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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개인의 생사화복에 관여하는가?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자연법칙은 자체에 충실, 기도에 좌우되지 않아
 
류상태   기사입력  2009/04/20 [09:14]
우리 기독교 전통이 믿어온 하느님, 즉 궁극의 신은 개인의 생사화복에 관여하는 존재일까? 우리가 기도하면, yes나 no로 응답하기 전에 과연 하느님이 그 기도를 듣기는 하는 걸까?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나에게 숙제로 남아있었다. 지금도 나는 이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솔직하게 말하고는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하느님이 개인의 생사화복에 관여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잡신이 아닌 우주만물의 궁극자라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폴 틸리히는 신을 ‘궁극적 실재(ultimate-reality)’라고 정의하여 신에 대한 인격적 정의를 넘어섰지만, 나는 신을 궁극적 실재라기보다는 ‘궁극 원리’로 이해하고 싶다. 신을 존재라기보다는 원리나 법칙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인격자로 인식하지 않는 나에게 기독교 전통의 기도는 별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불편하기도 하다. 신과 대화를 하려면 신을 인격화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억지스럽고 거북한 것이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대화하는 건 정서적으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행위에서 내가 억지로 의미를 찾는다면 그 정도일 뿐이다. 

신을 대상화, 인격화하여 기도하는 행위가 인간의 자주성을 빼앗아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신을 대상화, 인격화하여 기도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이 신을 우주의 원리나 법칙으로 이해하면 스스로 순리를 따라 살고자하는 의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신을 인격체로 생각하고 우리의 생사화복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생각하게 되면, 그에게 매달려 부탁을 할 수밖에 없다. 
 
▲ (자료사진)     © CBS노컷뉴스

신을 인격체요 창조주이며 전능자로 파악한 기독교의 전통적 신관이 옳다면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피조물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고, 그에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부탁하는 행위야말로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인식하는 신관이 옳다면 기도라는 행위는 별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하고 나약한 삶을 살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나에게 전통적인 방식의 기도는 당연히 불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기도에 대해 거의 공포 수준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2년 전인 1997년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함께 근무하던 학교의 선생님 한 분이 간암 판정을 받고 불과 서너달 만에 별세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내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신은 개인의 생사회복에 관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그에게 매달리지 말고 냉철한 이성으로 병에 대처해라. 고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판단되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가족, 또한 주변을 위해 남은 생을 잘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하느님께 매달렸고, 교목이었던 나도 그의 간절한 눈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일주일에 한번씩 그를 찾아가 함께 기도하였다. 내가 갖고 있는 신관이 그와는 너무도 달랐지만 그의 기대가 간절했기에 그의 신관에 맞추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자녀 넷을 둔 그가 원하는 기도는 “반드시 건강을 회복시켜 살려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기대에 맞추어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면 거짓확신을 얼굴에 담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죽어가는 그의 얼굴을 석 달 동안 고통스럽게 대면해야 했고 병실을 나설 때마다 한없는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떠난 이후, 차라리 내 소신대로 말해주었다면 그 스스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거나 훨씬 편하게 임종을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당시의 나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단 소속 목사이며 학교 교목이었던 내가 소신을 밝혔을 경우에 따라올 결과는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자연의 법칙은 자체에 충실할 뿐 사람의 기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궁극의 신, 즉 우리의 하느님이 과연 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거나 그것에 관여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러면서도 곤궁에 빠진 사람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한다면, 나는 그 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 표현하는 그대로 신이 ‘사랑의 하느님’이며 ‘전능자’라면, 신은 자신을 애절하게 찾는 모든 사람의 기도에 (적어도 그 기도가 진정이 담긴 기도라면)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 열심히 살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억울하게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없어야 마땅하다. 더구나 경우에 따라 기도 내용을 가려, 어떤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고 다른 사람의 기도는 외면하는 신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기독교 성서에, 이런 문제로 신과 치열하게 씨름한 기사가 적지 않게 나온다. 욥기는 그 대표적인 책이다. 그러나 욥기는 결국 신에게 무력하게 항복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욥기의 결론은 허탈한 웃음을 머금게 만든다. “하느님이 욥을 이전보다 갑절로 축복하셨다”는 것이 그 유치한 결론인데, 재산을 배로 되돌려주었다는 것까지는 이해해주고 싶다. 문제는 죽은 자식들보다 배나 많은 아이를 낳게 해 주었다는데, 그렇다면 죽은 아이의 인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욥기 이외에도 부분적으로 전통 신관에 대들고 항의하는 기록이 성서 여기저기에 나오기는 한다. 아브라함이 소돔성의 멸망을 예언하는 하느님의 천사에게 “선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의하는 장면이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외쳤다는 외마디 비명,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호소 역시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그러나 정직하게 세상을 살펴보면, 사고도, 죽음도, 억울한 일도, 예기치 않은 행운도, 선인이나 악인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는 점에서 공평하다. 힘없는 사람이 힘있는 자에게 대들면 그 종말이 비참해진다는 것도 넓게 보면 자연의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성서 속의 예수는 그 이치에 도전했기에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내가 이 어리석은(?) 레지스탕스를 좋아하고 지금도 여전히 내 인생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이유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불굴의 정신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었고, 그것이 바로 그가 나에게 베푼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법칙은 그 법칙 자체에 충실할 뿐 사람의 기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몇 년 전 동남아시아를 덮친 쓰나미도, 뉴올리언즈를 강타한 허리케인도 그저 자연의 흐름과 법칙에 따른 결과임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왜 하느님이...?”라는 허무한 물음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다. 그냥 과학과 합리에 의해 대처하면 된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떠벌리는 김아무개 목사의 헛소리에 휘둘릴 이유도 없어진다. 

