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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가을, 서울, 소비의 지옥에서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우리의 몸은 어떻게 훈육되는가
 
서동진   기사입력  2003/10/24 [09:38]

▲보그 6월호     © 보그
“2003년 여름의 시작. 뜨겁게 작열하는 도시와 해변의 태양 아래에서 어떻게 트렌드 세터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패션 애호가들에게 주어진 생존의 키워드는 레트로, 레이디 룩, 스포티즘, 오리엔탈, 소프트 펑크. 물론 최후의 승자는 이 모든 키워드를 멋지게 소화해낸 섹시한 '글래머'!”(<보그>, 2003년 6월호 기사 중에서)

물론 이 어색하고 난삽한 글귀는 번역글이 아니다. 이런 투의 글은 여느 패션잡지를 들춰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기사이다. 위의 글을 시각 이미지와 떼어놓고 보면 매우 기괴하고 우스꽝스런 바로크적인 텍스트가 되어버린다. 그것이 바로크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수사학 자체의 뜽금없는 과잉 탓만은 아니다. 터무니없이 장식적인 그러나 공허하고 상투적인 말투(“뜨겁게 작열하는 도시와 해변의 태양” 운운)와 허영스럽고 유치한 수사적 구문(“최후의 승자는 이 모든 키워드를 멋지게 소화해낸 섹시한 글래머” 운운)은, 적어도 문자로 고립되었을 때, 코미디같은 느낌을 방출한다.

그러나 패션 잡지의 수사학의 악덕은 다른 수사적 효력을 통해 충분히 보충되고 남는다. 그것은 소비 자본주의의 윤리라고 부를 수 있는 “치료적 에토스(therpeutic ethos)”의 작동에 달려있다. 미국의 소비자본주의의 등장과 변천을 분석하면서 역사학자 T. J. 잭슨은 “치료적 에토스”란 개념을 내놓았다. 그것은 소비자본주의의 정신적 풍경을 요약하면서 포드주의적 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훈육된 주체로 만들어 내는지 잘 알려준다. 치료적 에토스란 소비 혹은 쇼핑이야말로 우리가 겪는 불안과 위기를 해소하고, 삶의 조화와 활력, 자기실현의 전망을 안겨줄 수 있는 행위로 자리잡았음을 뜻한다. 소비는 여가이자 쾌락이면서 또한 치료라는 삶의 형식인 것이다. 상품을 더 이상 그것의 편익과 특성으로부터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체현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상징, 가치, 정보, 지식 등에 의해 소비하고 있다는 기호학적 소비자의 모습은 이제는 차라리 상식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노 로고(No Logo)>  
몇 년 전 나오미 클라인의 <노 로고(No Logo)>란 책이 미국과 유럽에서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었다. 지구화 시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 가운데 하나일 그 책에서, 저자는 생산의 물질적 과정을 완전히 삭제한 상품의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을 포스트모던한 버전으로 개정한 바 있었다. 그 책이 주장하는 바를 굳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는 상품물신주의라는 오랜 반자본주의적 상품 비판은 이제 로고 비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않았을까. 나이키와 맥도날드, 갭, 캘빈 클라인 등은 이제 더 이상 상품이 아니라 로고이다. 상품은 유령이 되었으며, 우리는 상품에 대한 실재적 관계를 거의 잃은 채 로고 자체를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고는 상품의 추기경들이 되어 가장 값싼 임금을 지불하고 가장 낮은 세금을 지불하고 가장 값비싸게 팔릴 수 있는 장소를 이동하며 자신의 가치를 실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치료적 에토스라는 포드주의적 대량 소비사회의 심성구조가 다른 그 무엇으로 교체되고 있다는 판단을 굳히지 않을 수 없다. 시장으로 쏟아져 나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상품이 치료적 가치를 통해 자신을 재현했다면, 그 때의 소비자는 여전히 상품과 그것의 표상 사이에 놓인 거리를 의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탈근대 자본주의의 소비자에게 상품은 그 거리를 모두 지워버린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들먹여지는 트렌드 세터(trend setter)나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같은 용어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대중문화의 비판적 분석과 트렌드의 분석이 서로 오락가락하며, 어느 것이 도시의 문화인류학이고 시장조사인지 분간이 상황은 또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손톱을 깎고 소제하는 일이 네일 아트가 되고, 요리가 푸드 스타일링이 되고, 청소가 환경 미화가 되고, 원예사가 플로리스트가 되어 신종직업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제 필요의 충족이 아니라 삶의 질을 겨냥한 소비로의 변화로 보아야 할까.

물론 우리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제 아무리 필요의 만족이 아니라 질적인 가치의 향유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자신이 소비하고 있는 것은 제품이라는 믿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와 경제의 구분”이 소멸되었고, 스타벅스나 캘빈클라인, 베네통은 제조업이 아니라 문화산업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시점에서, 그런 주장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대량생산된 제품들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기호학적 대상이 되어야 했다면, 지금 포스트모던 자본주의는 그런 기호학적 대상으로서의 상품이 아니라 나의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연기와 행위의 장면 속에 동원되는 장치를 요구한다. 따라서 무한한 제품의 더미에서 특별한 상품을 발견하고 선택하는 의미해독자로서의 소비자 역시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올 여름 “생존의 키워드는 레트로, 레이디 룩, 스포티즘, 오리엔탈, 소프트 펑크”라는 위의 잡지 기사의 선언은 더 이상 제품을 언급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것은 스타일이고 트렌드이다. 이제 소비는 제품으로 연결된 세계가 아니라 정서와 감정, 외양, 언어활동, 공간의 운동과 커뮤니케이션 모두를 일관되게 조직하는 것이다. 제품의 카탈로그는 쿨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침서로 대체되었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문화연대에서 발행한 주간문화정책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culture.jinbo.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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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0/24 [09:3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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