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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라레>와 <트루먼쇼>가 말해주는 것
'의지전파과잉증후군'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진실게임
 
최영화   기사입력  2003/12/22 [10:08]

당신의 생각을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 좀 더 정확히, 당신의 생각을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생각하기를 아예 포기하거나 철저한 자기검열에 의해 생각마저도 언제나 건전하게 할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내 생각을 들을 수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해준다면? 자기 자신만 그런 사실을 모른다면, 그렇게 사는 것은 가능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사토라레는 국가의 재산입니다.”

영화 <사토라레 (원제: サトラレ Tribute To A Sad Genius)>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사토미 켄이치(안도 마사노부 분)는 ‘사토라레’다. 사토라레란 의지전파과잉증후군(意志傳播過剩症候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사념파(思念波)’로 변환되어 반경 10m 이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된다.(켄이치는 반경 50m까지 생각이 전달된다) 천만명 중 한명의 확률로 존재하는 사토라레들은 예외 없이 IQ 180 이상의 놀라운 천재로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그들의 뛰어난 연구업적은 GNP를 단번에 23%이상 끌어올리기도 하기에 국가는 사토라레 보호법을 제정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라도 그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려한다. 또, 사토라레를 ‘보호’하기로 지정된 지역에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등 각종 특혜를 주므로 주민들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사토라레를 보호해 준다. 그에게 사토라레임을 알려주지 않는 것, 그의 생각을 듣고도 못들은 것처럼 연기하는 것, 즉 침묵하는 것이 주민들이 사토라레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트루먼 = 켄이치


태어날 때부터 24시간 생중계 TV쇼의 주인공으로 전 세계 220개국의 시청자들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는 <트루먼쇼 The Truman Show>의 트루먼(짐캐리 분)처럼 켄이치는 잘 짜여진 각본 속에서 자신만 진실(truth)을 모른 채 살아간다. 켄이치가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작은 마을은 트루먼이 30여년간 양육되던 거대한 세트장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마찬가지로 트루먼의 일상을 재미난 눈요기 거리 정도로 여기던 전세계의 시청자들은 <사토라레>에서 켄이치를 이용해 이익을 보고자 국가와 연합하는 마을 주민들로 되풀이 돼 나타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트루먼쇼를 보기 위해 TV앞에 앉은, 그리고 켄이치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 그들은 순간의 오락과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하는 소심한 준법시민(사토라레 보호법을 준수하는)에 다름아니다. 바로 우리들처럼.

“사토라레도 메두사와 같은 존재지.”

어릴 적 그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사토라레 특별관리위원회’의 지침을 기다리지 않고 그를 엎고 병원까지 내달려 목숨을 구해준 할머니(야치구사 카오루 분)에게 보답하기 위해 의사의 길을 택한 켄이치는 자신도 모르는 특이한 능력 때문에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의 수술 기회도 얻지 못한다. 환자의 상태가 완전히 노출돼 버릴 것을 우려한 선배 의사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대며 매번 그의 항의를 외면(모면)한다(의사와 환자간의 신뢰가 깨질 수 있기에 그에게 수술을 맡길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은 모순적이지만 사실이다).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도 없는 일에 그를 방치해 두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므로 특별관리위원회는 그를 신약연구프로젝트에 가담시키기 위해 또 한번의 치밀한 각본을 짠다. 이를 위해 파견된 정신과 의사 코마츠 요코(스즈키 쿄카 분) 역시 켄이치를 귀중한 연구대상으로 여기며 본부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다.


이렇게 켄이치의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오로지 보호하고 이용해야할 수단으로만 여긴다. 그 누구도 그와 진정으로 친밀한 사이가 되길 원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와 사귀기라도 한다면...”이라고 외치는 켄이치의 짝사랑 상대 메구미(우치야마 리나 분)의 불안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니까. 자신이 사토라레임을 알게 된 후 무인도로 잠적해 버린 첫 번째 사토라레의 다음 대사는 그들의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외로움을 절실히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라는 괴물을 아는가?
머리가 뱀으로 뒤덮혀 아주 혐오스러워서 그녀를 본 사람들은 모두 돌로 변해버리는...
사토라레도 메두사와 같은 존재지.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모두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나버려서, 그들의 생각이 모든 주위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들어.
그 누구도 돌로 변하길 원치 않는다는 걸 수 없이도 봐왔어. 그래서 나 같은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밖엔 살 수 없는 거야.

“그 애는 단지 목소리가 크고 솔직한 것일 뿐이예요

특별관리위원회의 계획대로 의사의 꿈을 포기하려 하는 켄이치를 위해 암 말기로 죽어가는 할머니는 손자의 첫 수술대상이 되기로 자청한다. 그러나 ‘할머니, 반드시 살려줄게’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온 몸에 전이된 암세포는 켄이치도 어쩔 수 없다. 회복실에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이젠 괜찮아질 거라 말하는 켄이치. 하지만 그의 솔직한 생각은 이미 할머니에게 그대로 전해져버린다. 진실을 알고도 “고맙습니다. 의사선생님”이라고 말하는 할머니와 병원 옥상위에 올라가 ‘할머니 미안해’를 연발하며 흐느끼는 켄이치의 마음은 병원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돼 사토라레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갖게 만든다. “자네가 나보다 실력이 나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술을 맡기지 않았던 걸세”라고 말하는 선배 의사와 앞 다퉈 그에게 수술을 받게 해 달라고 예약을 하는 마을 주민들은 마치 사토라레를 진심으로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아무도 그에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켄이치가 할머니 다음으로 의지하는 코마츠조차도.

모르는 게 약이다?

할머니가 자신을 업고 내달렸던 벚꽃이 환하게 핀 그 길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든(죽은) 할머니를 업고 걸어가는 켄이치를 비추며 영화는 끝이 난다. 해피엔딩을 가장하고 있는 이 마지막 장면은 행복한 결말을 제시할 수 없는 감독의 곤란한 처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트루먼쇼>가 트루먼이 결코 건너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세트장의 광활한 바다를 건너, 순백색의 흰 벽과는 대조적으로 암흑으로 묘사되는 외부세계로의 입구(세트장의 출구)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끝나버리는 것처럼(트루먼이 들어간 출구 뒤에 어떤 세상이 있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트루먼이 뛰쳐나간 세트장 밖의 세상은 정말로 진실한(true) 세상이었을까?), <사토라레> 역시 영원히 진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켄이치가 과연 외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해 주지 못한다.

결국 <트루먼쇼>나 <사토라레>가 말해주는 것은 평생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수 있다면, 세트장 안에서 살아가는 것도, 사토라레로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진실, 벗어날 수 없는 가상을 알게되는 것보다 분명 전자 쪽이 훨씬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정말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문화연대에서 발행한 주간문화정책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culture.jinbo.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 필자는 문화사회 편집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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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2/22 [10: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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