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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에브도가 일깨워준 표현의 자유
[정문순 칼럼] 샤를리 에브도, 무하마드 풍자 만평 실을 권리 있다.
 
정문순   기사입력  2015/01/19 [19:37]

샤를리 에브도 사태를 보며 언론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은 피살자들의 장례식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이번 테러로 숨진 편집장의 장례식 때 동료 언론인들은 그의 관 위에 여전히 익살스런 풍자만화를 그려 넣는 것으로 그를 떠나보냈다. 그건 어떠한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언론 자유나 종교 비판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자신들의 결의를 나타내는 것인지 모른다.
 
이번 사태를 두고 누군가는 언론 자유를 논할 수 없는 문제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표현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문제의 만평을 옹호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한 언론은 이번 테러를 불러일으킨 샤를리 에브도의 무하마드 풍자 만평이 불필요할 정도로 자극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은 샤를리 에브도의 창간 멤버에게서도 나왔으니 비단 일부의 의견이나 외부의 시각만은 아닌 듯하다. 확실히, 무하마드가 자신의 엉덩이를 까고 “내 엉덩이가 마음에 드니?”라고 묻는 만평을 보면 좀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종교나 종교의 권위자를 풍자하고 조롱하더라도 다른 방법이 많은데 굳이 이렇게까지 선정적으로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샤를리 에브도의 구성원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거나, 그들의 만평은 풍자를 겉으로 내걸었지만 실은 서구의 뿌리 깊은 이슬람권 혐오나 적대를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68혁명의 유산이라는 샤를리 에브도의 창간 과정을 모르고, 무슬림들을 분노하게 한 만평 수준만 놓고 볼 때는 황색언론의 저질스러움과 천박함이 묻어날 정도다.
 
만약 한국에서 대통령이 자신의 엉덩이를 드러내 보이며 자극적인 발언을 하는 만평이 나올 경우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응할까. 국가원수 모독죄가 될까.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까. 대통령을 닭으로 빗댄 그림도 제재를 가하는 청와대에서 그것을 그냥 두고 볼 리는 없다. 만평 작가나 만평을 게재한 언론은 청와대의 법적 대응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은 불문가지다. “그럴 수도 있지, 뭐. 풍자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이렇게 우리의 대통령은 속이야 끓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시민사회의 여론도 좋지 않을 것이다. 저질이고, 만평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평 수준에 대한 비난 외에 제재를 가한다면 턱없는 대응이다. 테러라는 극단적인 대응도 당연히 용납할 수 없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런 점에서 샤를리 에브도 창간 멤버 중 한 사람이, 사망한 편집장이 무슬림을 도발하여 동료들의 목숨을 잃게 했다고 비난한 것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합당한 지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욕을 배부르게 들을 만한 일일 뿐 테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면(어떠한 경우에도 테러를 당할 일이 없지만), 편집장이 동료 기자들이 테러에 희생된 일에 대한 책임감까지 떠안아야 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사 편집장은 테러범들을 자극하지 않을 수준의 ‘얌전한’ 만평만 그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샤를리 에브도 만평에 대해 저질스럽다, 수준 낮다, 지나치다 등 이런저런 비난을 가하는 것도 테러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 짓는 듯하여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무릇 풍자에는 한계나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언론이 자신의 만평을 보고 기분이 나쁘거나 격분할 사람들의 심리를 헤아려 수위를 조절한다면 그건 자기검열이며 자신의 존재 이유인 언론 자유에 스스로 재갈을 무는 행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나 종교지도자의 권위는 해당 종교인들에게는 하늘같이 떠받들어야 하는 것이지만 만인이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한테는 목숨 같은 종교가 누군가에게는 개똥보다 못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무하마드는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감히 그 형상을 묘사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신성불가침의 존재이지만, 그런 떠받듦을 깔아뭉개고 조롱하고 싶은 사람도 없으라는 법은 없다. 세계 인구의 1/3이 믿는 종교의 예언자를 한낱 자신의 엉덩이를 노출하여 성희롱이나 일삼는 성격파탄자나 성도착 환자쯤으로 보는 것을 샤를리 에브도에게서 빼앗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그들 눈에 무하마드가 그렇게 한심스럽게 보인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표현이 지나치게 느껴지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종교의 수직적 권위를 비웃어야 할 필요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종교 지도자의 권력이 지나치게 높으니까 지나치게 격하한 것일 수도 있다.
 
사회 전체와 사람의 일상을 지배하는 절대 권위의 종교일수록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에 의해 땅에 처박힐 처지도 감당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샤를리 에브도가 무슬림을 자극하여 테러 도발을 야기했다가 아니라 그들의 풍자 내용이 맘에 안 들긴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받아야 한다는 반응이 나와야 합당하지 않을까. 아니, 언론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논하는 자리에 굳이 만평 내용이나 수준까지 곁들여 언급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수년 전 미국의 한 목사가 9.11 테러 10주기를 맞아 꾸란을 불태운 사건은 샤를리 에브도 만평 못지않게 무슬림들을 자극했다. 급기야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유엔 사무소가 테러를 당하여 여러 명이 숨졌다. 당시 이주민지원센터에 몸 담고 있던 나는, 꾸란 소각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러 방문한 파키스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경전 불태우기도 나쁘지만 테러를 저지르거나 위협하는 이들도 나쁘다는 말이 나오길 기대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불쾌한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테러를 저지르면 안되지 않느냐고 내가 말하니까, 그들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한테는 테러 행위를 옹호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들은 완강한 태도를 풀지 않았다. “미스 정, 우리 무슬림 화 많이 났어.” “우리 기분 이해해야 해.” 그런 말을 되풀이했다.
 
그때 만났던 이주민들이 무슬림 일반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하면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 터럭 하나라도 건드리지 말기를 요구하고, 자기 종교에 대한 비난을 결코 용서할 수 없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이는 무슬림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꾸란이 불태워지고 만평에서 무하마드가 조롱당했다고 하여 이슬람교의 위엄과 권위가 곤두박질쳐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에 대범해지고 별스럽지 않게 대응하는 종교인들이야말로 자기 종교에 빛을 더하고 권위를 더 높이 불어넣는다고 본다. 그럴 경우 풍자와 모욕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표현의 자유를 무력화하는 방법은 분노를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거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하는 데 있을 것이다.
 
물론 종교가 삶의 뒷전에 물러나지 않고 여전히 삶을 통째로 지배하는 무슬림들에게 종교 비판이나 표현의 자유 보장을 운운한다면 씨알도 안 먹히는 요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슬림만 표현의 자유에 인색한 것은 아니다. 종교 비판에는 수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풍자나 야유는 고급스러워야 하며 격이 낮아서는 안된다고 자기모순적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표현의 자유에 둔감하다는 측면에서는 다른 점이 별반 없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데, 전대미문의 언론인 학살 사건에서 민주주의의 고갱이인 언론 자유도 그렇다는 걸 확인해야 한다면 참담하다.
 
나치의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 분노할 것 같은 노엄 촘스키는 포리송이라는 사람이 나치 범죄가 부풀려졌다고 주장한 책을 펴낼 때 추천사를 써준 적이 있다. 나중에 촘스키는 그 책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표현의 자유는 그런 것이다. 나치 범죄를 축소하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그걸 말할 권리만큼은 최대한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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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1/19 [19: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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