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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보다 수준이하인 한국의 대학수준
성추행 교수를 감싸는 침묵의 카르텔은 언제깨지나
 
황진태   기사입력  2003/10/03 [12:27]

비판의 한계에 부딪치며

본 기자는 동국대 사회학과 성추행 ㄱ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칼럼을 지난 6월 26일자 한겨레 [왜냐면]에 실었습니다. 칼럼 제목이 ‘성추행 교수를 감싸는 침묵 카르텔’이었는데. 예상은 했지만 그 칼럼 하나만으로 교수들의 침묵 카르텔을 깨는 것은 역시나 불가능 하더군요. 2학기에도 여전히 그 성추행 교수의 강의가 배정된 걸 보면 말이죠. 그래서 퇴진에 보다 힘을 불어줄 목적으로 한 사회비평지에 동국대 재직 중인 진보적 성향의 교수들에게 그들이 그간 써놓은 저서와 칼럼 등을 토대로 ‘당신의 글은 독자들 보고는 이렇게 하라고 써놓았으면서 왜 성추행 교수에 대해서는 침묵하느냐? 이거 당신이 한 말과 다르지 않냐?’하는 식의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원고지 30매 정도의 분량을 써서 송고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이들 지식인에 대한 비판에서 “명예훼손”의 위험이 있으므로 성추행 교수 퇴진에 성명한 공식적인 문헌을 확인하길 요구하더군요. ‘그런데 3년을 침묵하며 자신들의 입지(교수직)를 만고불변히 지키고 있는 당신들에게 아직 훼손될 명예는 남아 있습니까?’
   
어쨌든 성추행 사건이 다분히 ‘심정적인’ 사안이라 제 글에 분노가 제거 될 수는 없겠지만 탄탄한 근거가 비판의 기본임에 교내 성추행 교수 퇴진을 주장하는 한 교내 단체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자료를 요청한 후의 결과는 가히 절망적이었습니다.

▲지난해 3월 15일 교수성폭력 추방을 위한 대학생들의 시위 장면.     ©교수성폭력근절모임
3년 동안 성추행 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교수들의 성명서는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교내 동대신문에 성추행 교수 퇴진에 관한 칼럼을 기고한 교수도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납득해야하죠? 학교 밖에서는 교수들이 진보와 보수로 편갈라 ‘자웅’을 겨루면서 학교 내의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이들 진보와 보수의 구별은 모호해져 절묘하게 카르텔의 ‘자궁’ 속으로 융합 됩니다. 이로써 진보적인 성향의 교수들에 대한 제 비판은 “명예훼손”에 걸리게 되어 제 원고는 죽게되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나락에서 성추행 교수 퇴진 단체 관계자가 사회학 전공의 타학교 교수가 탄언서를 썼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나마 어둠 속의 촛불이란 생각에 희망을 지폈으나 이 또한 탄언서를 제출한 직후에 그 교수들이 탄언서를 ‘비공식적’으로 처리할 것을 요청하여 결국 사장되었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이렇게 되어 마지막 촛불마저 카르텔의 바람에 위태위태하다 결국 꺼지게 되었습니다.

피해자의 고통에 일부나마 공감하며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하자 하루종일 두통이 머리를 흔들더군요. 다른 사회주제로 비판을 할 때에도 머리가 아플 정도는 아니었는데 성추행 교수 사건에 관해서는 실제로 기자의 몸으로 직접 고통이 다가오니. 성추행 피해자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의 고통에 일부나마 공감이 가고 어줍잖은 필력으로나마 그들의 고통에 진통제가 되길 바랬던 제 바람이 부질없어지니 피해자 여성에게 죄송할 뿐입니다.

