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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원의 실미도? 반공투사의 실미도!
국가폭력의 희생자, 파묻혀진 현대사 발굴은 지속되어야
 
황진태   기사입력  2004/01/13 [09:28]

영화 <실미도>의 흥행성적이 곧 영화 <친구>의 기록을 깰 것으로 예상된다. 유신시절 신민당 김한수 의원이 “‘실미도 사건 부대 이름을 공표해 반공법 등을 어겼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선고 받기”(김진,청와대 비서실,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 재인용)도 했었던 웃지 못할 사실을 생각한다면, 실미도 부대이름은 물론이고, 수 십년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감춰진 역사를 버젓이(?) 전국적으로 상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필자는 민주화의 진전을 체감한다.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한 당신, 타자로서 떠나라니?

▲실미도 포스터  
“청계산에 ‘대한축산연구공사’라는 위장간판을 내건 곳에서 공작훈련을 받은 김철중씨는 68년 6월 처음으로 북한지역에 침투하였다. 처음에는 사진촬영, 두 번째는 인민군 탄약고와 유류탱크 폭발, 세 번째는 옥수수 수거작업장에 부비트랩을 설치하여 인민군을 살해하고, 네 번째는 대남방송하는 인민군에 유탄발사기를 쏘았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68년 10월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하루종일 남북이 교전을 벌이게 한 공작이었다. 인민군을 죽이고 납치하기 위하여 크레모아를 폭발시킨 공작을 벌인 것이다. 이 덕분에 그는 충무공훈장을 받았다.”(이정훈, 2001, 강정구,분단이산가족의 현황과 문제 해결방향,2002 재인용)

북파공작을 남북한 간 냉전하의 군사적 행위로써 그저 ‘일회적인 역사적 일화’로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김철중씨처럼 국가로부터 충무공훈장을 받는 등의 보상을 받은 공작원들이 소수라는 점이고, 이러한 소수들이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의 타자(other)로 구성된다는 불합리함 때문이다. 그 동안 국방부는 ““북파공작원의 존재와 유공이 분명한 만큼 음지에서의 조용한 보상이나 해결은 필요하다”고 밝히면서도 “공식적으로 할 수 없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면서(강정구,2002) 북파공작원들을 “사회에서도 불구의 몸으로 감시와 냉대를 받으며 취업 제한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지만 인생을 새로 출발해야 할 중요한 전환기에 당국의 조직적인 불이익 조처로 지금까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점이 정말 억울하다.”(한겨레,북파공작원을 위하여,2003.12.21)는 대한민국 첩보요원 총연합회장 김정식씨의 하소연처럼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 그들에게 희생만을 요구하고 있다.     

창피한 일, 북파공작원 보상법 이제서야 통과

영화 실미도에서 빨갱이 아버지의 자식(설경구)이 영화 후반부에서는 다른 부대원들보다 더욱더 반공이념으로 무장된 전사가 되어가는 반공교육을 초월한 반공세뇌과정은 실제로 대북첩보부대 HID의 후신인 AIU출신으로 탈주범 신창원을 잡았던 시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구체적인 부대이름은 밝힐 수 없다. 국가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간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특수부대도 국가가 불러서 갔다. 훈련과정에서 ‘나’를 버리게 됐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 목숨은 국가를 위해 있고 언제든지 바칠 수 있다. 그런 의무감과 사명감이 있어야 자긍심도 생긴다.”고 말할 정도로 긍지를 가졌다고 한다.”(강정구,2002)

하지만 이러한 반공이념주입도 그럼으로써 불러오는 애국심도 이제 북파공작원들에게 남아있지 않다. 북파공작원 출신 김정식씨는 “나는 애국자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개죽음을 당하기 싫었고 거부할 수 없어서 몇 차례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다.”며 국가폭력에 의해서 공화국 일원에게 소중한 감정 중의 하나인 애국심마저 ‘왜곡된 애국심’으로 변형되어 도리어 애국심을 혐오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인성변형의 주체인 국가는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인 물적보상만이라도 뒤늦게나마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들의 생채기난 인성에 대해서 돈으로 환산한다는 나의 발상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고 그들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화주의가 거세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의 환산과 지불조차도 제대로 안되는 한국사회 또한 그 얼마나 수치스러운 사회인가.
 
다행히도 얼마 전 국회본회의에서 최소한의 면목없는 물적 보상인 ‘북파 공작원 또는 그 유족에 대한 국가 보상을 규정한 특수유공자 예우특별법’이 통과되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면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재, 냉전 시절의 그들의 희생이 인정되고 왜곡된 역사가 수정되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든다. 

