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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영화 '워낭소리'의 부족한 소통과 공감
[정문순 칼럼] 아버지 세대의 배려 없는 고집도 이해해주어야 하나
 
정문순   기사입력  2009/02/22 [21:11]
▲ <워낭소리>     © <워낭소리> 공식 홈페이지
독립 다큐멘타리 영화 <워낭소리>가 개봉한지 한 달 남짓한 기간에 관객 백만 명을 가뿐히 넘어섰다고 한다. 상업영화가 아니면서 상업영화 부럽지 않은 대중적 성공을 거둔 이 영화의 저력은 탁월한 공감력에 있다. 40년 넘게 부린 늙은 소를 짐승 이상으로 대하는 노부부의 모습은, 이제는 잃어버린 전설로만 남은 옛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 마음 속에 묻어놓고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아름답고 위엄 있는 장면을 끄집어낸다면 아마도 저 영화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젖게 할 정도로 작품의 감수성은 뛰어나다. 
 
다리가 불편해 농삿일을 할 때 밭을 기어다니다시피 하면서도 꼴을 먹는 소를 위해 농약도 치지 않는 할아버지는, 생태적 사고가 단절된 도시인들에게는 존경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소를 질투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존재로 소와 자신을 동격에 놓다가도, 끝내는 소의 죽음 앞에서 자신들보다 먼저 떠난 소를 안타까워하면서 자신과 남편, 늙은 소 세 존재를 하나로 묶는 할머니의 모습에선 삶을 통찰하는 사람한테서만 나올 수 있는 유머와 애잔함이 있다. 
 
명절에 내려와 평상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먹는 도시의 자식들에게 가축은 인간의 입에 들어갈 고기 이상의 존재가 아니며 기껏해야 늙은 부모의 기력만 축나게 하는 것이었지만, 노인들에게 소는 자신의 몸을 갉아먹으면서도 돌봐주어야 할 가족이었다. 카메라에 잡힌 갖은 에피소드들은 노부부에게 소가 얼마나 친하고 말이 통하는 존재인지 알려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일 부리는 소에게 막걸리를 먹이고, 젊은 소가 낳은 암컷 새끼를 ‘계집애’라 부르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경우 동물과의 소통 만점인 생태적 사고는 가까운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기에 가능하다는 점을 영화는 놓치고 있다. 
 
소 때문에 혹독한 고생을 면치 못하는 할머니의 푸념과 지청구가 화면을 뒤덮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태도는, 소에 대한 애정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늙은 소를 대신해 일할 소를 새로 얻은 덕분에 노인 부부의 일은 곱절로 늘어났다. 소가 무섭게 먹어치우는 풀을 마련하고 여물을 끓이느라 지쳐버린 할머니가 사료를 사서 먹이자고 하소연하자, 할아버지 입에서 마지못해 나온 말은 딱 한 마디다. 
 
“사료를 먹이면 소가 살이 쪄서 새끼를 못 낳아. 이걸 알아야 돼.” 말이 거의 없는 할아버지가 영화를 통틀어 구사한 거의 유일한 논리적 진술은, 졸지에 할머니를 소 키우는 법도 모르고 당장의 이익만 생각하는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덩달아 고생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노인에게 중요한 건 늙은 아내의 고생보다 소의 생산력이다. 노인의 소 사랑은 지금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일이지만, 그 권위적인 사고와 화법만큼은 결코 낯설지 않다. 
 
어릴 때 엄마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잦았다. 아버지의 꼬장꼬장하고 독단에 가까운 모습이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임은 어린 눈에도 분명했다. 그때 나는 엄마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신기하게도 엄마는 늘 아버지 편에 서 있었다. 영화 속 할머니 또한 유별난 소 사랑 탓에 노년에도 자신을 혹사시키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쉼 없이 토해냈지만 정작 불만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반평생을 함께 지낸 소의 가치를, 식구나 다름없는 가축에게 쏟는 남편의 정성을, 할머니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동의를 구할 줄 모르는 아버지들의 태도가 정당화되는 것일까.  

주인공 노인은 내 아버지이기도 하고 이충렬 감독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 이기도 하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려고 애썼고 그들에게 사례를 올렸지만 어쩌면 그런 것 역시 아버지의 독불장군식 태도만큼이나 메아리 없는 일방적인 노력에 그칠지 모른다. 직무와 관련해서는 목숨을 걸고 충실했지만, 식구들에게는 소원하게 대한 아버지들이나 이 노인이나 무엇이 다를까. 자신이 지키려는 숭고한 가치관을 가족이라면 응당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고 믿는 태도가 무조건 이해되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소에게 베푼 애정의 반만큼이라도 가족과의 소통에 노력해야 할 사람이야말로 아버지 세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쯤 되면 노인과 동물 사이의 소통은 과연 완벽하게 원활한 것이었는지의문스럽다. 소라고 하여 인간을 위해 평생 논 갈고 짐 끌기 위해 태어났을 리 없다. 어쩌면 사람과 소와의 관계도 일방적인 건 아니었을지. 푸념이나마 마음껏 할 수 있었던 할머니에 비하면 말 못하는 소는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방법도 없었다. 소의 처지를 동정하는 건 동병상련을 느낀 할머니뿐이었다. 소가 숨지기 직전에야 평생 동안 묶인 코뚜레와 멍에에서 풀려나는 장면이 슬펐던 건 주인 부부와의 이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죽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과의 ‘업’(할머니의 표현)에서 놓여난 늙은 동물에 대한 비애감을 이길 수 없었던 탓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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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2/22 [21:1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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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23 [03:05] 수정 | 삭제
  • 아버지들의 배려 없는 고집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핑계없는 무덤없듯 거기에도 까닭이 있겠지요. 삶의 의미 정도 되었을 까요. 사실 저 영화 사이에서 사람들 사이의 소통은 거의 없죠. 소를 팔아라, 말아라 이런 이야기만 있을 뿐.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모두 바람직한 것은 아닐테니까요. 지금 386 세대 아버지들처럼 기러기를 하건 룸싸롱에서 뒹굴거리건, 바람을 피건, 그 나름대로 사연이 있겠죠.
    요즘 소는 20개월 쯤 자라다 스테이크가 되기 위해 큽니다. 사람에게 먹혀 피가 되고 살이 되니 완벽한 소통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