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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참사 불황속, 구원의 빛된 김연아 신드롬
[하재근 칼럼] 김연아 신드롬이 빛날수록 한국사회가 어둡다는 것 반증
 
하재근   기사입력  2009/02/09 [12:31]
김연아의 인기는 단순한 유명선수의 인기 차원이 아니다. 이건 하나의 신드롬이다. 우리 국민들은 김연아에게서 단지 잘 하는 운동선수 이상의 그 무엇을 보고 있다. 그건 무엇일까?

빛이다.

오늘 다시 한번 그것을 확인했다. 어쩌다보니 오늘 지난 일주일치 9시 뉴스를 한꺼번에 보게 됐다. 연쇄살인, 용산참사, 경제불황 이야기가 한 주 내내 연일 이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러려니 하면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     © CBS노컷뉴스
그러다 앵커가 ‘모처럼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하면서 김연아 소식을 전하는데 정신이 번쩍 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우울한 사회 속에서 살아왔었는지가 새삼 느껴졌다. 김연아의 소식은 지난 한 주를 통틀어 유일한 낭보였다.

연쇄살인과 용산참사와 경제불황으로 점철된 뉴스 속에서 오직 김연아만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러니까 국민들이 김연아에게 열광하는 것이다. 그녀는 화면 속에서 빛을 뿜어냈다. 이 어둡고 음울한 한국인의 답답한 마음속으로.

김연아가 연기를 끝마치고 보이는 그 당당한 표정. 이 표정에서 경제불황과 사회적 파탄으로 열패감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은 다시 희망을 본다. 한국인도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웃을 수 있는 민족이었던 것이다.

지난 한 주 뉴스 속에서 김연아 홀로 빛났던 것은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의 축약판이었다. 김연아 신드롬은 대체로 이런 구조 속에서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 최근 몇 년간 겪고 있는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두 번째 얻어맞고 있다. 첫 번째 크게 얻어맞은 것은 1997년 외환위기다. 곧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는 제2의 외환위기를 향해 차츰차츰 파탄의 길로 접어들었다. 모든 지표가 파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는 자살률, 세계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은 출산률, 엄청난 수의 조기유학, 중산층 붕괴, 자영업 붕괴, 노동소득하락, 투자급감, 우울증 증가, 증오범죄(연쇄살인, 묻지마범죄, 문화재방화) 증가 등 한국이라는 공동체는 스트레스 속에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2008년 들어 두 번째 얻어맞았다. 경제위기가 가시화됐다. 그 모든 파탄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을 그나마 지탱하고 있던 버블이 붕괴되면서 최악의 금융불안이 찾아왔다. 한국인의 열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인터넷엔 일본 자본이 한국을 접수할 것이니 일본어나 배우자는 말들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다.

김연아나 박태환은 그런 속에서 우뚝 솟아오른 별이었다. 박태환보다 김연아가 더 화려하다. 그건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고, 김연아가 박태환과는 달리 세계 최고의 자리를 확고히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김연아와 박태환은 신한국인의 표상 -

김연아와 박태환은 진화한 한국인의 표상이다. 그들의 얼굴에선 한의 흔적 따윈 없다. 한없이 밝고 자신감에 넘친다. 굴종 따윈 상상도 못해봤다는 듯한 얼굴이다.

그들은 한국인이 여태까지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던 종목에서 놀라운 성적을 내고 있다. 한국인은 이렇게 새로운 영역에서 막혔던 벽이 무너질 때 열광한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라는 벽을 무너뜨렸을 때, 박세리가 미국 프로골프라는 벽을 무너뜨렸을 때, 한국 축구대표팀이 월드컵 4강이라는 벽을 무너뜨렸을 때, 그리고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라는 벽을 무너뜨렸을 때 열광했던 것처럼 말이다.

김연아가 그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다른 선수들처럼,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다’가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원 톱’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아 혼자서 우뚝 섰다. 한국인이 최근 겪고 있는 열패감을 속 시원히 상쇄시켜 주고 있다.

외모의 덕도 빼놓을 수 없다. 김연아의 당당함은 그 외모에서도 드러나는데, 특히 김연아의 한국인답지 않은 체형은 한국인의 오래된 ‘숏다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다. 숏다리 콤플렉스는 결국 서구 콤플렉스인데 김연아가 서구인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종목으로, 서구인들 본바닥에서 ‘퀸’의 칭호를 받으며 ‘원 톱’이 된 것이다. 그것도 일본까지 제치고서.

