로 합리적인 행위가 국민경제 전체적으로는 전혀 반대로 불합리한 결과를 낳는다는, ‘작은 진리’(부분)와 ‘큰 진리’(전체) 간의 역설이다. 

오늘 기업가(자본가)의 행태와 관련하여 ‘경쟁력의 역설’을 감히 제기하고자 한다.

일찍이 자유주의 경제학의 작은 지혜, 곧 19세기적 시장방임의 모순을 통박했던 케인즈적 지혜를 오늘에 빌려, 21세기적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허구성, 곧 시장맹종주의의 위선을 명징하게 고발코자 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화두는 단연 ‘경쟁력’ 담론이다.

개별 기업들이 저마다 경쟁력이나 생산성 운운하며 정리해고든 임금억제 등 노동유연화에 본격 나서게 되면, 기업 단위로는 분명히 이윤(이는 자본가의 저축에 해당한다)이 크게 증대한다. 열이 나눠 먹던 것을 다섯이 나눠 먹으면 노동 생산성도 두 배로 증가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경영합리화 행위는 국민경제 전체적으로는 GDP 증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실업자나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 양산으로 인해 기업 부담이 아닌 온갖 사회적 비용만을 뿜어낸다. 자본가 측면의 ‘저축의 역설’인 셈이다.

오로지 기업의 신규투자, 곧 새 일자리 창출이 선행될 때만 국민경제적으로 기업 단위의 경쟁력 제고가 비로소 합리화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함에도, 지난 십수 년 간 소위 민선, 민주 정부라는 게 ‘기업하기 좋은 나라’ 운운하며, 국민경제의 운용 철학으로 기업단위 경쟁력 제고 따위를 삼고자 했으니, 처음부터 일자리 창출은 헛된 구호에 불과했건 것이고, 실은 일자리 파괴 내지 불안정화에 앞장섰던 것이다.
 
결국 기업의 신규투자는 전혀 이끌어내지 못한 채, 경영합리화의 미명하에 비정규직 및 영세자영업자 양산 등 경제사회적 양극화 심화는 물론 한국경제의 저성장 고착화 체제로 귀결시켰던 근본 이유이다.

만약 이 기간 중 ‘중국특수’마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늘이 내린 ‘민족중흥’과 ‘국리민복’의 일대 호기를 발로 걷어 차버린 셈이지만, 그나마 그 덕분에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에 다소 위안을 삼아야 하나.
 
좀 더 논의를 이끌면, 흔히들 염두에 두는 ‘국가경쟁력’은 결코 개별 기업들 경쟁력의 ‘총합(總合)’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국가경쟁력은 축구시합처럼 나라들 간에 승패가 결정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최경주의 골프처럼 오직 자신과의 싸움일 뿐이다. 일본을 따라잡기라거나, 중국에 추월당한다는 식의 인식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국민대중을 오도하는 거다. 

이는 국제경제학의 ‘비교우위’이론이 가르치는 불변의 지혜다. 기업경쟁력 아닌 국가경쟁력 제고가 국리와 민복이 동시 상승하는 유일무이의 첩경이다. 

국가의 책무는 기업 차원의 경쟁력 향상은 순전히 개별 기업의 일일 뿐임을 인식하고, 사회적 비용의 관점에서 오히려 이에 대한 제재와 통제가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차제에 자본자유화와 관련하여, 은행이나 기업 등의 엄청난 해외기채를 국민세금인 외환보유고로 무상 뒷받침하는 비용에 대해 ‘자본입국세’를 제안하고자 한다. 

국가경쟁력 상승은 사람에 대해서 또는 기계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국민경제 차원의 신규투자가 왕성히 일어날 때만 비로소 가능할 따름이다. 

2. 저물가, 고금리 체제의 진실 

IMF 위기 이후 대한민국 사상 초유의 저물가 시대가 계속된다. 노무현의 집권기간(2003〜2007)만 쳐도 연간 물가상승률은 고작 2.9%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초(超) 저물가, 과연 국민경제에 바람직한 것인가.
 
거시경제학상 ‘물가’(price index)라 함은 국민경제 내에서 생산 또는 소비되는 재화를 모두 한 바구니에 집어넣은 ‘복합재화’(그 이름을 바로 GDP라고 해도 좋다)의 가격으로 정의된다. 추상적 개념이다.
 
