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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의 '조삼모사'식 '이지러진 말'잔치
통합신당은 '지역주의'의 다른 이름, 민주당도 개혁해야
 
편집부   기사입력  2003/10/06 [12:51]

본문은 본지의 독자 sokrates님이 의견을 피력한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에 관련된 풍부한 논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판단되어 추천기사로 올리고자 합니다. 본문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환영하며, 본지는 독자분들의 목소리를 항상 소중하게 여김을 밝힙니다-편집자



말은 사람들 사이의 매개항이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서 서로 “원활한 소통”을 가진다. 그러나 “이지러진 말”은 자신의 본래적 목적(telos)인 “소통”에 반하여 “불화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흔히 생각하듯이 신랄하고, 비판적인 말이 곧바로 “이지러진 말”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원활한 소통과 그것의 회복을 위해서 신랄하고, 비판적인 말이 반드시 요구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지러진 말”이란 말의 수신인인 상대의 존재 자체를 모독하고, 경멸하는 말이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결코 “원활한 소통”을 기대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홈페이지
노무현 대통령(이하 노무현)의 말이 부정적(negativ) 의미에서 연일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수구보수지가 문제시하고 있는 “깽판”이나 “개새끼” 발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깽판”과 “개새끼” 발언은 비록 노무현이 그리 향기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말의 “이지러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이 점차 수신인인 여러 국민들의 존재 자체를 모독하고, 경멸하는 도를 더해가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노무현의 “이지러진 말”의 풍경을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는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던 진대제를 정보통신부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정보통신부장관에게서는 외교통산부장관이나 교육자원부장관에게서와는 달리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며, 업무능력이 중요하다고 진대제를 옹호하였다. 정보통신부와 다른 부서들의 범주를 자의적으로 구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보통신부장관 역시 국가의 중요한 사항에 대해 대통령, 국무총리, 그리고 다른 장관들과 함께 심의하는 국무위원이라는 사실에 무지한 척 했던 것은 분명 노무현의 잘못이었다. 잘못된 인사에 대한 국민들의 정당한 비판에 대해서 잘못을 흔쾌하게 인정하지 않고 눙치는 식의 그의 말은 분명 주권자인 국민들을 경멸하고 모독하는 “이지러진 말”이었다.

노무현은 자신의 장관인사가 현재 지역거주인구의 비율에 따라 비교적 잘 안배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그의 이 발언은 분명 “호남”을 겨냥하고 행한 것이었다. 그의 발언은 호남에게, 거주인구의 비율에 따르면, 그 몫이 충분하게 돌아갔으니 불만을 갖지 말라는 암묵적인 주문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호남의 현재의 거주인구는 한국 전체인구의 약 12%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잘 알려져 있듯이, 호남지역에서 태어났으나 서울, 부산 등 다른 지역에 가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 장관으로 임명되는 연령대의 호남인구는 약 26%정도의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사회에서 장관인사의 적절한 안배를 논의할 때, 기준이 되는 인구수는 현재의 “지역거주인구”가 아니라 “지역출신인구”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외교통신부장관 윤영관은 현재 서울에 살고 있지만 전북출신이기에 “서울의 비율”이 아니라 “호남의 비율”에 통계로 잡히고 있다.

노무현의 발언은 스스로 이중의 기준(장관의 비율에 있어서는 출신지기준, 장관인사의 지역안배의 문제에 있어서는 현재 지역거주인구의 기준)을 사용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기준을 호남에 대해서 인사차별을 극심하게 행한 지난 정권들의 행정부나 집권당의 발표나 그에 동조했던 극우언론들의 기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분명 잘 알고 있을 노무현이 자신의 말을 통해서 “이중기준”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이지러진 말”은 그가 그 동안 지역주의에 맞서 싸워왔다고 생각해서 대선에서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호남민에게 모독감을 가지게 했다. (호남은 인사정책에 있어서 호남출신의 우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남의 지지를 배경으로 했던 과거의 군사정권이나 김영삼정권에서처럼 호남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할 뿐이다.)