지난 한 주 뉴스 속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김연아는 사실 지난 몇 년간 그런 구조 속에서 있어왔다. 이것이 김연아 신드롬의 정체였다. 얼마 전 병원에 갔었는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김연아 경기에 넋을 잃고 빠져드는 모습에서 김연아 신드롬을 실감했었다.

만약 한국이 원래부터 자신감이 넘치고, 먹고 살 것이 풍족하고, 좋은 소식들이 넘쳐나는 나라였다면 일개 종목 세계 1위가 나타났다고 해서 국민적 신드롬이 터지진 않았을 것이다. 김연아의 신드롬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건 그만큼 한국사회가 어둡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열패감 속에서 한국인은 김연아와 박태환이라는 신한국인, 실패를 모르고, 두려움을 모르는 새로운 유전자를 가진 ‘승리의 한국인’에게 열광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60년 만에 가장 진화한 유전자를 표상하는 듯한 김연아. 그가 보여주는 가능성과 승리의 통쾌함. 그 김연아가 살인, 참사, 불황 소식들로 점철된 지난 한 주 속에서 국민을 구원했다.
*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블로그는 http://ooljiana.tistory.com, 저서에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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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2/09 [12:3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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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고 2009/02/10 [12:16] 수정 | 삭제
  • 독서토론회에서 자기들끼리 논술 연습하는 수준인데 사유의 허영과 것멋에 빠져 있기에 그러는 거야.

    노빠의 정체성을 가졌던 그대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중인 연예계 평론(문화평론?)쓰는 영역을 파고 들면 그나마 괜찮을텐데, 선을 넘어 그 정체성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울 수 있는 학벌체제 혁파운동을 취급하기 시작한 후 과속을 하더니 결국 진보담론 일반을 건드리고 나아가 계급좌파 노동운동 영역까지 자신이 나서서 완장차고 까대면 되는 것처럼 착각하며 교만에 빠져있다는 거에요.

    노빠 정체성에서 좌파 진보로의 전향을 환영하는 바이지만 전향이란 노빠 몰락 후 갈 곳 없어서 그저 거쳐 마련하듯 동거하면 되는 게 아니라 존재(계급)의 전환으로 절박해지거나 최소한 재탐구하고 재학습하여 인식에 개안(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되는 거야. 전투는 선수(기간병)들이 하는 것이지 훈련병들이 전장에 출입하는 것은 총알받이일 뿐이에요.

    그러니 풋내나는 개인 수양록(칼럼?)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에 나와 운동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오류에 마저도 둔감한 거에요.
  • 금잔디 2009/02/09 [23:41] 수정 | 삭제
  • 국민들 체감 경기불황은 이미 체화되어있다는 생각입니다. IMF구제금융이후, 중소기업 줄줄이 도산, 노숙자, 카드대란 자살율 1위국은 2005년이 정점이었지요. 이것이 뭘 말하는건지요. 그럼 짧은 시간도 아닌 동안 내내 스포츠 하나씩 보고 스포츠 선수를 보고 빛을 느끼고 우울함을 날려버리고 열광해 왔다는 말이잖습니까? 왜 지금에 와서야 이런 글을 쓰는건지요?

