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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목회자 문제, 이대로 좋을까요?
[류상태의 주일편지] 목회자는 목회와 교육 전념, 재정과 행정 관여말아야
 
류상태   기사입력  2013/08/31 [10:16]
9월이 시작되는 오늘, 그렇게 기승을 부렸던 더위도 이제는 한 풀 꺾이고 어느새 가을로 성큼 들어섰습니다. 한 낮의 기온은 아직 30도를 넘나들기도 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붑니다. 사색의 계절이 시작된 만큼,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우리 한국 교회가 처한 여러 문제들을 교우님들과 함께 솔직히 짚어보고, 이에 대한 개선방안도 찾아보고 싶습니다.

1. 많은 교파와 난립한 신학교 문제에 대하여

우리 한국 교회는 백여 년의 길지 않은 역사를 가졌지만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교인 수 일만 명이 넘는 교회가 전 세계에 50여개 정도 있는데 그 중 절반은 한국에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교회는 내부갈등과 도덕적 해이로 인해 큰 위기를 맞고 있으며, 심지어 심각한 사회갈등까지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갈등의 한가운데에 타문화와 공존하지 못하는 배타적인 교리와 함께 목회자의 자질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도덕적 탈선과 금전적 비리 등으로 사회의 조롱과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하여 배타교리를 극복하는 것과 함께 목회자들의 자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지 못하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매우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로 큰 갈등과 분열을 겪었습니다. 장로교의 경우, 먼저 고신(고려신학교가 중심이 된 교단)이 분리되어 나갔습니다. 이후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로 갈라졌고, 예수교장로회는 ‘통합’과 ‘합동’으로 다시 갈라졌습니다. ‘합동’은 100개가 넘는 교파로 다시 갈라져 교파마다 자체 신학교를 세우거나 군소교단이 연합하여 신학교를 세워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1994년에 발행된 홍일권 저 <세계기독교정보(330선)>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 장로교는 128개의 교파로 분열되었으며, 약 400개의 신학교 간판 밑에서 양성되는 졸업생 수는 매년 15,000명을 돌파했습니다. 오래된 자료이기에 작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겠으나 개신교회의 목회자 자질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학교가 난립하여 자격 미달의 교역자를 쏟아내는 현실부터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목회자양성과정을 제대로 이수하려면 학부 4년, 신학대학원 3년, 현장실습과정 2년 등 고교 졸업 후 9년의 과정을 마치고 목사고시에 합격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독일과 미국 등 기독교 선진국에서도 채택하는 제도로서 이 과정만 제대로 지켜져도 자격미달의 목회자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 교회에는 목회자 양성과정이 너무 많으며, 제대로 과정을 밟지 않고 목사가 될 수 있는 편법 과정도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학부과정조차 제대로 밟지 않고 대충 1~2년의 속성과정으로 목사안수를 주는 무책임한 교단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제도교단이 책임감을 갖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정규과정의 신학교라 하더라도 교회 현실을 고려하여 적정선에서 목회자 수급문제를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인식하고 정원감축을 제안했던 일부 신학교수들의 의견은 교회성장논리에 젖은 각 교단의 이해관계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수요공급이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졸업생을 대량으로 배출하는 작금의 현실은 한국 교회 스스로 위기를 더욱 재촉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 교계에는 스펙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풍토와 맞물려, 학사과정이나 석사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은 목회자가 편법을 통해 허위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학력을 위조하는 것은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범죄일 뿐 아니라, 교우님들을 속이고 교회 전체에 위선과 허영을 불러오기에, 우리 한국 교회의 모든 교우님들이 잘 분별하고 감시하여 반드시 막아내야 할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가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미 여럿으로 나누어진 교단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교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인지 다양성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는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우리 한국 사회에서, 한국 교회가 분열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교단 간에 또한 교회 간에 서로 존중하고 대화하며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교리문제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여 옳지 않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교리는 극복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형제교회인 가톨릭은 이미 50여 년 전에 배타교리를 극복하고 이웃종교 이웃문화와 상생하고 협력하는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도 교단 간에 서로 협력하고 대화하면서 사회로부터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고, 난립한 신학교 문제와 목회자 수급 문제도 상호간에 충분히 협의하고 조정하여, 교회 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로부터도 존경 받는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 목회자는 목회와 교육에 전념하고, 재정과 행정에는 관여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성서의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 베드로에게 ‘양과 목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본문을 주제로 설교하는 목회자들 중에는, 본문에 나오는 양을 오늘날의 교인으로, 목자를 오늘날의 목사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본문의 의도에 어긋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해당 본문에서 그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요한복음 21:15~17, 공동번역)

이 본문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이 우리말 성서에는 똑같은 단어로 나오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라고 두 번 반복해서 물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물으심에 대해서 베드로도 “제가 주님을 사랑(필레아)합니다.”라고 두 번 반복해서 대답합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아가페’ 사랑을 반복하여 요구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필레아’의 사랑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는 베드로의 처절한 심정을 느끼며 마음 깊이 공감합니다. 본문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도 예수님과 베드로의 다음 대화 사이에 한동안 깊은 침묵이 흐르지 않았을까요?