신은 존재라기보다 우주와 자연의 원리이고 법칙이다 

앞서 밝혔듯이, 내가 생각하는 신의 속성은 존재의 궁극이며 우주의 원리다. 동양철학이 말하는 이(理)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종교를 떠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연법칙과 다르지 않다. 신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 자연의 이치나 법칙이라면, 그에게 우리가 바라는 그 무엇을 이루어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내가 전통적인 방식의 기도를 멈춘 건 이런 생각이 확고해진 다음부터였다. 나는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하면 순리를 따라 살고자 노력하며,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물음을 나 스스로에게 자주 묻곤 한다.

나는 내 인생에 아픔이 찾아올 때, 신에게 기도하기 보다는 깨어있는 이성으로 맞서고 싶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다. 또한 나는 매 순간순간 순리(기독교 용어로는 하느님의 뜻)를 따라 살고 싶다. 신을 의인화하여 의탁하기 보다는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사는 것이 나로서는 훨씬 더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벗이여,
그대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지 마시기를...
 
어쩌면 ‘기도’라는,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하며
신앙의 필수요소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이천년 전 원시신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우리를 얽어매고 있지는 않은 지
함께 고민해 보지 않으시려오?
 
신을 살아있는 인격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의 원리와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섭고 두려울 수 있을 것이요.
 
그러나 신을 의인화하여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허무한 의타심을 불러오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서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기꺼이 고독하고 외로운 자립을 선택하는 것이 어떻겠소?

나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이며 살고 싶지는 않다오.

나는
인생에 아픔이 찾아올 때
신에게 기도하기 보다는
깨어있는 이성으로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받아들이며
그의 뜻(순리)을 따라 살고 싶다오.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전제에 저항하며...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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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4/20 [09:1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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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준형 2009/09/19 [23:18] 수정 | 삭제
  • 기독교가 인격신이 없이 가능하기는 합니까? 제 눈으로 보기에는 이것은 류상태씨 버젼의 신관이지, 기독교는 아닌 것 같군요. 제가 관찰한 바로는, 인격신관에 충분히 버릇을 들이면 세상 만사를 인격신의 간섭의 결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 버릇을 충분히 들이느냐, 안들이느냐는 인식론적 편의의 문제고.
  • 김현수 2009/05/03 [21:26] 수정 | 삭제
  • 같은 생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목소리 반갑습니다.
    그러나 이런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면 이단으로 매도되거나
    측은한 눈빛을 받게 되죠. 그러나 목사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니 교회에서 세뇌되어 모순이라 생각했던 문제들이 해결되더군요.
    슬프지만, 역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더군요.
    이제 의문은...
    심판은 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