노무현은 국무위원과 함께 한 워크숍에서 ‘정치는 조삼모사(조사모삼)이다’라는 발언을 행했다. 조삼모사는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옛날 중국에서 원숭이들에게 먹을 것을 아침에 3개를 주고 저녁에 4개를 주니 불평이 많아서,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했더니 그들이 매우 좋아했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기만당했어도 기뻐하는 어리석음이나, 또는 기만하는 간교함을 의미한다. 노무현은 줄게 더 없으면 국민들에게 기분이라도 좋게 서비스하라는 요지로 이 발언을 행했다. 정치가 조삼모사(조사모삼)이다는 노무현의 발언은 국민의 원숭이 같은 어리석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어리석지도 않지만, 설령 어리석은 상태에 있다 할 지라도, “바른 정치”는 이를 극복하여 “사려가 깊은 국민”으로 성장하도록 여러 조건들을(예를 들면 교육정책이나 문화정책을 통해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민주정권은, 독재정권과는 달리, 민주시민의 역량과 상호의존적이다. 때문에 시민은 건전한 비판과 지지로 민주정권을 지켜야 하고, 민주정권은 시민의 민주역량의 고양을 위한 최적의 정책을 행하여야 한다.

노무현정권은 아침에 4개이고 저녁에 3개이다는 식으로 국민들의 기분을 좋게 할 것이 아니라(실제로 기분 좋아할 국민들이 많지 않겠지만),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모두 7개밖에 줄 수 없다는 정직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정치는 도덕주의자(Moralist)가 생각하듯이 청교도적인 도덕의 모습만을 가질 수 없으며, 정치공학적이거나 실용주의적인 측면도 가진다. 그러나 정치가 분명 “도덕적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해서는 아니 된다. 정치가, 특히 민주적 정치가 가져야 할 “도덕적 내용”은 최소한 정치를 조삼모사(조사모삼) 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노무현은 조삼모사(조사모삼)의 어줍잖은 정치철학을 강의할게 아니라, “조삼합칠”로 국민의 신뢰를 받을 것을 국무위원들에게 요구했어야 했다. 국민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을 때 그에게 기대한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기존의 “조삼모사(조사모삼)의 정치”가 아니라, 국민에게 정직한 “조삼합칠의 정치”였다. 노무현은 “조삼모사(조사모삼)”는 분명 민주시민들을 모독하고 경멸하는 “이지러진 말”이었다.

노무현의 미국에서의 발언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 거기에서 행했던 그의 여러 발언들은 미국에 대한 단순한 “입술봉사"의 차원을 넘어서 "비굴한 아부"이었다.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하겠다 하여 지지했던 많은 국민들에게 노무현의 미국발언은 어떤 굴욕감을 가지게 했다. 때문에 여러 국민들이 그의 발언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여기에서 더욱 문제인 것은 국민들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노무현의 반응이었다. 그는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그럼 미국에 와서 미국을 비난하고 험담하는 발언을 행하란 말이냐’고 반문하고, 자신은 국민들의 비판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아주 대담한 발언을 행했다. 세상의 말에는 오직 ”아부의 말“과 ”비난의 말“만 있다는 식의 그의 ”이분법적인 사고“도 문제지만, 국민들이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제기한 비판에 대해서 두 귀를 막고 있는 그의 모습은 국민들을 모독하고, 경멸하는 처사였다.

