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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긍정의 힘'에 속지 마라
[류상태의 종교산책] 경쟁의 삶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글
 
류상태   기사입력  2014/07/21 [18:17]

올해 서른이 된 아들이 또래 친구 아홉과 늘 붙어 다닌 건 중학생 때부터였다. 그들은 모임 이름을 '잔챙이들'이라고 지었다. 스스로 잔챙이를 자처할 만큼 그들은 착하고 성실한 아이들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모임 이름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짜식들! 어찌 스스로를 잔챙이라 하는가!" 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포근하기도 했다. "그래, 잔챙이들이 세상 망친 적은 없지. 늘 잘 났다고 꾀자랑 힘자랑 하는 것들이 세상 망쳐왔지!" 하지만 스스로 잔챙이를 자부(?)하는 아들들이 이 모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로부터 십여 년 세월이 흘렀다. 아홉 중 하나가 작년에 결혼했다. 남은 여덟 가운데는 그냥 싱글로 살고 싶다는 친구들이 더 많단다. 경쟁의 삶에 지쳐 가정을 꾸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 '긍정의 힘'을 믿고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긍정의 힘'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한 건 IMF로 한창 몸살을 앓던 지난 세기 말부터였던 것 같다. '할 수 있다'는 믿음,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성공할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그런대로 이해하고 동의해 줄 마음도 있다. 하지만 '긍정의 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술 더 뜬다. "누구나 긍정의 힘을 믿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언뜻 고개를 끄덕이기 쉬운 이 말 속에 감추어진 허구를 밝혀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요즘 중고등학교의 학급 인원은 대개 30명 내외다. 앞에서 5등까지는 상을 주고, 뒤에서 5명은 낙제를 시키고, 나머지 20명에게는 채찍을 들어 다그치는 학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학교에서 아무리 '긍정의 힘'을 가르치고, 모든 학생이 그 말을 믿고 노력해도 영광과 환희를 누리는 학생은 여전히 5명 뿐이다.

이 제도를 통해 당장 이득을 누리는 건 학교다. 이 학교는 점점 경쟁력이 강해져 명성과 그에 따른 결과를 얻겠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제도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쯤에서 곧바로 반론이 나올 것 같다. "그 학교 학생들은 상급학교 진학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않겠는가?"

만일 그 학교만 그런 제도를 채택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학교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결국은 모든 학교가 "살아남기 위해" 비슷한 제도를 채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고등학생을 자녀로 둔 많은 학부모들은 자식이 경쟁에서 뒤처질까 두려워 방과 후에 이런 저런 학원에 보낸다. 학교는 학교대로 자율학습이다 뭐다 해서 학생들을 밤늦게까지 붙잡아 둔다. 문제는 내 아이만 열심히 하고 남의 아이는 놀아야 내 자식 성적이 올라가겠는데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하니 아이들 고생만 시키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 함정을 사회에 나가서도 피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제한된 취업문을 돌파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스펙쌓기에 몰두한다. 소수만 그렇게 하고 다수는 펑펑 놀아야 그 스펙쌓기가 성공할 텐데 모두가 기를 쓰고 거기에 매달리니 고생만 할 뿐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게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화'된 세상의 실상이며, 브레이크가 파열된 채 내리막길을 달리는 자본주의 세상의 속성이다.

그러면 경쟁사회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안 된다고 자학하는 것? 여전히 '긍정의 힘'을 믿고 더욱 노력하는 것? 아니면 제도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것?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런 가능성들을 놓고 젊은 그대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2. 열심히 노력해도 정규직 일자리 하나 얻기 힘들다면 그건 그대 탓이 아니라 사회에 문제가 있는 거다.

우선 "나는 안 돼. 나는 열등한가 봐."라는 자학모드로 돌입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가 노력을 게을리 했다면, 일 하기 싫어서 놀고 있는 것이라면, 그대의 자학을 말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대가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어느 정도의 학력과 스펙을 갖추었는데도 제대로 된 정규직 일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면, 그건 그대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다.

요즘 이스라엘이 자기 조상들의 격언을 잊은 것 같아 애석하지만,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온다. "능력을 비교하면 다 죽고, 개성을 비교하면 다 산다."

조금 전의 학교 얘기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학교가 경쟁논리보다 학생들의 행복과 성숙을 위한 제도를 채택한다면, 상대평가보다 절대평가를 도입하는 게 좋다. 상대평가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한 반 30명이면 일등 한 명에 꼴등하는 학생도 여전히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절대평가를 도입하면 모두에게 백점 만점도 줄 수 있다. 다함께 노력하여 하늘이 내려주신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꽃피운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보다 인간적인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능력이나 스펙과 상관없이 성실한 시민 모두에게 행복한 삶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3. 작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건 바꿔보자.

왜곡된 사회구조를 지적하거나 고치려 하지 않고 개인에게만 긍정의 힘을 믿으라고 말하는 건 사기다. 진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기득권층의 부당한 이익을 변호하고 약자의 삶을 더욱 잔인하게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긍정이 힘'이라는 명제 자체를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다. 그 긍정이 '개인의 성공과 이익에 집착하는 긍정'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을 꿈꾸는 긍정'이라면 결과는 매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건 함께 꿈꾸는 것이다. 보다 나은 미래,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어느 젊은이가 이렇게 절규했다. "혼자 꾸는 꿈은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께 꾸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나는 그의 말을 믿는다. 물론 꿈을 꾸기만 해서는 안 된다. 꿈의 실현을 위해 준비하고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쯤 되면 "저놈이 무얼 선동하려고 저러나?"하고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종교문제, 특히 개신교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바가 있지만, 사회구조 문제에 앞장서서 행동하거나 선동(?)할만한 기개나 용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소시민들이 꿀 수 있는 꿈과 실천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기준을 젊은 그대들에게 좀 소개하고 싶다.

