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성폭력에 저항할 수 없는 환경은 왜 무시되나
[정문순 칼럼] 여자가 싫다고 말할 수 없는 환경은 성폭력의 온상이다
 
정문순   기사입력  2011/01/13 [23:59]
르느와르가 그린 <알프레드 시슬리 부부>는 페미니즘에서 논쟁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 르느와르가 그린 <알프레드 시슬리 부부>     ©
시슬리 부부는 이때가 결혼 직후였다. 여자의 심각한 표정이 애정에 들떠있는 남자와 대조적이다. 스티븐 컨 같은 학자는 그림 속 여자의 표정이 남자의 직선적이고 단순함을 무력화하는 다양하고 깊은 내면을 드러낸다고 하면서, 여성을 남자의 시선에 포박된 수동적 존재로 보는 시각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림에서 여성의 승리나 우위가 쉽게 읽히지 않아 난감하다
 
그림 출처:(http://www.pierre-auguste-renoir.org/Alfred-Sisley-With-His-Wife.html)

여자는 신혼의 들뜸 못지않게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이 결혼이 자신에게 얼마나 행복할지. 닭살스럽게 구는 이 남자가 정말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이들 줄줄이 낳고 종일 살림하고 남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결혼생활이 과연 장밋빛이 될 수 있을지. 그러나 여자는 표정에 담긴 말을 끝내 입으로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와서 고민을 드러내봐야 돌아오는 건 비난밖에 없기도 하다. 자기 마음의 먹구름을 남자에게 드러내어 실망을 주는 일도 원치 않을 것이다. 여자가 불편한 마음을 삭여야 하는 이유는 권력 관계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철저히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는 데 있다.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여자에게 그다지 결정권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권력이 높은 사람에게 의심, 불안, 불신을 품거나 그것들을 드러내보인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모 대학 도서관에서 한동안 같은 공간에서 자주 얼굴을 부딪치게 되어 안면을 익힌 중년의 남자가 있다. 몇 번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주기도 했더니, 어느날 남자는 내 전화번호를 알아갔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연락처를 줄 생각은 없었지만 거절할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살가운 태도를 보이는 상대를 의심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꺼려졌다. 얼마 뒤 전화가 왔다. 부탁할 일이 있다면서 만나자는데 나는 거절하면서도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할 말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처음에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을 때 물리쳤으면 번거롭게 감정을 소비할 일이 없었을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해 보이는 일이 내게는 쉽지가 않았다.

남자의 일방적 태도를 대할 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여자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점은, 남자가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결과는 여성에게 치명적이기도 하다. 나쁜 의도를 가진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한 결과는 남자의 의도대로 될 확률이 높다. 만약 남자가 보내는 호의를 의심하지 않거나 또는 의심이 가더라도 불편한 마음을 내색하는 것이 쉽지 않은 처지임을 이용하는 남자가 있을 경우, 싫다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하는 여자는 ‘쉬운 여자’일 따름이다.

최근에 한 남자가 30년 지기의 딸을 오피스텔에 데려가 술을 먹이고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되었으나 검찰이 불기소처분한 사건이 있었다. 검찰의 처분에 분노한 딸의 아버지가 법원 누리집에 딸이 받은 고통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검찰이 남자를 기소하지 않은 이유는, 고소인이 남자의 행동에 저항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얼마 전에는 채팅에서 만난 10대 초반의 미성년 여자아이를 불러내 남자 대학생 여러 명이 집단강간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이 나온 사건도 있다. 여기에서도 법원의 판단은 피해자의 저항 유무였다.

성범죄 사건을 다루면서 ‘피해자’가 ‘동의’ 했는지가 아니라 ‘저항’을 했는지 따지는 것이 가해자에게 철저히 기울어진 시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치거나 몸에 상처가 남지않는 한 입증하기도 어려운 피해자의 ‘저항’ 유무를 따지느라 정작 성폭력 사건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저항을 포함하여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드러내거나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웠던 상황이나 맥락은 일체 간과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고 아버지의 오랜 친구라면 자신에게도 아버지나 다름없게 느껴지는 존재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 친구가 아버지를 만날 생각은 않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난데없이 호의를 베풀며 오피스텔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이왕 만난 김에 술도 한 잔 하자고 한다. 아무리 아버지 같은 분이지만 둘 만의 공간에서 술을 먹자고 하니 왠지 기분이 꺼림칙하다. 그래서 거절하려는 찰나 아버지와 딸 사이나 다름없는데 뭘 그러냐고 한다. 친구 딸이면 자기 딸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한다. 여자는 망설인다. 아버지 같은 분을 의심하는 마음이 들통 나는 것이 불편해진다. 사람을 괜히 의심하는 내가 나쁘지. 결국 둘만이 있는 공간에 있게 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던지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지 술을 먹게 되었고 이것이 나쁜 의도를 품은 자에게 나쁜 일을 당할 수 있는 여건으로 작용했다면? 내가 사건을 담당한 검사라면 능히 따져보았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사건을 재판에 올리지 않은 검사의 결정에 이런 고려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수사나 재판 당국이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사건 전후 피해자의 저항 유무에 치중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여성의 처지를 살피는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성폭력 같은 중대한 범죄를 입을 경우 피해자의 판단력은 오히려 흐려지거나 퇴보할 수도 있다. 미성년이든 성년이든 자신이 성범죄를 당하고 있다거나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의식이 작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성폭력이 피해 여성에게 더없는 불명예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인데다 한 사람의 인격을 철저히 말살하는 범죄를 당했다는 사실을 피해자 스스로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처럼 굴던 남자가, 오빠나 삼촌처럼 다정하게 굴던 남자어른들이, 한순간에 자신의 인격을 낱낱이 산산조각냈다는 사실을 피해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럴 경우 피해자는 자신이 남자를 꾀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상황을 스스로 조장했다는 자책에 빠지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자신을 책망함으로써 스스로 벼랑에 내모는 일을 극복하는 피해자만이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게 된다는 사실도 피해자가 ‘저항’했니 안 했니 따지는 당국은 이해할 수 없다.

성폭력 상황에서 ‘저항’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이라 간주하는 이들은 저항의 표현이 어디까지나 가해자-피해자 간에 권력이 동등하게 분점된 전제하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자가 싫다고만 생각하면 언제든 성폭행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양성간 권력구도가 균등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 친구이거나 삼촌뻘 나이의 남자와 어린 여자가 과연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하는가?

나쁜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 상대를 고분고분히 믿으려고 했거나, 불편해도 속마음을 내색할 수 없는 처지를 악용하는 남자들이 있을 가능성은 살피지 않고, “여자가 싫었으면 안했겠지.”라는 생각을 깔고 있는 성범죄 사건 수사나 재판은 단언컨대 깡그리 무효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1/01/13 [23:59]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