최근 해외 원자재 가격의 급상승으로 보수, 진보를 불문하고 일부 매체들이 물가상승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은 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원유나 곡물사료, 식료품 등 가격이 오른 개별 품목에 대해 필요할 경우 관련세금을 조정하거나 생산자 및 소비자 지원 등 개별적인 미시 대책이면 그걸로 족하다. 

개별 기업 단위의 경영합리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국민경제 차원에서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걸 두고 곧장 '물가'를 운운하며 물가안정을 위한 거시경제대책 운운하는 지점에서, 한국경제의 거시경제정책 운용 및 현 상황 인식에 심대한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사상 유례가 없는 고금리 시대다.
 
IMF 위기 이전 의례 한자리 수 금리였지만 물가는 이를 훌쩍 상회하였으니 실질금리 기준 항시 마이너스 상태였던 것이, IMF 이후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로 실질 고금리가 항상 보장되는 셈이다.
 
2003〜2007년 중 시장금리는 연 평균 5.2%(3년 만기 회사채, AA- 등급 연말 기준)로 2.9%의 물가상승률을 상쇄하고도 실질금리 2.3%를 보장한다. 

작금의 저물가와 고금리 체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본색이다. 여기서 과연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 걸까. 

경제학의 움직일 수 없는 진실, 실물경제의 성장은 명목금리가 아닌 실질금리(= 명목금리 - 물가상승률)의 함수임을 상기하자.

저물가와 고금리의 병존 체제에선 일자리 창출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신규투자를 질식시키며, 일자리 파괴와 실업자 창출의 확실한 처방에 다름 아니다. 

지금처럼 기업들의 내부 유보가 수백조 원에 달함에도 신규투자는 극히 부진하여 소위 ‘고용 없는 저성장’에 그치고, 나아가 노동유연화 운운하며 비정규직 등 불완전 고용에나 몰두하고, 아예 노동시장 밖으로 수백만 영세자영업자 방출 및 소위 ‘3백만 백수’ 시대를 만들어낸 최대 원인이다. 

당연히 근로자들은 일자리와 임금에 대해, 자본가들은 물가와 금리에 대해 걱정하기 마련이다. 저물가와 고금리는 가진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며, 그들 자신과 신자유주의 본가인 ‘월스트리트’가 인플레를 천하에 몹쓸 것으로 여기고 실업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 까닭이다.
 
알기 쉽도록 국민경제의 흐름을 인체의 신진대사에 비유해보자. 

인체(경제)가 동맥경화증(불황)에 걸리면 혈압(금리) 수치가 높아지는 반면, 적절한 운동으로 신진대사가 활발할 경우 아주 자연스럽게 맥박도 올라가고 체온(물가)도 오르면서 열기를 외부로 발산한다. 

사상 유례가 없는 근래의 고금리와 저물가 병존 상황은 국민경제의 사실상 동맥경화, 마치 익사 직전 나타나는 저체온증(hypothermia) 징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IMF 위기 이후 그 동안의 한국경제, 고작 반쪽자리 성장과 이보다 더 비참한 지경의 ‘역분배’(逆分配) 심화 체제로 내달렸던 근본 까닭이다. 

3. 신자유주의 경제학, 21세기의 점성술인가
 
서구의 근대과학 발달사를 훑어보면, 연금술에서 화학이 그리고 점성술에서 천문학 이론 등이 오늘날 갈라져 나온 것처럼 언뜻 보인다. 

사실은 그 반대다. 먼저 타당한 과학 이론이 정립되었지만, 이에 대한 실증적, 통계적 검증이 잘못 행해진 결과, 오히려 옳게 정립되었던 이론이 거부당한 것이다.

예를 들면, 천문학이 사이비 점성술로 타락하는 등 과학의 일대 퇴보가 오래 전 고대 시대에 일어난다. 

이로 인해 중세 전 기간을 포함하여 이른바 ‘르네상스’ 이전까지 무려 1천 5백 년 이상 인류의 보고(寶庫), 과학은 암흑 속에 처박혔던 시절이다.
 
‘합리’의 과학 아닌 ‘미망’의 계시에 근거하여, 구교도 못지않게 신교도 칼뱅 등 한마디로 심하게 귀신들렸던 다수 권력자들은 인류 문명사에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는 ‘마녀재판’의 화형식을 자행했던 시기이다.

