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다. 태양의 계절이라고 한다. 태양이 자신을 숨김 없이 온통 다 드러내고 뜨겁게 유혹하는데 나도 가만 있을 수는 없다. 얼마 전에 사놓은 짧은 청치마를 입고 길을 나섰는데, 중년의 두 남자와 맞닥뜨렸다. 그 중 한 사내의 시선이 내 드러난 무릎에 꽂힌다. 지나치면서 그 옆의 남자가 그자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뭐 어때. 보기 좋잖아." 옷을 입을 때 나의 안중에는 한여름의 태양빛만 있었을 뿐 이물질이 끼어들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봉변을 당한 무릎에 쥐가 났는지 한동안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성이 노출 있는 옷을 입을 자유가 있는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저급한 시선의 폭력이나 관음증, 비난이 허용되지 않는다. 옷은 몸을 가리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몸을 노출시키는 것도 옷의 기능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옷에게 내 몸을 덮는 일을 시킬지 드러내는 일을 시킬지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판단 몫이 아닌가 말이다. 옷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것은 침해당할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임에도 이 당연한 권리의 행사를 오지랖 넓게 참견하는 나라가 있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 꽉 막힌 세상은 사람들의 일상 의식마저 폐쇄적으로 만드는가보다.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는 어떤 남성은 여성의 노출 차림이 나쁘다고 잘라 말한다. 여름에는 눈길을 거둘 데가 없다고까지 하는 것이었다. 정작 본인은 체모가 무성한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짧은 반바지 차림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 취향을 말하자면 남자들의 그런 차림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남의 취향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할 수 없는 일이다. 옷차림을 통해 나타내고 싶었던 당사자의 개성을 존중해주고, 그가 뭘 입든 신경을 끊으면 된다. 남의 외양에 개입할 생각이 없다면 시선 처리에 고민할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노출에 관해 남자들의 오해는 크다. 노출이 저속하고 선정적으로만 보이는가? 옷은 몸을 덮는다고 하여 신체를 은폐하는 쪽으로만 기능하지는 않는다. 거꾸로 신체의 특정 부분을 두드러지게 부각하거나 과장하기도 한다. 브래지어는, 그것을 입지 않으면 눈에 크게 띄지 않을 가슴을 실제 이상으로 돋보이거나 왜곡되게 보이게 한다. 선정적인 것을 따지자면 몸에 맞지 않게 돌출한 브래지어만한 것이 없다. 여성의 노출을 불편하게 보는 이들이라면 남성의 일방적인 욕망에만 부합할 뿐 여성 자신의 건강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브래지어 차림에 오히려 민망해야 하고 여성들에게 입지 말라고 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매장에 가서 심이 받쳐져 있지 않은 브래지어를 찾았더니 숲속에서 보물찾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속옷 매장에 걸린 수많은 옷 중에서 여성의 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거의 없다. 여성 속옷은, 겉으로는 여성 몸에 관해 금욕을 표방하면서 실상은 숨어 있는 것을 들추어 보고 싶어하는 남성적 욕망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옷이 돼버렸다. 브래지어를 걸치지 않거나 노출 복장의 여성이 비난받는 이유는 야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다. 그런 차림은 남성들의 자기당착적 욕망을 충족시킬 만큼 선정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코코 샤넬이 치마 길이를 과감하게 무릎에 끌어올려 내놓기 전까지 여성의 몸은 치렁치렁 끌리는 치마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20세기 벽두만 해도 세상의 여자들은 짧은 치마는 고사하고 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지 못했다. 투표권도 없는 시대의 여성들 위상이 그랬다. 당시 바지를 입고 거리에 나서는 서구 여성들은, 무릎이 드러난 치마를 입은 오늘의 한국 여자가 사내한테 희롱을 당하듯 공공연히 모욕당하거나 심지어 경찰에 잡혀가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운신을 힘들게 하는 긴 치마는 종종 치명적인 일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극장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불이 날 경우 몸을 빨리 피하지 못해 화를 당하는 여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바지 못지않게, 짧은 치마가 여성의 몸에 정착하기까지도 굴곡이 많았다. 경찰이 지나가는 여성을 불러 세워 치마 길이를 자로 재던 시절이 있었다. 1930년대 서구의 사진에 남아 있는 풍경이다. 이 장면은 40여년을 지나 지구 건너편 군사정권 치하 나라에서 똑같이 재현되었다. 자를 들고 다니는 경찰은 이제 사라졌지만 여성 몸에 대한 억압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최근에 짧은 치마 차림의 여성을 도둑 촬영한 사내가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정도로 여성 몸의 권리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드러내는 한국 사회라면, 서구 여성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낙태나 브래지어 미착용은 한국 여성들에게 아직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더욱이 그악스런 보수정권의 등장으로 10년 이전의 세상으로 급격히 뒷걸음질 치고 있는 한국 정치에서 여성인권지수 역시 10년 이전으로 되돌려질 것만 같다. 그 때는 배꼽을 드러낸 옷이 등장하기 시작할 때였고, 사회에 던진 충격이 컸던지 토론 프로그램에서 논쟁이 되기까지 했다. 여성의 옷차림이 토론 주제가 되는 희한한 세상 수준으로 회귀할지 모르는 사회에서는, 노출 패션으로 거리를 누비는 것이야말로 표현의 자유와, 여성 몸의 권리를 주장하는 효과적인 징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느냐, 자를 들고 다니는 사회의 시선을 감당해야 하느냐 하는 고민이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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