    병원에서, 터미널에서, 휴게실에서 겁나서 어디 스포츠경기 보겠는가?
  • 금잔디 2009/02/09 [23:28] 수정 | 삭제
  • 이왕 일본국민들에게도 한소리 좀 하시죠. 아사다 마오에게 트리플악셀 너무 강요말라고요. 고난도 점핑 위주의 피겨스케이팅에 집착하는 일본 언론과 스포츠관계자들이 결국 개인 마오와 안도미키의 연골 다 닳도록 만들고 고관절염 앓다가 폐기되는 사람만드는거고 국민들은 깊은 생각없이 열광하는거지요.
    유일하게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스포츠 피겨스케이팅인지라 즉 팬인데 아사다 마오를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감상이 제대로 안되죠. 김연아선수 같으면 물론 한창 클 나이에 죽어라 연습만 하고 그것이 본인 의지의 삶일까 의문도 들지만 밝음이 느껴지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은 적어도 개인 스포츠 스타를 바라 보는거지, 스케이팅 연기를 감상하며 응원하고 선망하고 자랑스러운 기쁨도 가지며 시청하고 하는거지 뭐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한 것이라도 있는지요. 전 일본 국민들조차도 언론이라든가 피겨스케이트 관계자 스폰서 그룹들이 꾸미고 만드는데로 다소 휩쓸려 그런 시각으로 아사다 마오를 보는거라 생각합니다. 마오는 분명 몇년 전의 밝은 웃음조차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이번 대회를 통해 말입니다. 본인은 트리플레츠라든가 구사도 매번 실패하고 완전하지 않은 트리플악셀을 앞서 말한 언론이라든가 대대적 광고 삼고 김연아는 안전빵으로 경기한다라고 까내리기까지 하는 편협된 시각이 노골화되기까지 하거든요.
    스포츠계의 구조적 문제점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요? 사용되다 버려지는 듯한 탈락한 선수들 걱정도 되기도 하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조카녀석 중등부 축구선수인데 교실생활은 아예 범접도 못하고 시합지면 매맞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모멸감 주는 욕설에 처벌에.. 감독 코치와 전화상으로 싸움질도 한 사람입니다. 학교 스포츠 시스템 고쳐야 한다고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고 나혼자 고래고함 지른들... 아, 그런데 돌아보니 운동선수 아닌 아이들이라고 지금 온전하게 크고 있던가요? (이 언쟁은 끝이 없을 것이기에 이만 생략)
    하여, 강요반 자신 의지 반 타협하고 운동선수들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김연아 선수같으면 자신의 체력조건과 맞지않는 트리플악셀 같은거 누가 강요하지도 않고 자신이 무리하게 강행하지도 않는다고 하더군요. 스케이팅하는것에 기쁨을 가지며 적어도 즐기기도 하는 듯 합니다. 하여, 경기를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 편안하며 거부감 들지않고 또 아름다움, 신체를 한껏 사용하는 기능 기량을 경이롭게 바라보기도 하는거지요. 또한 한국인이라서 더욱 좋은 것이고요.

    여기에 무슨 대한민국 국민들 신드롬요? 대한민국 국민들 수준을 뭘로 보시기에 이딴 소리를 하는건지 좀ㄴ 궁금하군요.
  • 깊은생각 2009/02/09 [22:59] 수정 | 삭제
  • 꽤 좋은 글 써 오더니 결국 스스로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했다 보입니다.
    돌맹이 하나 거저 구르는 법 없습니다. 그렇다면 김연아가 연전연승 하는
    이유도 거저 일어나지 않습니다. 넓게 틀을 봐야죠. 현 시점에서 김연아
    는 매우 과도합니다. 한국인이 아닌 것입니다.
  • 보자고 2009/02/09 [22:37] 수정 | 삭제
  • 이런 노빠형 친구가 좌파나 진보진영에 도피해 기거하면서 좌충 우돌 나내고 있으니 진보의 우경화가 아니라 진보담론 자체가 난자질 당하고 만다는 거. 자신의 욕망 분출에 노동자나 서민 얘기 좀 끼워 넣어 까대면 진보되고 좌파 되는 걸로 착각하는 거.

    진보나 좌파가 구지 나서지 않아도 김연아나 박태환은 충분히 칭송되고 숭배되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성향의 글이 진보담론이라 제시되면 말야, 한국의 엘리트체육 중심성 문제라든지, 올림픽 금메달 뒤에 숨겨진 또다른 진실이라던지, 아름다운 승부의 의미나 2인자(참가자)의 대우문제라든지, 승자독식구조(학벌없는 사회에서 사무총장을 한다고 했던가? ㅎㅎㅎ개판이군) 문제라든지, 국가주의 스포츠이데올로기 문제라는지, 사회병리적 외모지상주의 문제,,, 이런 입장에서 김연아나 박태환을 취급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논조를 가지면 그런 사람은 그야말로 '까칠한 극좌파'로 몰려 버리게 된다는 거, 진보(좌파)의 스텐스를 어디에 설정해야 하는지, 글을 쓸 주제가 되기전에 그 정도는 스스로 사고 해 봐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