노무현이 미국에서 행했던 여러 발언들은 분명 ”이지러진 말“이었다. (그가 높이 들고 있는 ”참여정부“라는 깃발이 참 기이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국민의 비판에 대해서 ”이지러진 말“로 반응할 게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국민의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 정치지도자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말만을 행하는 ”독재자“로 전락하기 쉽다. 라틴어에서 “독재자”의 단어는 “받아쓰게 하다”의 단어와 어원적으로 뿌리를 같이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 행했던 그의 발언 또한 우리에게 현기증을 가지게 했다. 그의 미국에서의 비굴한 언행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한신의 고사”를 가지고 자신의 언행을 변호했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의 초석을 놓았던 한신은 어려운 시절에 불한당의 가랑이를 기어 지나가는, 수치스러운 모습까지 보이면서 자신의 안위를 지켰다. 노무현의 발언으로 그가 미국에서 그렇게 극찬했던 부시(Bush)는 “불한당”의 위치에 서게 되었으며, 많은 국민들의 지지에 의해서 한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그는 몸을 파는 여인에게 생계를 의지했던 낭인 한신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부시에 대해서 “극찬의 발언”과 “불한당시 하는 발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노무현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의 발언은 외교적으로 매우 문제이었다. 자신을 비렁뱅이인 한신에 비유하는 것도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우리 국민들을 지독하게 모독하는 발언이었다. 그의 “한신의 고사”와 연관된 발언은 분명 “이지러진 말”이었다.

그 뒤에 이어진 그의 발언은 이지러진 말들 중에 압권이었다. 그는 정말 ‘대통령을 못해 먹겠다’는 발언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 발언은 그의 간곡한 간청에 의해서 그에게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맡겼던 국민들의 열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대한민국이 무슨 “바나나공화국”도 아니라면, 어떻게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부인과 함께 하는 자리도 아니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러한 발언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그러한 발언은 국민들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발언은 노무현의 “이지러진 말들” 중에서 가장 압권이다.

노무현은 “광주전남지역 언론인”과의 대화의 자리가 끝난 후에 가진 식사의 자리에서 ‘호남이 자신을 지지한 것은 이회창을 싫어해서 그리했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신당문제 때문에 호남의 민심이 노무현에 대해서 비판적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성 발언에 대해서 행해졌다. 후에 노무현은 ‘자신은 호남에 대해서 절대로 차별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호남에서 지역감정에 의해서 계속 국회의원이 되려는 몇 몇 인사가 자신의 발언을 왜곡해서 해석했다’라고 자신의 발언을 완화시켰다. 노무현의 발언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나온 발언이기에, 질문에 주목한다면 노무현 발언의 실제의 모습이 어떠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호남에는 이회창이 싫어서 노무현을 찍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남에서 지역차별주의와 영남의 패권주의에 대해서 아무런 반성을 보여주지 않는 한나라당의 이회창을 지지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동안 지역주의에 맞서 열심히 싸워왔던(또는 그러한 인상을 주었던) 노무현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것과 “동전의 양면”이다.

호남민들이 개인적으로 이회창을 싫어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많은 호남민들은 노무현의 정치적 행적과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책에 동의하여 그를 지지했던 것이다. 지금 호남민심이 노무현에게 비판적인 것은 박상천이나 정균환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민주당을 분당시킨 “통합신당”에 대한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 반대하기 때문이다. 호남민의 다수는 민주당에게 “분당의 모습”이 아니라,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모습에로의 변모”를 원했었다. 아무튼 노무현의 발언은 많은 호남민들을 모독하고, 경멸하는 발언이기에 “이지러진 말”이었다.

노무현은 최근에 ‘지역주의 의해서 가정 희생된 지역은 호남이다. 때문에 희생을 더 이상 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역주의의 극복을 내건 “통합신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요지로 발언했다. 영남의 “지역차별주의”와 “패권주의”에 의해서 가장 희생된 지역이 호남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만약 호남의 민주당에 경도된 지역주의적(?) 투표성향 때문에 희생을 자초했다는 것까지도 함축하고 있다면, 그의 말은 매우 “기만적”이다. 그것을 함축하지 않았다 할 지라도, 그의 발언은 마치 “어떤 협박”처럼 들린다. 노무현은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영남민 다수의 패권주의적이고, 지역차별주의적인 행태를 근본적으로 비판했어야 했다. 그러한 비판이 전제되지 않는 위의 발언은 호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모독감을 가지게 한다. 때문에 그의 이 발언은 “이지러진 말”이 아닐 수 없다. (이점에 대해서는 본문 끝나고 나서 보충한다*)