현대사를 아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

▲실미도영화중 한장면 
내가 보기에는 영화 실미도 개봉으로 인하여 북파공작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에 -그간 이와 관련 정치적인 논쟁으로 통과가 지연되었던- 북파공작원 관련 보상법이 겨우 국회를 통과했다고 본다. 영화 자체를 굉장히 진보적으로 보았던 발터 벤야민의 시각처럼 실미도 한 편으로 인하여 관객들이 갖게 되는 역사에 대한 ‘비평적 기능’으로 인해 레드 콤플렉스의 아우라가 상당히 파괴되는 상황과 일치함을 목격한다. 아니 비평적 기능을 갖는 것까지 기대하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서 어디 ‘북파공작원’이란 단어 자체가 ‘존재의 유무를 따지던 우물에서 떠나게 된 것’만으로도 가히 역사의 진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는 결코 영화가 과거 나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레니 슈펜스탈이나 나치 선전용으로 영화를 이용했던 괴벨스 또는 한국에서 반공만화영화인 똘이장군 등의 역사의 퇴보적이고 반동적인 기제로 전락되지 않도록 감독과 관객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점이다. 

영화평론가 하재봉 씨는 자신이 HID후신인 정보사에서 훈련을 받았던 경험을 들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의 훈련과정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극한적 고통의 순간으로 가득차 있다.”며 영화 실미도의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말했는데 나 또한 그러한 훈련을 경험한 지인으로부터 잠수훈련장면이나 해상침투장면에서 실제와의 괴리감이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그 지인도 그러한 옥에 티에 앞서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라면서 ‘묻혀진 현대사를 알린다’는 점이 보다 더 중요하다며 영화 실미도에 대한 가치를 높이 샀다. 하재봉의 평론도 이러한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좀 더 초점을 맞추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겨레 홍세화 기획위원은 한 현대사 역사책의 서평에서 “197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 흘린 땀과 눈물과 피를 느끼길 당부한다. 그것은 선배들에 대한, 아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영화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은 실미도의 수익으로 북파부대 훈련병과 기간병을 위한 위령탑을 세울 예정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이 또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위령탑이든 문헌을 통해서 후손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밑바닥에는 아직도 너무나 모르고 있는 현대사들이 여기저기 파묻혀져 있다. 묻혀진 역사의 유물 중에서는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에 의해서 자행된 ‘피해자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겠지만, 베트남에서의 ‘가해자로서의 역사’ 또한 외면하지 말고 발굴해내야 한다. 그러한 반성의 역사가 밑바탕이 되어야만 독도문제, 정신대 문제에서 보다 떳떳하고, 세계평화라는 화두에서 한국이 앞장설 수 있을 것이다. 

보론 - 영화는 누구나 비평할 수 있다! ‘영화 실미도에 잠재된 반공주의 합리화에 대하여’ 

본문은 사실 영화 실미도에 대한 본격 비평이라기보다는 실미도라는 실마리를 통해서 HID, AIU 등의 북파공작부대에 대한 역사적 물음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와중에 향간의 떠도는 영화 실미도를 둘러싼 인맥과 결부된 ‘주례사 비평’에 대한 문제가 기층에 잠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그에 대한 내 생각을 보론할까 한다.

필자가 듣기로는 충무로의 뒷얘기 중에서 영화 실미도의 내용이 그 제작과 관련하여 은연중에 반공주의를 합리화시켜주고 있다는 논란이 영화기자와 영화평론가들 사이를 기점으로 분할되어 나오고 있는 듯 하다.    

충무로 뒷골목의 자세한 얘기는 여기서 들먹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세세한 얘기가 오히려 논점을 흐릴 우려가 있기에 여기서는 매체에 드러나 있는 공개된 자료만을 보고서 판단하겠다. 강우석 감독이 영화 실미도의 시사회에서 북파공작원 출신들의 초대가 영화내용에 대한 그들의 반응마저 계산한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영화 줄거리中 주인공 설경구가 김일성 암살에 결국 실행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장면에서 관객들은 주인공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되어 이러한 관객의 연민이 도리어 냉전반공국가주의를 합리화한다는 주장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의도된 요소가 민주주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 이에 대한 비판담론 형성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와 관련된 스크린 밖의 사안에 대한 토론과 논쟁도 필요하다. 영화기자들과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영화계의 인맥과 관련되어 영화 실미도에 대한 비평이 ‘주례사 비평’ 내지 ‘눈뜬 장님 비평’을 그치고 있다면 분명 그들은 직업의식을 망각한 것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영화판의 세세한 정치적인 내막까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벤야민이 말했던 관객들의 ‘비평적 기능’에 대해서 긍정한다면 혹자는 이 글이 오히려 영화 실미도에 잠재된 반공주의를 합리화해줄 수 있다고 충고해주셨지만 민주화 이후에 끊임없는 민주화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조선일보와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상식적인 시민사회를 해치는 사안에 대해서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익숙하며 충분히 문제성을 자각, 공감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영화 속의 반공국가주의 합리화가 관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오버’로 보고, 그러한 부정적인 일부 요소에 비하여 영화 실미도의 ‘묻혀진 현대사를 알려준다’는 필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고 보는 것은 이렇게 영화를 보는 관객이 시민사회에서 반민주적인 사안에 대한 비평적 기능을 담지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의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관객 모두가 평론가다!