정치적으로 당대의 현인 ‘부르노’ 같은 반대자는 물론, 순전히 일반대중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겁줘서 복종케 하려는 현실 권력의 억지, 서양식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폭거가 아닐 수 없다. 

2천 3백 년 전인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두 지점에 세운 막대기 그림자의 기울기 각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 지구의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임을 정확히 계산해낸다.
 
이미 그 시기에 지구의 구형설, 자전설,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는 공전설 등이 이론으로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금성 같은 떠돌이 별, 곧 행성(行星, 사실은 별도 아니다)의 운행법칙이 기기묘묘하다는 것이다.

해와 달처럼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것도 아니고, 행성이란 게 제멋대로 오늘 밤은 이 별자리에서 저 별자리로, 다음날 밤은 저 별자리에서 또 다른 별자리로 옮겨 다니니 궁금증이 더할 수밖에. 

언뜻 그럴싸한 추론이다. 해와 달은 물론이고 별 또한 계절의 오고 감을 알려주는데, 행성들의 운행 또한 우리들 삶에 뭔가 심대한 영향을 미칠 법 하다는 착상이 말이다.

천문학을 대체하여 점성술이 시작되는 단초였다. 

과연 기원후 2세기 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대학자, 프롤레마이오스는 행성들의 별난 운동을 무수히 관측, 계량화하고, 하늘의 비밀을 캐내려는 희열 속에 이들 정교한 통계수치와 왕조의 흥망성쇠, 개인의 생사운명 등 연대기적 수치를 서로 ‘상관적’으로 연결 짓는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그리고 이제 또다시 코스모스에서 혼돈의 카오스로!

‘인과적’ 법칙성이 아닌 ‘통계적’ 상관성이 정통 과학을 뒤집어 엎어버리면서, 인류문명의 값진 과학은 어둠속으로 퇴장당하고, 사이비 점성술이 권력 주변에서 판을 치게 된다.

당시 오죽했었기에, 오늘날 서양 속담에, ‘통계는 최고의 거짓말’이라고 하겠는가. 

오늘날 경제학의 모습과 운명이 어쩌면 이와 크게 비슷한 게 아닌가 한다.

경제학은 비록 2백 수십 년의 일천한 역사에 불과하지만, 주변 과학들의 발전과 융성에 크게 힘입어, 아담 스미스로부터, 리카도, 칼 마르크스 등을 거쳐 케인즈에 이르기까지 전체와 부분을 아우르는 학문으로 비교적 단기간에 정립하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80년을 전후하여 사단이 시작된다. 시카고 대학의 ‘밀톤 프리드만’으로부터  소위 ‘합리적 기대론자’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지혜(conventional wisdom)를 응축시킨 이른바 케인즈 경제학, 곧 거시경제학에 대해 일제 공격에 나선다. 

1973년의 제1차 및 1979년의 제2차 오일쇼크 상황들 겪고 난 뒤의 일이다.

이로 인한 경기침체 및 실업증대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당대의 경제학을 지배하던 케인즈 추종자들은 전가의 보도인 양 의례히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금융 및 재정 확대에 나선다.
 
문제는, 케인즈가 염두에 두었던 ‘총수요’(aggregate demand) 부족 상황이 아니라 국제적인 원유가 인상 등 총공급(aggregate supply) 요인에 기인한 것으로, 이에 대한 케인즈적 처방은 실업이 상존하면서도 물가만 상승하고 마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현상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때구나’ 하며 밀톤 프리만 등 신자유주의자 원조들은 한마디로 ‘허수아비’ 공격을 일삼으며, 정통 거시경제학의 전면 부인에  나섰던 것이다.

케인즈 경제학 자체가 총수요 부족에 대한 처방이지, 총공급 요인에 대한 비방(祕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시경제학 자체에 모든 책임을 몰아 그간 축적된 거시경제적 지혜들을 일거에 폐기처분하려 했던 것이니, 서양판 ‘분서갱유’에 다름 아니다. 

이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당시 처방으로 내세운 건, 기껏 래퍼 곡선이니 규제완화니 하면서 자본의 무한 탐욕을 정당화시키는 바로 80년대의 소위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 곧 사이비 경제과학이다.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 떠돌이별, 행성의 운행법칙을 왕조의 권력 욕구와 결부시키면서 사이비과학 점성술을 고안했던 것과 비슷하게, 오늘의 프롤레마이로스 후예들은 이 나라 저 나라를 가리지 않고 광속도로 날뛰는 국제투기자본의 탐욕을 정당화시키면서 ‘국제자본왕국’ 건설에 이바지하면서 이에 기생하는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에 여념이 없을 지경이다.
 