말은 원활한 소통을 그 목적(telos)으로 한다. “이지러지고, 뒤틀린 말”은 그 목적을 스스로 배반하고 있다. 때문에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이지러진 말”은 반민주적이며, 반인권적이다. 노무현은 우선 자신의 말이 여러 경우에 있어서 “이지러진 말”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자주 생산해내는 “이지러진 말”은 그의 직정적인 기질과도 분명 연관을 가지겠지만, 민주주의 정치와 인권의 이념에 대한 그의 인식의 결여에서 유래하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가 분열적이며, 정합성이 약해 보이는, 정치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이해를 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념에 충실하게 가다듬을 것을 권유한다. 그 이념에 충실할 때에만 그의 말은 “이지러진 모습”을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진실로 요구하는 것은 세련된 어휘나 문장의 말이 아니라, 수신인인 국민을 모독하고, 경멸하지 않는 말이다. (물론 우리의 대표자인 대통령이 세련된 어휘와 문장을 구사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 국민들과 말의 “원활한 소통”에 달려 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이 말하듯이, “통합신당”은 정말 개혁적이고,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나? 노무현이나 “통합신당”에 참여하는 인사들은 “영남의 한나라당에 대한 투표성향”과 “호남의 민주당에 대한 투표성향”을 등치시키는 그릇된 인식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노무현이나 그 인사들은 지금까지 군사독재세력의 정치적 후신이며, 수구적인 정치세력인 한나라당에 대한 영남의 적극적인 지지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는데 있어서는 아주 인색했다. 영남민들 중에는, 호남민의 경우와는 달리, “김대중과 호남에 대한 병리적인 배타심” 때문에 한나라당을 지지한 사람도 꽤 있다.

노무현은 부산과 경남을 우대하는 “인사정책”과 “지역개발정책”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세력인 통합신당의 지지기반을 이미 취임 때부터 만들어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정책이 드러내놓고 “특정지역(호남)”을 차별하지는 않고 있지만, 부산과 경남을 분명 “우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그의 총선을 위한 선거전략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부산, 울산, 경남지역의 언론인과의 대화의 자리에서 노무현은 ‘자신은 경남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하였으나, 그 동안 자신의 러브콜(love call)에 대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응답을 받지 못했다. 다음에는 응답을 해달라’라는 요지의 발언을 행했다. 이러한 발언에서 우리는 부산과 경남을 향한 노무현의 “지역주의에의 아부”를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그의 부산과 경남의 지역주의에의 아부를 또한 통합신당에 참여할 그 지역인사의 면면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상우의 경우를 보자. 신상우는 전두환의 관제야당이었던 민한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그 후 군사독재세력의 정치적 후신인 민자당, 신한국당에 참여했으며, 호남에 대해서 저질스러운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선거를 치렀던 민국당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단지 노무현과 부산상고의 동문관계라는 이유로 그를 지지했었는데, 노무현은 이 인물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또한 부산의 대표선수로 “통합신당”에도 참여시킨다 한다.

한나라당에서 지역차별주의의 극복을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보이지 않았던 이부영으로 대표되는 한나라당 출신 5명의 의원과 김원웅, 그리고 김대중의 전라도정권이 부산경제를 죽인다고 입에 개거품을 물고 “삼성자동차를 위한 데모”에 참여했던, 부산을 개혁적으로 대표한다는 “어떤 변호사”도 “통합신당”에 참여한다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 “통합신당”이 분당의 명분으로 내걸고 있는 “지역주의의 극복”과 “개혁”의 모습에 대해서 유감스럽게도 어떤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통합신당”이 “새로운 지역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노무현이 영남출신이기에 단지 “통합신당”을 지지한다면, 도대체 지역주의 극복이나 개혁과 무슨 상관을 가진단 말인가?

민주당은 추미애와 조순형을 중심으로 당의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분당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박상천, 정균환이나 후보단일화모임에 관여한 인사들은 이제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이선으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절차적 합리성과 정책의 개혁성을 가지고, 그리고 이를 구현한 참신한 인물들을 많이 당에 참여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 모습을 가지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민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노무현이나 “통합신당”에 참여한 민주당인사들 못지 않게, “정치적 죄악”을 저지르는 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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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0/06 [12:5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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