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황산벌, 역사속에 감춰진 슬픈 '거시기'여
김유신과 계백,'국익'과'전라도 죽이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
 
이숙진   기사입력  2003/10/29 [18:38]

황산벌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박중훈이 나오는 '코미디' 영화란 말만 듣고 일요일 저녁, 한번 웃을 요량으로 아이들을 동반한 온 가족이 동네 개봉관으로 슬슬 산책을 겸해 나갔다.

▲영화 황산벌 포스터     ©씨네월드
영화는 듣던 대로 코미디였다. 하지만 웃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박장대소 끝에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목울대의 통증을 참아내야 하는 슬픈 코미디...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황산벌을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를 떠 받치고 있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정치공학과 21세기의 반쪼가리 한반도에서 조차 삼국시대를 살고 있는 자부심 대단한 한민족, 한핏줄 대~한민국!에 대한 조롱과 야유로 읽었다.

"전쟁은 정통성 없는 권력이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하는 것"이며 "전쟁은 미친놈들 짓"이라는 영화속 김유신의 실토(?)와 그 전쟁의 '약발' 받는 희생양이 되어버린 화랑들의 모습에서 난 미국의 부시와, '국익'이라는 약발을 위해 파병되는, 얼굴에 회칠하고 떠날 똑같은 모습의 이 땅의 화랑들을 보았다.

영화에서 관창은 "지금 나가 싸우다 죽으면 천년을 살게 될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죽으러 나가라고 독려하는 아버지에게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와예, 그라문 아부지가 가지예" 그 아버지 대답한다. "그라고 싶어도 내는 가도 약발이 안선다" 우리도 똑같이 한번 묻자. "와예, 그라문 국익이 필요한 당신들이 가지예"

▲영화 황산벌의 한장면     ©씨네월드
지금 우리가 '전라도 죽이기'에 동원하고 있는 세뇌된 생각과 말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열한 것인지를 "백제 것 들은 씨를 말려야 할 종자..."라고 독기를 뿜어내는, 백제와는 '씨가 다른' 과거 신라군사들의 입을 통해 듣는다. 그런 감정의 골 만큼 그들은 도무지 해독이 안되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계백의 일상용어 "거시기한 머시기"가 뜻하는 '공포스런' 암호를 풀기까지는 어떤 작전도, 행동 명령도 내리지 못하는 유신과 계백의 조각조각 끼워 맞춰야 하는 퍼즐 만큼이나 어려운 의사소통이 지금의 우리와 과연 다른가.

의도를 의심하고 어떤 맥락에서 저 말이 왜 지금 시점에 저 입에서 나오는지 알아내기 바빠 뻔한 말 풀이조차도 기어코 복잡한 '암호'화 해 버리는 특이한 버릇들. 서로 같은 말을 쓰되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신비한 남한 삼국의 의사소통의 한계를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한 것이 황산벌의 '거시기'다. 참으로 '거시기' 하지 않는가.

▲영화 황산벌의 한장면     ©씨네월드
영화는 또한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 통일의 꿈을 이루려는 김유신을 말이 좋아 '나당연합'이지 기껏해야 당나라군의 군량미나 보급하는 '쌀배달 꾼'으로 묘사하고, 죽으러 나가라는 아버지에게 '그 좋은거 아버지가 하라'는 관창,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계백의 말에 '호랑이는 그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 거'라며 "죽어라 하면 아이고 서방님, 아이고 아부지 그리 혀지요, 할 줄 알았느냐"며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쟁에 나가려는 계백에게 한치의 물러섬 없이 맞서는 계백의 아내의 모습 따위는 우리들이 믿고 싶은 '신화'를 뒤집어 버린다.

도대체 못 알아먹을 각 지방의 사투리를 영어로 알아 듣고 "영어 끝나면 이야기 해 달라"며 잠든 5 살배기 딸을 들쳐 안고 극장문을 나서는 남편 휴대폰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신소식이 전해졌다. 아이를 넘겨주고 허겁지겁 대책회의에 참석하러 나서는 노동자인 남편의 일요일 오후는 그 마저도 한가롭지 못하다.

▲영화 황산벌의 한장면     ©씨네월드
자신이 전쟁에서 죽을 것임을 알고 이후 구차하게 살지 말라며 반항하는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쟁터로 떠나는 계백과, 가족을 두고 싸우다 혼자 죽거나 분신을 한 무명의 노동자들 사이에는 어느 만큼의 차이가 있는걸까. 그들이 살았던, 살고 있는 천년 세월의 거리 만큼일까. 아님 깃털 무게 조차도 안되는 만큼일까. 그들은 '계백'과 '노동자'라는 이름 때문에 죽었을까, 죽어 이름을 남겼을까. 또한 계백에게 죽임을 당한 그의 가족들과 천년 이상의 세월을 건너 뛰어 죽은 남편 옆에 남겨진 노동자 가족들은 같은가, 다른가. 그들의 분노는 어디를 향해 있을까. 남편일까, 이 뭣 같은 '거시기'한 세상일까.

그래서 나에게 황산벌은 슬펐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3/10/29 [18:38]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