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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명박정권은 진중권의 입을 틀어 막는가?
[비나리의 초록공명] 이제 한국에서 감시자의 감시자는 존재하지 않는가
 
우석훈   기사입력  2009/12/18 [17:28]
유럽의 많은 논쟁들은 사실은 그 맥락이 히틀러와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히틀러 사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자신들이 학문의 중심이고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버젓이 히틀러 현상이 생겨난 것은 유럽 학문의 수치이자, 질문거리라고 할 수 있다.

칸트, 피히테, 셀링으로 이어지고 곧 이어 니체까지 등장하는 독일 성찰학파의 글은 어렵기로 소문났지만, 일단 읽고 나면 사색의 힘만큼은 정말 강해진다.

그러나 이런 독일 성찰학파들을 읽고, 나는 뭔가 알았다라고 할려면, 어떤 초등학생의 질문 앞에 쩔쩔매게 된다.

그런데 왜 히틀러가 나왔어?

물론 요즘의 프랑스 사람들이 곧잘 곤경에 처하게 되는 처지와 약간 맥락을 같이 하지만, 그 강도와 깊이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프랑스 철학과 예술이 모더니즘의 등장 이후 한 세기 정도 세계를 움직였는데, 요즘 프랑스 대통령이 사르코지이다.

프랑스 친구들을 만나서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한참을 떠들면 나도 가끔 열받아서, "근데 왜 너네는 사르코지 뽑았는데?"라고 한 번 쏴붙여주면, 얼굴이 울그륵 불그락 해지면서, 논쟁이 썰렁하게 끝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건 에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살아서 신이 된 에코와 같은 사람이 있는데, 왜 이탈리아는 이 모양이야?  


이 질문보다 백 배는 강도와 깊이가 센 것이, 왜 히틀러가 나왔어? 이 한 마디에 대답하기 위해서 유럽 학자들은 엄청나게 고민을 했는데, 실제로 학문을 대하는 유럽 민중들은 학자들에게 당신의 학문은 히틀러가 나온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논증이 있는가, 그런 질문들을 수 백번도 더 한 셈이다.

그런 질문 중의 하나가 gardian du gadian이라는 것이 있다. 심리사회학 분야에서 나온 질문인데, 우리 말로 표현하면 '권총 한 자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Qui garde lele gardian?
 
이 질문이 최초의 질문이다. 누가 감시자를 감시할 것인가?
 
얘기는 이렇다. 결국 통제 사회라는 것이 권총을 들이대고 누군가를 감시하는 사회와 같은 것인데, 이 감시자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있는 또 다른 감시자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감시자에게도 또 다른 감시자가 있고.
 
북한의 5호담당제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 감시자의 피라미드 구조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아주 간단한 네트워크 구조로 감시의 위계관계로 사회 구성원 모두를 감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감시자를 두고 있는 사회는 민주주의와 상관이 없고, 우리가 만들어야 할 사회와 상관이 없는, 통제와 감시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이다.
 
진짜 질문은 이렇다. 이렇게 권총을 가지고 감시하는 사회에서 과연 권총이 몇 자루가 필요할까?
 
한 자루다.
 
마지막 감시자는 권총이 필요없고, 내가 밀고를 하면, 내 위의 사람이 권총을 쏠 것이라고 말하면, 사실 그 사람에게는 권총이 없어도 된다. 권총의 권위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그 바로 위의 감시자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올라가다보면, 감시자의 감시자, 그 감시자의 감시자, 그리고 그런 방식의 마지막 감시자,, 그 사람만 총을 가지고 있으면, 이 감시자들이 모두 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그 권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히틀러!
 
독재가 수많은 사람이 권총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일반적인 상상과 달리, '권총 한 자루'라는 질문은, 한 자루의 권총만으로도 파시즘과 지독할 정도의 통제가 올 수 있다는 것이, 그야말로 유럽 민중들이 히틀러 사건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누군가 권총이 있다고 하면, 그 손목아지를 꺾어버려라!
 
이런 저항의 정신이 히틀러 사건 이후 유럽 사회를 움직이는 힘 중의 하나이다. 단 한 자루의 권총만으로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것. 이게 이론적이고 모델상의 파시즘이다.
 
권총 한 자루 모델이 우리에게 돌아왔을까?
 
돌아오는 중인 것 같다.
 
한국에서 권총을 든 사람은 이명박 각하, 딱 한 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정운찬과, 이재오와 기타 등등 내각의 장관들과 국회의장과 대법원장과 한국은행 총재에게 권총을 들이댈 수 있다. 
 
▲ 지난 10월, 총리 임명 이후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첫 주례보고를 이어간 정운찬 총리.   ©청와대

그리고 사적인 자리로 한나라당 대표 등 십여명에게 권총을 들이댈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감시자는 작으면 열 댓명, 많으면 스무명 정도에게만 권총을 들이대면 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권총이 필요없다. 총이 없어도 권총의 권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치는 않다.
 
권총이 있다고 하는 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중간 감시자의 손목아지를 꺾어줄 사람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열정과 증오라는 두 가지 보완 개념이다.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에게 열정은 민족주의 혹은 인종주의로 보완되었다. 독재로 가지 않는 민족주의도 있나? 권총과 결합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중에서 독재나 전쟁으로전쟁으로 가지 않은 사례는 없다. 증오는 유태인의 등장으로 완성되었다.
 