같은 남자로서 필자도 십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피해자 여성의 고통에 일부나마 공감하고 있는데 어떻게 성추행 교수는 그 여성의 고통을 이해하기는커녕 더욱 고통을 심화 시킬 수 있을까요? 성추행 사건이 증거가 불충분하여 형사재판이 민사재판보다 피해자에게 불리한데도 3년 여를 질질 끌며 피해자 여성을 성추행의 기억에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하는 성추행 교수의 짓거리는 피해자 여성에게 2차, 3차의 성추행을 범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ㄱ교수에게 인간으로서 함양해야 할 기본적인 도덕의 찌꺼기라도 남아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이런 반문이 그다지 올바르지는 않지만 ㄱ교수에게 묻고 싶군요. ‘당신 딸이 당했다면 어떡하겠는가?’

또한 같은 여자로서도 성추행 교수에 대한 퇴진을 요구하기는커녕 아니 입다물고 가만히나 있으면 욕이나 안 먹지. 오히려 교내 일부 여교수들이 피해자 여성을 엄호하기보다는 `성추행 교수 지킴이`로 나서는 엽기적인 여성의 남근화 된 폭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들 여교수들을 남/여의 구별에서 탈주체화된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부를까요? 저로서는 이 상황에서 벙어리가 되는 군요.    

‘페니스 파시즘’의 거세화는 요원한가?

동국대에서는 현재 1인 시위를 통해서 성추행 교수 퇴진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으며 2학기에 개설되어 있던 성추행 교수 강의는 사회학과 학생들이 강의 수강생들에게 수강취소를 촉구하는 로비(?)를 통해서 결국 폐강되었습니다. 성추행 교수가 연구교수로 활동하더라도  연구교수도 최소한의 강의는 맡아야 함에 볼 때 이제 동국학원에서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ㄱ교수를 팽해야 할 판단의 갈림길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ㄱ교수가 퇴진 되더라도 교내 성추행의 고리가 영원히 끊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2, 제3의 ㄱ교수는 기층에 잠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영원히 기층에 잠재우기 위해서는 교내에서 학생-교수-학교가 주축이 되어 성추행에 대한 제도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교수들의 침묵 카르텔을 깨기 위한 교수 각자의 대대적인 각성을 촉구합니다. 100년 전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터져 모두가 ‘드레퓌스는 간첩이다’는 마녀사냥으로 몰고 갔을 때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마녀와 동참하길 자청했던 ‘에밀 졸라’와 같은 지식인은 한국 대학에는 없습니다. 그저 서양에서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여과 없이 발 빠르게 한국으로 공수하는 ‘기지촌 지식인’들이나 길거리 여기저기 붙어 있는 껌처럼 교수자리를 꿰차고 대학에 찰싹 ‘붙어’있을 뿐이죠. 이들 껌같은 지식인들이 왜 깨어있는 지성인 에밀 졸라의 됨됨이는 다른 서양이론처럼 수입하지 못하는지 한심합니다. 최신 이론이 아닌 100 여년이 지난 한물 간 거 라서 그런가? 근데 그러한 껌과 비슷한 질료로 구성된 교수자리도 결국에 ‘단물 빠진 껌’의 운명처럼 종막에는 종이에 싸여 휴지통으로 팽한다는 사실을 상기했음 좋겠군요./객원기자

* 사족: 기자가 성추행 사안에 대해서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직접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동국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재학 중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점 동국대에서 순수한 동기로 투쟁 중인 재학생들에게 송구스럽지만 비록 사적인 이유에서 출발했더라도 앞으로는 진지한 성찰을 통해서 저뿐만 아니라 다른 필자들과 함께 본지 대자보를 통해서 끊임없이 성추행 사건에 대한 담론의 물줄기가 대학 아니 사회 곳곳에서 성추행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메마르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실천적으로 미약하나마 기자도 1인 시위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결심이 이상적인 ‘이론과 실천’인지는 모르겠으나 교내 교수들의 뜬구름만 잡는 ‘이론과 실천’에 비하면 훨씬 땅에 근접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러한 교수들의 카르텔이나 짜는 '촌스러움'은 대학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지식인의 의식수준을 반영하는 시금석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런 촌스러움과 대조되는 1인 시위, 글쓰기를 통한 담론투쟁은 이들 카르텔 해체와  나아가 극우 헤게모니 진지를 해체하기 위한 유용한 `해체미학`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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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0/03 [12: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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