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태의 참예수를 찾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내부 개혁에 무력한 개신교 진보, 왜 침묵하나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개신교는 치열한 내부개혁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류상태   기사입력  2009/07/16 [06:31]
평지풍파를 일으키러 오신 예수
 
가난한 농촌 마을에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답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아들을 길러온 중년 부인이 가장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식이라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매일 술에 절어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았답니다.
 
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비척거리며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나가 죽으라”고 호통을 쳤답니다. 소란에 놀라 잠에서 깬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달겨들어 “손자보다 네가 더 나쁘다”며 야단을 쳤지요. 아무리 자식이 밉기로서니 어떻게 나가 죽으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소식을 들은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붙들고 이렇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며느리의 본심을 잘 헤아려 주시지요. 에미 된 입장에서 정말로 아들에게 집을 나가서 죽으라는 뜻으로 말했겠습니까? 그만큼 독하게 마음 먹고 잘못을 고치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요.”
 
말은 오해를 불러오기 쉽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본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해서 오해를 빚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이 뜻을 제대로 드러내더라도 듣는 사람이 제대로 듣지 못해 오해를 빚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의 표면이 아니라 그 본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이 글로 옮겨지면 말과 함께 전달되던 표정이나 어감, 어투가 모두 사라지고 글자만 남기에 오해의 소지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아마 시어머니가 “나가 죽으라”고 말하며 가슴을 쥐어뜯던 며느리의 모습과 음성을 자세히 살펴보았다면 잠결에 소리만 들었을 때와는 달리 그 본심을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웠을 것입니다.
 
성서에 담긴 신의 음성과 예수의 음성도 그렇게 새겨듣고 가려들어야 합니다. 본심을 헤아리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읽으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네 손이 범죄하면 손을 자르고 네 발이 범죄하면 발을 자르라”고 하신 예수의 음성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을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의 의도는 정말로 죄를 짓는 순간 손발을 잘라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죄를 미워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2~3천 년 전의 기록이기에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당시의 배경이나 저자의 의도, 말씀하신 분의 본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본문은 그런 이유로 곧잘 오해를 불러오는 성서 구절의 하나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0장 34~39절)
 
예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2천 년 전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시대 상황이 어떠했는지, 예수가 누구에게, 왜,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였는지를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들으면 그 분의 본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는 당시의 상황도, 말씀하시는 예수의 표정과 어감, 어투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청중이 누구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이처럼 배경이 사라진 채 문자만 덩그라니 남아 본문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읽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차분히 당시 주변 상황과 예수의 마음과 의도를 함께 읽으려 노력한다면 충분히 본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이 기성 유대종교의 테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을 미리 알고 아픈 가슴을 억누르며 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편안했을 가정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평지풍파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마을 사람 모두가 마약의 해악을 모른 채 그 환각을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 나서서 “그 약을 먹어선 안된다”고 말하면 겉으로는 평화롭던 마을에 큰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의 언질은 이런 성격의 것입니다. 종교의 속박으로 인한 거짓평화를 폭로하고 극복하게 하여 바른 삶으로 인도해가는 일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이 교회 역사에 무수히 많았습니다. 교리로 인한 싸움이 예수 이후로 지난 이천 년 동안 끊인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그리스도교가 가는 곳에는 타문화와의 갈등이 계속되고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명절마다 제사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가정이 적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며 길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믿기를 강요하는 무례한 일이 예사로 벌어집니다.
 
그러나 예수의 의도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외면하기에, 오히려 일어나야 할 생산적인 갈등이 묻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종교는 가장 오래된 조직이기에 나태와 안일, 조직의 생리에 갇혀 초기의 생명력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도 예수가 일으킨 집안싸움으로 유대교에 내분이 일어나 탄생된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치열한 내부 개혁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도록 이어진 나태와 안일, 그리고 조직 자체가 갖는 생리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교 내부에 깊이 배인 독선과 배타를 극복하고 새로운 그리스도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 분처럼 극단의 평가를 받는 분도 드문 것 같습니다. 그는 사회 갈등을 부추긴 사람이며 평지풍파를 일으킨 사람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는 마치 이천 년 전 그 분처럼 세상에 칼을 주러 와서 아버지와 아들을 다투게 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갈라서게 한 장본인이었지요. 그는 특권층의 권위주의를 사정없이 내팽개쳤습니다. 충분히 움켜쥐고 활용할 수 있었던 대통령의 권력도 스스로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당연히 지식과 권위를 특권층의 전유물로 생각하며 호사를 누리던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가끔 이천 년 전 그 분을 닮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런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예수를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 분을 닮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분처럼 가난한 이웃을 돕고, 여성인권을 위해 일하며, 환경보호를 위해 헌신하는 예수쟁이들도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처럼 자기 조직을 파헤치고 잘못 세워진 우상을 부수기 위해 집안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치부에 칼날을 들이댄 것처럼 자기 종교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고 동료 목회자들의 위선을 공격하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교회 내에서 잘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권운동이나 평화운동 환경운동 같은 ‘훌륭하고 좋은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기에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혹시나 그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받을 수 있는 재정적인 도움을 차단당할까 두려워 말을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건 예수의 겉모습은 닮았다 할 수 있겠으나 진정 그의 속까지 닮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벗님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성서의 예수도 가난한 자를 끌어안았습니다. 세상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외부활동과 동시에 내부비판을 그치지 않았으며 결국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정치권력을 쥔 로마인들에 의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사회 혼란을 야기한 주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진보는 외부활동을 열심히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환경운동, 평화통일운동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교회 내부의 문제, 특히나 지독한 독선과 배타에 찌든 교리를 비판하고 개혁하는 일에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 이 칼럼은 격월간지 <공동선> 2009년 7+8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9/07/16 [06:31]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