마침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필레아)하느냐?”라고 물음의 내용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제야 안도하며 “제가 주님을 사랑(필레아)하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아가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또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무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필레아’는 친구나 학문, 예술 등을 사랑한다고 할 때 사용하는 ‘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베드로는 “아가페적 사랑은 자신이 없지만, 조건적이고 제한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라고 답을 한 셈입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했기에 신중해진 것일까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정직한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도 자신의 원래 요구를 철회하시고 마침내 “네가 할 수 있는 조건적 사랑이라도 열심히 실천하여 내 양을 돌보아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오간 아가페와 필레아의 논점을 넘어(이 문제는 이미 예수님께서 양보하셨으므로) “그렇다면 잘 돌보아 달라.”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상을 ‘네 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의 양을 돌보아라.”가 아니라 “나의 양을 돌보아라.”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한계를 인정해주시고 양으로 비유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돌보아달라고 당부하셨지만, 돌봄의 대상이 ‘너의 양’이 아니라 ‘나의 양’이라는 점은 명백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양으로 비유하는 것이 허용되려면 목자는 예수님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교인을 양으로, 목회자를 목자로 설정하고 나면 예수님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교회의 최고운영기구인 ‘당회’의 장이 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힘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 쉬운 이런 구조는 현실적으로 목회자와 교인을 상하관계로 만들고 목회자가 독선과 아집에 쉽게 사로잡히는 토양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목회자와 교우님들이 평등한 협력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목회자가 교회의 중심을 차지하는 이런 구조에서는 입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예수님을 찾는다 하더라도 결국 교회는 예수님이 아니라 목회자의 차지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뿐 아니라 그 자리를 세습하기까지 하는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엇나간 행태는 이런 위험성이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교회 행정과 재정은 교우님들이 맡고, 목회자들은 목회와 교육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우님들도 교회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목회자와 교우님의 역할 분담이 적절히 이루어져 교회의 민주화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그런 풍토가 정착될 수 있도록 교우님들의 적절한 참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3. 목회자 계약제가 시행되도록 해 주십시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 대부분의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나이가 젊고 경험이 적은 사람이라도 목사안수를 받고 한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면 ‘당회장’이라는 직임이 주어져 교회의 방향과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게다가 ‘위임목사’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교단에서는, 한번 위임목사로 위촉되면 은퇴할 때까지 평생직이 되어 후에 문제가 발생하고 교인들이 원하더라도 사임을 촉구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위임을 받은 담임목사가 사회범죄에 해당하는 문제를 일으키고도 여전히 위세를 행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주의 종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비상식적인 논리가 통하는 것도 독선적인 교리와 함께 위임목사제가 가져온 폐단의 하나입니다.

이렇듯 ‘담임목사 위임제’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습니다. 위임받기 전까지는 교우님들을 섬기며 겸손하고 신중하게 목회하던 담임목사가 위임을 받은 후에 서서히 변해가는 것도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자리가 안정되니 긴장감이 사라지고 타성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계이건 경제계이건, 책임자를 세울 때는 일정 기간의 임기를 보장해 주고 후에 한번이나 두번 재신임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민주사회의 상례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위임받은 담임목사는 법적으로 은퇴할 때까지 시무 보장을 받게 되며, 설교나 행정에 능한 목회자의 경우 그에게 교회권력이 집중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저는 담임목사를 포함하여 모든 목회자들에게 2~3년 단위로 재신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를 제대로 하는 목회자라면 이 제도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정기적으로 교인들에게 신임을 얻고 새로운 각오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더욱 겸손하고 진실된 목회자로 사역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계약제가 우리 한국 교회에서 정착하게 되면 교회 안팎으로 목회자로 인한 비리나 사회문제는 대폭 줄어들고 사회로부터 존경심을 회복하는데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4. 목회자 급여에 대한 합리적 기준이 마련되도록 해 주십시오.

한국 교회에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통일된 조직이 없기에 목회자간의 임금 격차가 매우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대형교회 목회자가 있는가 하면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목회자도 많습니다.

심지어 월급은 없고 교우님들이 모아주시는 곡식이나 부업으로 겨우겨우 살아가는 가난한 목회자도 적지 않습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이웃사랑을 말하고 실천하는 일 뿐 아니라, 동료들 간에 벌어지는 이런 불균형도 함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일부 교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호봉제를 한국 교회가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수급을 적정선에서 조절하고, 합리적으로 마련된 호봉제를 각 교단의 주도 하에 엄격히 실시하여, 재정이 풍부한 교회의 총회 상납금을 늘리고 그 돈으로 가난한 목회자의 임금을 지원한다면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교계에서 폭넓게 시행되고 있는 ‘원로목사제’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목회하신 담임목사님이 은퇴하셨을 때, 교우님들이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추대하는 명예직으로서의 원로목사제도는 의미가 있고 더욱 장려할 필요도 있습니다.

하지만 은퇴 후의 생활비를 교회가 계속 책임지는 원로목사제는 개교회의 재정을 더욱 어렵게 하고 교회가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는데 제약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은퇴한 목사님들의 생계문제는 교단연금, 또는 국민연금으로 해결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도 맞습니다.

목회자의 정년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정년은 55~60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나라 교단은 목사님들의 정년을 70세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정년 연장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지만 사회의 흐름과는 너무 동떨어진 목회자의 정년 문제는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꾸준히 모색하는 류상태 목사     ©대자보
목회자는 교사나 교수들처럼, 인생의 풍부한 경험이 더욱 요구된다는 점에서 다른 직업인들보다 늦은 정년을 인정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 초중고 교사의 정년이 62세, 대학 교수의 정년은 65세인 점을 고려하여, 사회의 흐름과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고 후진들에게도 길을 터주는 방향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의 제도적인 문제들을 교우님들께서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해결을 위한 첫 걸음입니다. 만약 저의 의견에 동의하신다면, 교우님들께서 각자 속한 교회에서부터 한걸음 한걸음씩 이런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 주십사 부탁드려도 될까요?

우리 예수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만큼 힘을 모아 실천하면, 한국 교회는 다시 우리 사회의 존경을 받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사람들과 한국 교회를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또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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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8/31 [10: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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