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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조선, 일제 '내선일체'에 광분하다
[책동네]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40년≫, 당시 조선에선 무슨일이
 
김영조   기사입력  2009/05/05 [23:27]
▲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40≫ 책 표지     ©어문학사
일제강점기 막판 1940년 조선은 어떤 모습일까? 아니 당시의 조선 지식인, 조선 일본인, 일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생각을 읽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당시를 짚어볼 수 있는 책이 나와 화제다. “한일비교문화연구센터” 홍선영·박미경·채영님·윤소영이 번역하고, 어문학사가 펴낸 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2007년 이미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39≫를 펴낸 바 있었다.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40≫을 읽으면서 나는 이 잡지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 건설을 제창한 링컨의 유명한 연설을 떠올렸다. 다시 말하면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40≫의 성격을 묻는다면 그야말로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잡지>로 정의 할 수 있지 않을까?

1940년이란 말을 꺼내면 특별한 애국자가 아니더라도 한국인은 누구나 일제강점기를 떠올린다. 특히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간이란 한국인들에게 정지되고 박제된 시간이었다. 따라서 1940년, 조선의 정황을 알게 해주는 잡지 모던일본 조선판 1940년은 호기심 차원을 넘어 한 번쯤 일독하고 싶어지는 잡지이리라. 무슨 일이 있었는가! 

1940년이 주는 이미지 때문일까? 일본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잡지라서일까? <모던일본>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획일적인 <일본 선전> 일 거라는 선입견처럼 책의 첫 페이지는 “미나미 총독은 말한다”라는 대담록으로 시작된다. 이 대담에서 창씨개명을 비롯한 내선일체의 본색을 극명하게 읽을 수 있으며, 이어지는 시오바라 도키사브로의 “조선의 황국 신민화 운동” 등 잡지의 서두를 메운 글들은 그대로 <모던일본>이 관변 잡지임을 느낄 수 있다. 

▲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40≫의 중요한 머릿기사들과 창씨개명을 위한  책 광고  ©어문학사
 
 
특히 조선총독부학무국장인 시오바라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미나미 총독의 통치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로서 당시 벌어지는 조선인의 황국신민화 운동이 극히 자연스런 일이며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곧 그는 “조선 통치의 최고 지도목표는 <나는 일본인>이라는 황국신민의 명예로운 신념을 마음 깊숙이 체득하여 황운(皇運, 천황의 운명)을 보좌하고 황도(皇道, 천황의 도리)를 선양해야 한다.”라고 앞다투어 선전한다. 

일제의 악랄한 수탈과 압제의 역사가 끝나고 해방 64년을 맞이하는 요즘에 흐르는 이상한 궤변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조선이 잘살게 되었다.”라는 말을 흘리는 자들에게 “식민지 정책의 의도된 흑심”을 알리기에 더없이 좋은 잡지가 <모던일본>임을 이 책은 알게 한다.  

반도인(조선인)은 모양도 마음도 피도 살도 모두가 일본인과 일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내선일체의 이념인즉슨, 수 천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민족의 후손들이 어찌 그들의 간교한 <황국신민>에 고개 조아리며 읍할 수 있으랴 싶지만 <모던일본>에는 그런 나약한 조선 지식인들의 모습이 적지 않게 드러나 있다.

잡지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창씨개명, 교육정책, 내선일체의 의미, 조선산업 부흥 등 일본 정부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속셈과 전개 양상을 소상히 다룬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받은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오가며 보고 느낀 점을 적어둔 것들이다.

▲ 조선예술상 심사원 결정 공고, 심사원은 모두 일본인 일색이다.     © 어문학사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71쪽의 “조선예술상 심사원 결정”이라는 기사인데 입만 열면 조선의 수준 높은 문화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조선예술상>. 그러나 심사위원을 보면 기쿠치칸을 포함하여 모두가 일본인이고 조선인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서 이 상을 제정한 의도를 엿보게 한다. 누구를 위한 예술상인가!

일본의 대동아권 장악을 위해 총칼을 들고 앞장서라는 포스터를 그린 조선의 화가들, 이를 뒷받침할 씩씩한 행진곡을 만든 조선의 음악가들, 혈기에 찬 가사를 부르기만 해도 황국신민 군대의 영광을 드러낼 것 같은 가사와 시, 소설을 써댄 문학인들을 뽑아 상을 주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예술상이 아니었을까?

일제의 이러한 일은 허다하지만 <미스조선>만 해도 그렇다. 청초하고 아름답다고 뽑은 <모던일본>주최 황기 2600년의 제2회 <미스조선>은 박온실이었다. 31쪽에 미스조선 1등의 박온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지 조선여인이라기보다는 일본여인의 냄새가 풍긴다. 나만의 느낌일까! 
 