80년대 중 이른바 금융자유화니 규제완화니 민영화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신자유주의 경제학, 가히 21세기의 점성술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영국에선 과연 어쩔까 하고 한 번 해봤더니, 철도와 자동차 문명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철도 및 자동차 산업 자체를 몰락시켰고, 부끄럽게도 대형 철도참사나 일으키고 저주의 광우병을 발명하는 업적을 이뤄내게 된다.

미국에선 레이건 치하 ‘빈익빈 부익부’는 그만 두고라도, 자기들끼리 쉬쉬하던 저축대부조합의 부실이 결국 현재화되면서, 여기에만 공적자금 2.000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부어야 했다.
 
90년대는 바야흐로 저성장과 분배악화의 주범,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주변 개발도상국들에 수출하기 시작한다. 자기들 안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짓들임을 내부적으로 충분히 인식한 뒤의 일이다.

일종의 ‘국제 레몬 시장’이다. 국민경제의 불안정화, 왜소화를 비서구의 여타국들에 수출하는 일이다. 

비즈니스 상술은 원래 고객의 혼을 빼는 일부터 시작한다.

80년대 중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및 여타지역에서 경제성장의 제 궤도를 밟아나가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나라들을 상대로 ‘과연 신흥시장(emerging market)이네, 신흥 공업국이네’ 추어주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국제 사기극은 비롯된다. 

드디어 20세기말 그리고 21세기 오늘의 ‘서부 활극’이다. 상대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갑자기 총을 빼어들고 난사한 뒤 자빠진 놈 호주머니를 뒤져 황금 가로채기다. 

국제투기자본의 활동영역 확대 차원에서 자본자유화를 권고하고 위기 시에는 노골적으로 강요하고, 일단 당해 국가에 진입하면 챙길 것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하여, 거시경제 측면에선 저물가 및 고금리 체제를 그리고 실물금융시장 측면에서 민영화 및 금융자유화 등 규제완화를 권고 및 강요하게 된다. 

4. 한국경제학, 사대의 마법에서 벗어나야! 

미국 등 서양의 최근 사조라면, 시장지상주의건 뭐건 일단 보편적 진리로 인정하고 무작정 수입해 들이는 경제학자나 정치학자 등 우리 학문의 ‘졸부적’ 태도와 흔히 수입명품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사들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부 강남 졸부들과 과연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한국경제학, 이젠 사대(事大)의 마법사슬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 더 이상 자신이 몸담은 국민경제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그저 주변을 맴돌면서 ‘헛도는’ 말과 ‘겉도는’ 글로 지새워서는 아니 된다. 

일종의 ‘고해성사’라고 할까.

신자유주의자(신제국주의자)들이 시장이 잘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시장은 훨씬 덜 작동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또한, 시장의 배후에서 아니 시장의 머리 꼭대기에서 음흉하게 시장을 지배하려는 신자유주의들보다, 시장은 훨씬 정직하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개인의 생물학적 ‘이기심’을 부정하려는 학문적 태도나 실천 노력은 가까이로는 중국의 ‘문화 대혁명’ 사례에서 지난날 여실히 증명되었듯이 비과학적 망상일 뿐이다.

다른 한 편으로, 시장의 절대성을 숭배하는 체하면서 기실 시장의 지배세력으로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골수 신자유주의자들, 자신들은 사태의 진상을 뻔히 알면서도 은밀하게 두루두루 신자유주의를, 결국 자신들을 숭배하기를 바라는 것은 단지 오늘의 사기 행각일 뿐이다.
 
한국경제학, 이젠 충분히 신자유주의의 마법에서 그리고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케인즈 이후 그간 질적으로 혁혁히 발전된 근대 경제학의 탐구 성과가 이들 마법을 풀어내고도 남을, 힘의 원천이다. 

거시경제학 자체가 시장의 실패를 전제로 출발하였고, 오늘 신자유주의자들이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선전하는 금융시장조차 시장실패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 것임이 소상히 밝혀진 것이다. 