행복한 사회를 꿈꾸며 내가 반드시 실천해야겠다고 내 스스로 정한 절대의무사항은 선거 하나 뿐이다. 나는 선거만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눈을 부릅뜨고 어느 당 어떤 놈이 진정 백성을 생각하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투표한다. 누구나 그리 어렵지 않게 참여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 하지만 이 선거가 세상을 바꾸는데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다음으로 내가 선택한 방법은 현장에서 뛰는 행동가들을 측면에서 돕는 것이다. 내가 직접 뛰기에는 용기도 기개도 모자라기에, 그들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조금 보태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내 성향에 맞는 시민단체 두 군데를 선정하여 약간의 기금을 회비로 내는 방법 말이다.

바른 말 한다고 생각되는 신문을 구독하는 것도 내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거의 모든 신문 기사를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 역시 종이신문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한 신문을 선택하여 구독하고 있다. 그 신문사가 계속 바른 말 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제시한 세 가지 방법, "알고 보니 별 거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별 것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길이다. 하지만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이 정도만 실천하더라도 큰 힘으로 모아질 수 있다. 젊은 그대들이여, 그대도 동참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4. 마음조절로 행복해지기

우리는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고단한 세상이 다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괜찮은 세상으로 바뀔 수 있을까? 우리의 믿음대로 될 것이다.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바뀔 것이라 믿고 함께 힘을 모으면 반드시 바뀐다.

하여 그런 세상을 위해 꿈꾸며 준비하자고, 작은 부분이라도 참여해보자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고 투표하자고 젊은 그대들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나운 세상이 주는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어찌 하면 좋을까?

마음조절로 세상이 주는 아픔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 나는 십 년 전에 교사직과 목사직을 내려놓고 거친 세상으로 나왔다. 꾀부리지 않고 몇 년 노력하면 남들 버는 만큼 벌 줄 알았다. 하지만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을 너무 쉽게 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것일까. 이렇게 되면 스스로 비참해질 수 있지만 마음조절로 고통을 극복하고 있다.

외출 중 혼자 점심이나 저녁을 해결해야 할 때 나는 거의 편의점에서 천 원 정도의 컵라면으로 때운다. 라면은 맛있다. 국민 간식이라고 하지 않는가? 편의점에는 뜨거운 물도 준비되어 있어 편하고 쉽게 먹을 수 있다. 스스로 비참하다고 생각하면 비참하다. 그러나 마음을 조금 바꾸면 행복하고 떳떳할 수 있다. 시간 절약에도 아주 좋다. 영양이 문제라고? 요즘 영양부족보다 영양과잉이 문제 아니던가? 염분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국물은 조금만 마시고 그냥 버리면 된다.

남자들은 대부분 차에 관심이 많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나는 오래된 경차 마니아다. 요즘 고급 외제 승용차에 꽂혀 있는 젊은이들을 많이 본다. 그들은 좋은 차를 갖고 있어도 별로 행복해하지 않는 것 같다. 볼보나 BMW를 갖고 폼재는 젊은이의 행복(?)은 페라리를 몰고 나타난 친구를 보는 순간 사라질 수 있다. 나는? 그냥 행복하다. 경차가 얼마나 좋은데. 경제적이지, 환경오염 덜 시키지, 나는 체구가 작은 편이니 불편한 것도 없다. 적어도 차에 관한 한,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 경차 마니아니까.

세상을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많이 벌어 많이 쓰고 사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적게 벌어 알콩달콩 사는 방법도 있다. 전자가 후자보다 반드시 행복한 건 아니다. 오히려 후자의 방법을 습득한 사람이 훨씬 더 큰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도 있다.

우리 사는 세상에는 몇 만 원짜리 밥을 먹고 고급차를 타면서도 불행하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하지만 (끼니를 굶을 정도가 아니라면) 마음먹기에 따라 천 원짜리 밥을 먹고 경차를 타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 그대가 돈이나 스펙이 곧 그대 인격의 가치라고 말하는 세상의 속삭임을 비웃을 수만 있다면...

젊은 그대들에게 아주 오래된, 어쩌면 고딩때 수업 시간에 들었을 만한 얘기를 하나 들려주고 싶다. 어느 날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명성과 인품에 감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찾아와 말했다. "위대한 철학자여, 그대가 원한다면 내 제국의 절반이라도 떼어주겠소." 디오게네스가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한 발짝만 옆으로 비켜주시오. 햇빛이 내게 도달될 수 있도록."

▲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꾸준히 모색하는 류상태 목사     ©대자보

알렉산더 얘기를 꺼냈으니 하나 더. 어느 날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 앞에 끌려왔다. "네 이놈! 이 무슨 못된 짓이냐?" 호통을 치는 왕에게 해적이 웃으며 말했다. "대왕이시여, 내가 하는 일은 왕이 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대왕은 크게 해서 왕이 되었고, 저는 작게 해서 해적이 된 것이지요."

나는 대왕도 해적도 싫다. 그냥 소시민이 좋다. 마음조절로 현실이 주는 아픔을 조금씩 해쳐가며 좋은 세상이 오기를 꿈꾸는 소시민 말이다. 앞에서 한 말이지만, 소시민은 세상 말아먹을 일이 없다. 위대한 것 찾고, 큰 것, 거창한 것 찾는 것들이 세상 말아먹더라.

젊은 그대들이여, 그대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대 자유지만, 이거 한 가지는 꼭 부탁하고 싶다. 돈이나 라이선스 좀 가졌다고 너무 재지 말고, 그런 거 없다고 기죽지 마라. 그건 그거고, 사람의 인격과 가치는 그런 것으로 따지는 게 아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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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7/21 [18: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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