권총, 열정, 증오, 이 세 가지가 있으면, 감시자 모델이 완성된다.
 
한국에서 독재의 열정은 충분하다. 우리에게는 이미 민족주의가 있고, 민족주의가 작동하면 대부분의 우파, 그리고 상당수의 좌파들을 움직일 수 있다.
 
여기에 토건의 열정이 붙는다. 열정도 충분하다.
 
증오는 진행형이다. 박정희가 전라도에 대한 증오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좌파에 대한 증오, 여성에 대한 증오 등이 진행형이다.
 
진중권 사건과 내년 3월까지 클라이막스를 향해서 달려갈 것으로 보이는 학계의 정부 프로젝트 재심사 과정은, 바로 이 권총 모델이 완성되는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사건이 기준점이다. 한 가지는 이미 완성되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몇 년째 하고 있는 북한 생태와 관한 유한킴벌리 프로젝트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아무런 정치적 고려도 없고, 이데올로기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북한의 생태 조건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이고, 발주처도 정부가 아니라 유한 킴벌리라는 민간 기업이다. 이이 프로젝트는 정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정치와도 별 상관이 없이 벌써 수 년째 진행되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중단되었다. 박원순 변호사 사건도 이 유한킴벌리 프로젝트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정부 프로젝트의 기준점은 성공회대학교에서 하고 있는 10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를 보면 된다. 이건 정치적 성격이 아주 없지는 않다. 정부에서 하는 프로젝트라서 그렇다. 이건 계속 가는 프로젝트인데, 이게 갑자기 내년 3월에 중단될까?
 
이건 진보계열의 가장 큰 프로젝트인데,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별 문제가 없는, 어쩌면 지독할 정도로 무난한 프로젝트인데, 이게 일종의 기준점이 된다. 그러나 탈락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히틀러 사건 이후로 유럽 학계가 강조한 것은, 감시자의 감시자로 학문이 자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히틀러 현상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으므로.
 
한국에서 정부 프로젝트와 민간 프로젝트 없이 움직일 수 있는 학자들의 공간이 그렇게 넓지는 않다. 가난한 인문학계는 좀 나을 것 아니냐고 묻지만, 이런 데일수록 더 하다.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 대학원생과 박사과정들 혹은 박사 초년생들이 줄줄이 프로젝트를 받아올 수 있는 교수들 밑에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가난하다고 해서 자유롭다고 하기는 어렵다.
  
학자 한 명은 강직할 수 있지만, 그의 입들도 강직할 수 있기에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
 
이렇게 내부적인 감시자 혹은 감시자의 감시자들이 제거되는 일들이 지난 1년 내내 벌어진 일이고, 이제 이게 클라이막스로 가는 중이다. 
 
▲ 지난 6월 '교수 시국선언' 모습.     ©CBS노컷뉴스

그 클라이막스의 한 부분에, 학교에 소속되지 않아서 그 입을 틀어막기 어려운 진중권이라는 존재가 서 있다. 그는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통해서 교수만큼 발언권을 가지고 있던 마지막 존재이다.
 
내년 3월까지 학자들의 입을 모두 막고 진중권의 입마저 막는다면, 이제 한국에서 감시자의 감시자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진중권을 괴롭히거나 이지메를 가해서, 한국에서 쫓아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내부 감시자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 입이라도 틀어막고 나면 최종 감시자의 권총 한 자루만으로도 히틀러 모델은 완성된다.
 
내년 3월이 되면, 권총이 있다고 하는 감시자의 손목아지를 꺾어주겠다고 말할 사람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그 역할을 학자들에게 부여하였다. 그래서 유럽에서 학자들의 권위가 높은 것이고, 여전히 대중들에 대한 지도자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가 등장하면, 니가 목숨걸고 막아라!
 
한국에서는 그 역할을 87년의 학생과 노동자가 해왔다. 학자가 그 역할을 한 적은... 음, 별로 잘 모르겠다.
  
자, 우리에게 감시자는 돌아왔다. 권총 한 자루도 돌아왔다. 열정과 증오도 돌아오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 권총 한 자루를 막을 감시자는?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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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2/18 [17:2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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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플러 2009/12/24 [11:06] 수정 | 삭제
  • 이거 니 블로그에서 찌끄린 내용 아니냐 자슥아
    어디 예의없이 이런 글을 공론의 장에서 재탕해먹냐?
    대자보는 니가 필요할 때만 대충 때워도 되는 그런 장소냐?
    기본 싸가지는 챙겨먹고 살자
  • 가면 2009/12/23 [22:33] 수정 | 삭제
  •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키워주는 느낌인데...
    상식적으로 지금의 꼴통들이 쓸만한 동료를 칠 하등의 이유가 없는걸로
    봐서는 이력서에 탄압받았던 흔적 조작하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놈 흔적이 증명하고있음.


    이 재수 옴붙은 새끼는 반민족 극우친미주의가 본성인데
    그 가면이 부실해서 지금은 공사중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