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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남아돈다’는 말은 전두환 노태우의 조작
80년 대흉년시 장기도입 재고남자 ‘과잉생산’ 유포, 식량주권 생각해야
 
김영호   기사입력  2004/10/04 [11:50]
 1980년. 고통과 분노의 한 해였다.

정권을 강탈한 신군부는 갖은 악행을 마다 않고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그 해 여름에는 하늘도 울었는지 햇살을 볼 수 없는 날이 많았다. 한기마저 서린 추운 여름이었다. 꽃도 피지 않을 만큼 일조시간이 짧았다. 벼도 패지 않더니 냉해로 큰 흉년이 들고 말았다. 그 해는 오일쇼크마저 덮쳐 국민생활이 더욱 어려웠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신군부는 다급했다. 외화가 없어 해외에서 고리채를 빌려 석유를 힘겹게 사오는데 쌀까지 사와야 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석유는 값이 아무리 올라도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사올 수 있다. 그런데 쌀은 석유와는 다르다. 쌀은 흉년이 들면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신군부는 결국 수출국에 구걸하다시피 사정해서 값을 몇 배나 더 쳐주고 사와야만 했다.

 그것도 국제시장에 쌀이 모자라 닥닥 끌어 모으듯이 사들여야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쌀을 다 사오고도 모자라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는 물론이고 멀리 스페인에서도 사와야 했다. 우리가 먹는 중-장립종(자포니카)은 국제시장에서 소량만이 거래된다. 먹고 남아야 수출하기 때문이다. .

▲1980년 대흉년이 들자 정통성 없던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허겁지겁 쌀 수입에 나섰고, 그 결과 재고나 남아돌자 쌀 '과잉생산'이라는 유언비어를 유포시켰다.     © 인터넷 이미지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군부는 1980년 400만섬을 비롯하여 1984년까지 모두 2280만섬을 수입했다. 1980년 수확량이 예년 생산량보다 1600만섬이 적은 2400만섬이었다. 그러니까 700만섬이나 필요 이상으로 수입했던 것이다. 당시 신군부는 외화도 모자라는데 왜 식량위기를 넘기고도 계속 수입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수출국이 판매조건으로 장기도입을 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재고미가 1981년부터 10년이 넘도록 1000만섬 수준을 유지했다. 여기에다 1988, 1989년 잇달아 풍년이 들면서 재고미가 1400만섬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당시 노태우 정권이 정부수매를 감축하기 위해 쌀이 남아돈다고 홍보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렇게 믿게 됐다. 수입쌀이 이월되어 재고미가 적정수준을 넘어섰는데도 마치 과잉생산으로 남아도는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다.

 그러자 역대 정권의 비교우위론자들이 앞장서 감산정책을 밀어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시장개방에 맞춰 농지축소를 추진해 왔다. 쌀시장 추가개방을 위한 재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 벌써부터 정부내의 비교우위론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모양이다. 관세화를 통한 시장개방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니 말이다.

 관세화를 통해 시장을 열었다하면 쌀 생산기반이 급속하게 붕괴될 것이다. 관세를 아무리 높여도 시중가격보다 비싸게 책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까닭에 국내산은 값싼 수입쌀에 밀려 설자리를 잃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도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중국도 산업화-도시화에 따라 식량 순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인구 4800만의 나라가 식량안보에 관한 의식이 너무 희박하다. 농업을 포기하면 민족의 생존을 식량메이저에게 맡기는 사태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가격과 물량을 멋대로 조정할 테니 언제든지 식량위기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 본지고문

* 필자는 시사평론가로 <건달정치 개혁실패>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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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0/04 [11:5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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