또한 영화 실미도에 대한 필자의 이러한 긍정이 반공주의에 대해서는 모르고 호평을 한 건지에 대한 비판의 경우 그간 필자의 반공주의에 대한 텍스트들을 읽고 나서 비판에 임해야 한다고 본다. 필자가 그 동안 한겨레 [왜냐면]을 비롯한 타 대학신문 등의 오프매체기고와 브레이크뉴스의 온라인매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레드 콤플렉스를 비롯한 ‘규율의 내면화’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왔었고 그러한 필자에 대한 반공주의 콘텍스트가 파악된 후에야 영화 실미도에 대해서도 반공주의란 폐쇄회로를 조심스럽게 건드렸음을 반론자가 알았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강우석 감독이 어떠한 의도에서 실미도의 수익비로 위령탑을 세우려 했는지 혹은 시사회에 언론플레이로 의도적으로 북파공작원 출신들을 초대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판단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여기서 공개된 자료가 없는 마당에 음모론적으로 영화 실미도는 무의식 중에 반공국가주의를 합리화 한다는 해석을 한다면 명예훼손으로 고소 당할 뿐이다. 만약 영화 실미도에서 반공주의 합리화가 필자가 주장한 ‘묻혀진 현대사를 알린다’는 긍정을 무시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설득력있는 평론이 영화평론가들로부터 나온다면 필자도 다시 한번 그러한 평론을 진지하게 검토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 실미도에서 대해서 무의식중의 반공주의 합리화라는 테제가 상식적인 시민사회에서 심각하다고 판단된다면 필자는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반공주의를 분쇄하는 안티테제에 적극 가담할 것이다. 

이쯤에서 필자가 영화평론계에 대한 문제점을 짚으면서 너무 평론계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정작 작품을 판단할 관객이자 네티즌들을 소외시킨 것은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만약 영화 실미도에 반공주의 합리화가 내재했더라도 이미 사회적인 환경이 반공주의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학습이 된 관객들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강조했다. 요즘 무비스트 등의 무수한 영화관련사이트에 마련된 토론장(champ)에서의 네티즌 간 상호소통상황을 본다면 영화 실미도의 의도된 반공주의가 실제 영향이 있었다면 이들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으리라.

단순히 영화 실미도의 인기로 인하여 ‘반공주의 내재, 관객에게 영향, 반공주의 합리화’란 도식이 ‘오버’해서 해석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도 해보아야 한다.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진 우연은 아닌가 말이다. 만약 영화 실미도의 흥행이 실패했더라면 영화 실미도를 둘러싼 ‘주례사 비평’이란 단어조차 수면 위로 과연 올라올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 엔터테인먼트의 산물인 인기 가수 보아나 이효리가 가장 많은 안티(anti)사이트를 갖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엔터테인먼트의 산물인 영화 실미도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높았다면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그러한 영화계 인맥과는 아무 상관 없는) 안티사이트와 네티즌들의 목소리가 그들의 정치비평마냥 영화평론계를 압도하면서 인터넷 상에서 오피니언을 리더 했을 것이다.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 한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영화 실미도에 대해서도 분명 ‘공’과 ‘과’가 공존한다. 설사 영화제작자들이 반공주의를 합리화 하려는 음모란 ‘과’가 있었더라도 영화 실미도를 통해서 몰랐던 역사적 사실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더 큰 ‘공’이 있다는 필자의 생각이 잘못됐다면 반론이 들어올 것이고, 만약 내 생각이 틀렸다면 승복할 것이다. 인터넷 신문을 비롯한 매체들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실수는 있을 수 있다. 다만 사과의 유무가 관건인 것이다. 영화 평론계의 비평이 인맥으로 그물망을 친 주례사 비평 일색이라면 그 그물을 빠져 나와 영화 실미도를 둘러싼 독자들의 새로운 비평과 반론을 기대한다. 이는 독자들에게 열린 매체를 지향하는 브레이크 뉴스의 장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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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1/13 [09:2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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