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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편견없이 지켜보는 것만도 큰 진보
보수층은 ‘차이’보다 유사함을 찾는 노력으로 한계극복해야
 
황진태   기사입력  2003/09/08 [02:52]

태초에 남과 여는 하나였다.

▲홍석천 씨    
커밍아웃 연예인 홍석천 씨가 방송 재기를 앞두고 얼마 전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한국 연예계에도 감춰진 동성애자가 많다."고 ‘폭탄발언’을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의 발언이 ‘폭탄’이란 수사를 운운할 정도로 한국사회는 여전히 성담론에서 닫혀있는 사회일까?

사실 도심 곳곳에 게이 바가 생기고, 동성애를 다룬 영화, 만화 등의 대중문화를 손쉽게 접하게 된 요즘, 홍석천 씨의 ‘폭탄발언’의 위력도 이제는 약해져 보인다. 이는 시민사회의 포용성이 그만큼 넓어졌음을 반증한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와 비슷한 시점에서 있었던 한겨레 인터뷰에서 기자가 "한국에도 다른 동성애자 연예인이 있을텐데 왜 혼자만 이렇게 화제가 됐느냐?"는 질문에 홍석천 씨가 "동성애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사회 분위기 때문에 쉽게 드러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점에서 이 나라의 굳건한 가부장제의 착근성(뿌리내림)을 무시하고서는 소수, 장애인, 동성애자에 대한 시민사회의 포용성의 확산에 있어서 다시 한번 그 한계를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보수층이 좋아하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그들 말마따나 전통스런 옛날 이야기의 수원지를 향해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고자 한다. 사실 전통적인 옛날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서양철학의 할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줄거리다. 그러니 한국도 아니고 더군다나 동양도 아닌 서양인에게서 어찌 “전통”을 읽어 낼 수 있겠냐며 따지실 허약한 보수층 어르신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작금의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비주류인 동성애자들의 주류들에 대한 저항이 이미 서양에서는 프랑스의 68혁명 등으로 표출되었다는 점과 한국의 가부장제와 서양의 페니스 파시즘이 그 작동원리에서의 흡사함, 그리고 광복 당시의 해방 공간에서 자주적이고 건강한 보수는 대부분 거세되고, 친미, 종속적인 매우 허약한 보수들이 집권하여 오늘날 한국사회의 주류로 보수층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에서 서양의 할아버지인들 별 무리 없이 우리네 허약하신 보수층은 내가 하는 옛날 이야기를 “전통”적으로 들어주실 걸로 믿는다.

아주아주 멀고 먼 한 옛날, 고대 그리스 시대의 플라톤이란 서양철학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후손들은 ‘멋대로’ 그의 이름을 따서 육체는 배제된 정신적이고, 숭고한 사랑을 일컬어 ‘플라토닉 러브’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탈근대의 시점에서 미학을 다시 읽은 진중권의 ‘앙겔루스 노부스’에서는 플라톤의 `향연`의 독해에서 플라토닉 러브는 플라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플라톤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를 넘어서 육체적인 사랑인 에로스는 물론이고 페도필리아(소년애)마저 포괄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동성애(소년애)가 공공연한 사랑의 취향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작 플라톤 자신은 이름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왜곡된 ‘플라토닉 러브’가 사람들의 인식의 틀로써 박히게 되었을까? 진중권은 이에 대한 원인을 성적억압을 자행한 기독교 문화를 들고 있다. 기독교에서 육체적인 사랑, 에로스는 즉, ‘육욕의 죄’였던 것이다.

▲영화 해피투게더 중 한장면  
그리스 시대에는 육체적, 정신적 사랑이 조화로웠던 반면 기독교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랑관념이 ‘구별’되었는데, 이러한 구별은 피에르 부르디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아이들이 ‘패’를 만들고, 타자인 ‘따’를 만드는 행위를 기원으로 어른이 되어서는 이 사회의 주류가 되기 위해서 기득권을 쟁취, 유지하기 위해서 타집단과 차별화 하기 위한 끊임없는 구별짓기를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구별짓기가 설사 그리스 시대에는 왜 없었겠는가? 문제는 그 시대의 세계관, 가치관을 형성하는 에피스테메(인식구조)가 자본주의인 현재, 차별/구별짓기가 자본주의에 훨씬 적합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나와 너(2인칭)’란 대등한 소통이 아닌 ‘나와 그것(3인칭)’이란 불평등한 소통이 횡행하게 된다. ‘그것’이란, 인격은 사라지고 남은 물질만을 가리킨다. 즉, 동성애자는 하나의 유기체일 뿐이지 인간은 아니다는 말이다. 결국 그(것)들은 주류사회에서 ‘타자(others)’로 못 박히고, 사회 소수로 전락된다.

오직 ‘이성애자’들만이 옳고, 나머지 사랑은 틀렸다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아이도 아닌 어른들에게 들려주면서 그래도 여전히 이성만 용납되고 “동성끼리는 사랑할 수 없어!”하는 ‘아이어른’ 같은 분이 있을 거 같아서 마지막으로 화끈한 옛날이야기 하나를 더 들려주고자 한다. 필자는 주류를 형성하는 보수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랑에 관한 개념을 왜곡시켰음을 앞에서 밝혔다. 하지만 애초에 사랑이란 남과 여로써 갈려있는 게 아니었다. 태초에 남과 여는 하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는가?

일본의 한 젊은 천재작가의 소설에서 플라톤 할아버지의 ‘향연’이란 저서는 다시 언급된다. “인간은 원래 두 성(性)이 한 몸에 결합되어 있었다 하며, 이 양성구유(兩性具有)의 전인(全人)을 가리켜 안드로규노스(Androgynous)라 하였다. 이 안드로규노스가 제우스에 의해 각각 분리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떨어진 반쪽을 그리워하게 되어 연애감정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 中에서)    

한국의 허약한 보수층의 축 중 하나인 기독교는 당연히 다신교의 하나인 제우스의 일화를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러한 안드로규노스란 신화 혹 설화에서 보수층은 물론 무의식적으로 보수층에 동조한 시민사회는 안드로규노스란 존재를 통해서 ‘차이’보다는 ‘유사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고대 조상들의 인식구조를 배워야 한다. 누가 반공주의와 같은 쓰잘 데 없는 인습만을 서양(미국)에서 배우라고 했는가? 이러한 전통을 배워야 비로소 건강한 보수가 되는 것이다. 

상처주지 말고 지켜보기 만이라도

분단 반세기동안 기득권층의 헤게모니 공고화를 위해서 치장된 반공이데올로기에 눌려있었던 타자를 향한 주변담론은 좋으냐/나쁘냐, 맞다/틀리다, 적/아, 하얀색/빨간색으로만 구별되었다. 동성애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며 다른 것보다는 유사함을 찾도록 노력하는 시선에서 ‘장애를 가진 보수층’의 헤게모니 해체와 타자의 해방(타자란 단어 자체가 사라지는 그날까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사함을 찾도록 노력하는 시선”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홍석천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뜻하게 지켜보기만 해 줬으면 해요.” “나와 조금 다른 사람이 있을 때 배척하지 말고, 그저 지켜보면 되잖아요.” “사랑해 달라는 게 아니라, 동정해 달라는 게 아니라, 지켜보기만 했으면 해요.”

그래. 도와주지 못할 망정 더 이상 상처주지 말고 지켜보기 만이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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