만약 그들 주장대로 금융시장이 완벽하다면 은행이나 증권사 등 금융중개회사 자체가 전혀 존재할 까닭이나 이유가 없다.

금융시장조차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경제세계이기에, 자금 수요자와 자금 공급자 간에서 ‘거간꾼’ 노릇을 하는 은행이나 증권사 등 금융회사의 존재 근거가 비로소 확보된다는 것이다. 

전문용어로, 정보의 비대칭적 구조(asymmetric framework of information) 등에 입각하여 성립된 소위 ‘정보경제학’의 성과다.
 
더 이상 물가가 고정되었다거나 임금의 하방경직성 등을 종전처럼 전혀 가정할 필요도 없이, 오늘날에도 케인즈적 거시경제 지혜가 충분히 미시경제적 근거(microeconomic foundation of macroeconomics)를 가질 수 있음을 탁월하게 입증해낸 것이다. 

요컨대, 각인의 부인할 수 없는 생물학적 ‘이기심’ 말고는, 그런 이기심이 시장(market)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그리고 ‘신속히’ 조정된다는 신자유주의 관념은 거짓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증권시장에조차 외국인이든 국내의 큰 손이든 현실로 ‘눈에 보이는’ 큰 손의 가격 조작(합법적인 것에 한정하더라도)이 있기 마련이다. 현실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손 따위는 없다!

또한 금리나 주가, 환율 등 천방지축의 금융경제 변수는 일단 제켜놓고라도, 성장이나 물가, 고용 등 실물경제 변수가 ‘저 혼자’ 그리고  ‘신속하게’ 시장에서 가격조정이 일어나는 따위의 기적도 없다. 

비유컨대, 무성생식의 극소수 생물체 말고는, 사람을 포함해서 어느 유성생식 생명체도 처녀생식으로 혼자 애를 낳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둘이서 함께 열 달이 걸려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결국 죽기 마련인 데, 하 세월을 마냥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신자유주의 경제학 정체성이자 본연 목표, 평상시건 비상시건 가릴 것 없이 오로지 월가 등 서구투기자본의 이익을 완전무결하게 보호하려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투기대상 국가에 대하여 물가안정 및 고금리 체제를 강요하고 이를 위한 정책수단으로 재정건전화 및 금융긴축을 적극 권장 또는 강요한다.

당해국 통화의 고평가를 통해 현지에 유입된 외국인 투자자금의 실질가치가 전혀 훼손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저물가 고금리 체제 하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당해국의 실업이나 분배악화, 그리고 이에서 비롯되는 경제사회적 양극화 등 정치사회 혼란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일 까닭조차 없다.
 
그런데 때가 무르익으면 이들 핫머니들,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것처럼 다시 앞을 다퉈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IMF 등을 앞장세워 미국 등 서구자본의 경제긴급조치, 곧 비상대권은 발동한다. 

강조하고자 함은 국제투기자본과 부동산투기꾼의 공통점은 결코 돈을 잃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투기꾼들 상호간에 일부가 잃어야만 다른 일부가 돈을 딸 수 있는 ‘제로 섬’의 도박판이라면 지금처럼 부동산 투기꾼이나 국제투기자본이 기승을 부릴 수 있을까. (경제학 교과서는 자유변동환율제의 논거로서 투기의 제로섬 게임 성격을 비현실적으로 강조한다.)
 
바로 IMF의 구제금융이 모든 투기를 하면 할수록 수지맞게 해주는 원흉이다. 물론 전부가 대박 나는 것은 아니고 일부는 조금밖에 못 딸 수도 있다.

구제금융이란 이름으로 IMF가 지원하는 수백 억, 수천 억 달러의 자금은 공중으로 증발되는 게 아니며, 투기꾼들이 안전하게 자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당해국의 외환보유고를 경유하여 최종적으로 이들에게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애 쓰는 놈 따로, 돈 버는 왕서방 따로”인 셈이다.
 
지금대로는 모든 최종 부담은 결국 위기를 맞은 개발도상국 정부, 정확히는 당해국 서민대중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식자우환의 경제학 두 번째를 마무리하면서 갖는 고독의 변이다. “많은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면서도 그릇된 길로 들어서고 있는데, 만약 그렇지만 않다면 어찌 누구라도 그들과 함께 서고 싶지 않겠는가?” 
기사입력: 2008/04/24 [20:18]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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