▲ 미스조선 박온실, 일본인들이 뽑은 미스조선 조선여자가 아닌 일본여자 냄새가 난다면 지나칠까?     © 어문학사

그 해답은 320쪽에 가서야 풀렸는데 “미스조선 심사평”이란 코너를 통해서이다. 기쿠치칸, 구메마사오, 야마카와, 이하라 우사부로, 기도시로, 모리이와오 같은 일본인이 <미스일본>이 아니라 <미스조선>을 뽑았다는 자체가 일본냄새를 풍기는 미인을 뽑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심사평 끝에 마지못해 끼워 준 듯한 안석영과 박기채라는 조선인 두 명이 있지만 미스조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조선예술>이나 <미스조선>이나 모두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의 눈높이에 맞는 행사일 뿐! 말끝마다 일본이 말하는 조선의 질 높은 문화,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좋은 자료다. 

또 이 잡지에서 또 다른 조선문화와 예술이야기는 어떨까? 먼저 화보 부분에 보면 “조선고전무용의 정수 한량무”가 보인다. 잡지에는 지도 한성준이란 말이 들어간 해설이 있다. 해설에서 “한량은 화랑의 별칭이다. 화랑이라고 하면 신라시대에 조정에서 당파 싸움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위해 이용당했던 미남자를 말한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보인다.  

▲ 한량무 사진, 어찌 한량무가 조선고전무용의 정수일까?     © 어문학사
 
화성 재인청 대도방 고 이동안 선생의 제자 이승희 선생은 이를 보면서 “아마도 한성준 선생이 관객을 위해 한량무에 허구를 담은 이야기를 넣어 무용극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잡지가 ‘한량무’를 조선무용의 정수라고 표현하고 화랑을 당파 싸움을 누그러뜨리는 데 쓰인 도구라고 한 것은 심각한 왜곡으로 보인다.”라는 지적을 한다.  

또 유자후가 쓴 “조선 고화폐의 연혁”이란 글에는 “신라 부녀자들이 집에 들어앉아 꼼꼼히 방적을 했다면 신라의 역사에 추포(麤布, 거친 베)라는 포화의 역사는 새겨지지 않았을 것이다.”라든지 “고구려는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인접해 신라나 백제보다는 화폐제도도 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라는 등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내용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조선인이 내지인에게 오해받기 쉬운 점”에서 송금선은 조선 부인은 일체 무표정이며, 말이 없다는 등 왜곡된 시선을 유도했다. “미륵돌”에서 한식을 설명하면서 “(정해져 있지 않지만 2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맛잇는 음식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머리 위에 인 아낙네들의 하얀 행렬이 이산 저산을 물들인다.” 등의 왜곡도 있다. 

▲ 기생의 하루 화보(왼쪽) / 경성 일류 기생의 재산 보유 순위, 1939년 호에 이어 조선은 기생의 나라라는 걸 강조한다.     © 어문학사
 
거기에 더하여 “조선 백문백답”에서는 조선의 노래를 수심가, 단가, 시조로 나누면서 “시조는 태평성대를 찬양한 노래”라고 하는 등 엉터리 해설로 일관했다. 

총평하자면 1940년 <모던일본>은 1940년대 일본인과 조선인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다. 특히 1940년 당시 일본 본토에서 식민지 조선을 엿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잡지라는 성격을 알면 어떤 시각으로 이 잡지가 쓰이고 편집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1939년에 이어 조선은 기생을 중심으로 한 미개하고 천한 문화의 나라로 비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또 일본인이라고 해서 일본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이해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조선에 대한 정책을 선전하고 홍보할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모던일본>이야 말로 이러한 정책의 홍보 수단으로 더없이 좋은 매체이었을 것이다. 
 
▲ 경성제국대학, 경성이화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당시 모습     © 어문학사
 
정치성 내용만 담으면 딱딱하기 때문에 양념으로 내지인, 반도인의 수필, 좌담회, 조선문답 같은 것을 싣고 있으나 이를 통해 조선인의 심성과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될 수 있으면 우월한 일본인에 못 미치는 함량 미달의 조선인을 부각시킴으로써 “일본의 식민지는 정당하다.”라는 의도가 깔린 잡지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다만, 이 책은 1940년 당시 일제의 속셈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그리고 훌륭한 책임에도 아쉬운 옥에 티는 존재한다. 가장 큰 흠은 제본이 잘못되어 책을 읽는 도중 수십 쪽의 책장이 떨어져 나온다. 또 어려운 낱말이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138쪽에만도 “귀갑문, 묘탑, 이금 장식, 누조 장식, 사경, 번욕성” 등 전문적이면서 어려운 많은 용어가 설명 없이 들어가 있다. 물론 원문을 쓴 사람의 현학적인 자세가 더 큰 문제이지만 번역을 할 때에도 독자를 배려하는 모습이 아쉽다. 

하지만, 그런 약간의 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1940년 당시 일제가 조선을 어떻게 끌고 갔으며, 어떻게 일본의 충실한 식민지를 만들어 갔는지, 또 조선의 나약한 지식인들이 어떻게 일본에 충성했는지를 알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은 필독서다.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고 독도를 침탈하려 호시탐탐 노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흥분한다. 그러나 그런 흥분이 우리에게 일본 극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런 책을 읽고 일제의흉계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내선일체를 통한 아시아의 맹주를 꿈꾸었던 일제
[대담]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40≫ 번역자 윤소영 

▲ <모던일본 조선판>의 번역자들(왼쪽부터 홍선영, 김희정, 박미경, 윤소영)     © 김영조
 
 
- 지난 1939년 호에 견주면 이 번호는 내선일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자로서 먼저 것과 비교해서 잡지가 달라진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39년 7월에는 국민징용령이 시행되었으며 조선인에 대한 창씨개명, 조선에도 징병령확대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어 1940년 9월 일본은 아시아침략을 본격 개시하였고, 1940년에 기원 2600년 전을 성대하게 거행하면서 국민에 대해 전쟁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며 전시동원체제에 돌입한다. 1940년 8월에 발행된 이 2차 조선특집호도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인다.” 

- 내선일체를 말하는 내용에서 혼란을 줄만 한 것들이 있다. 이 잡지는 어디까지 진실로 봐야 할까? 

“대중잡지란 기본적으로 동시대의 삶과 밀착된 매체라고 본다. 따라서 그 시대의 논리에 제약받으면서 당대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그 순간순간의 유행,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 당시 사람들이 했던 생각들을 전달해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질문한 '진실' 여부의 잣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940년 시공간의 상황에서 조선을 식민지배하는 것이 영속할 것이며, '대일본제국'의 당면과제는 서양과 대결하여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야 하고 그를 위해 내선일체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진실'여부를 논하기는 어렵다.” 

- “조선인이 내지인에게 오해받기 쉬운 점”이란 꼭지를 보면 교묘하게 조선을 헐뜯고 왜곡하는 부분 예를 들면 송금선의 글이 보인다. 어떻게 생각하나? 

“송금선은 일본문화의 관점에서 조선 전통문화를 야만시하지 말 것, 양국의 생활문화가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코너는 조선을 헐뜯고 왜곡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이 당시 식민지인으로 살아가는 조선인의 열등감과 우울을 짙게 읽어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이숙종이 말한 '내지인이 우월감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오해가 생긴다.'라는 것이 이 시기 조선지식인의 내면세계를 엿보게 하는 것 같다.” 

- 이 잡지를 통해서 조선 유명인사들의 친일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까? 

“이광수의 나의 교유록의 원문을 보면 일본의 유명지식인, 정치가, 군인과 교유하면서 그들을 공경하는 어투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가 시대의 분위기상 할 수 없이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라는 상황 속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고자 했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 당시 이들에게 '친일'이 무엇이었는가의 문제는 좀 더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본다. 이극로나 정인섭이 '대일본제국'의 틀 안에서 지방으로서의 '조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점. 송금선, 이숙종의 글 등도 어디까지나 '일본'의 틀 안에 조선을 위치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제도권 지식인'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대부분 지식인과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과 다른 식민지적 상황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독립운동을 강요하는 것은 현대인의 오만이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현실세계와 타협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식민지시대에도 예외 없이 존재했다고 생각될 뿐이다.” 

- 여자대학생들 좌담회가 있었다. 좌담회를 보고 현대 여성으로 당시 여성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한국근대사에서 여성의 성장은 특히 눈부시다.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여학생이었고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일찌감치 남녀평등이 선언된 바 있다. 좌담회에 등장한 여성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자녀고 '신여성'에 속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일반적인 여성상을 그대로 웅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여학생들은 사회활동에 가치를 두는 경향이 강해 보이며 남녀교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부분이 많다.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피해의식도 발견되는데 '연애나 결혼할 생각이 없다.'라는 말이 그런 것을 엿보게 한다. 여성이 전통사회에서의 피해의식에서 남성화를 지향하는 시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달리 현대여성은 여성의 사회활동과 더불어 다시 여성의 여성성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가치관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된다.” 

- 단순 번역보다는 글쓴이의 생각을 꼭지마다 뒷부분에 언급해주었으면 독자들이 보다 일기기 쉽고, 교묘한 일제의 흉계를 아는 데 도움이 되었지 않을까? 

“지적하는 부분은 논문이나 평론 등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길잡이 역할을 함으로써 이 자료의 성격을 방향 짓게 하고싶지는 않다.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연구자나 일반인들에게 해석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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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5/05 [23: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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