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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 흉악 범죄 대안이 아니다
[정문순 칼럼] 범죄는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감수성의 부족이 만든 것
 
정문순   기사입력  2008/03/30 [21:21]
여론을 손쉽게 움직이기로는 범죄만한 것이 없다. 특히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잔혹한 범죄는 전 사회를 충격에 빠뜨릴 정도로 공분을 자아낸다. 그러나 물 끓는 여론에 대한 당국의 태도는 미지근하기 이를 데 없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경찰의 부실한 수사가 거론되고, 아동 대상 범죄에 대한 체계적이고 발 빠른 대응 체계가 없다는 원성이 일어나도 약발은 없었다. 돈과 노력이 많이 들뿐더러 대통령 임기 안에 당장 빛이 나지도 않는 일에 관심이 없는 정부의 태도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보게 만든다.

십수 년 전 벨기에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뒤트루 사건’이 있다. 조르주 뒤트루라는 이름은 사전에도 약력이 나와 있을 정도로 악명 높은 아동 성범죄자로서, 8세에서 19세에 이르는 여자 아이 6명을 납치하여 오랫동안 성적 학대를 일삼다 그 중 4명을 살해했던 사람이다. 이 사건은 경찰의 나사 풀린 수사 태도를 볼 때도 안양 초등학생 피살 사건과 닮은 점이 있다.

경찰은 뒤트루를 아동 실종 사건이 아닌 차량 절도 용의자로만 파악하여 그의 집을 수색하고도 납치당해 있던 아이들을 발견하지 못해 피살자 중 당시만 해도 생존해 있던 2명의 목숨을 놓치게 했다는 따가운 비판을 받았다. 수도 브뤼셀에서는 흰 옷을 입은  300,000여명의 시민들이 침묵의 행진을 벌이며 정부에 사법 체계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했다. 전후 최대 규모의 시위라고 했다. 그들의 주장에는 아동 대상 성범죄자에 대한 가석방 제한과, 집행이 중단되었던 사형제 부활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과 벨기에는 아동 피해 범죄에 여론이 들끓는다는 것까지만 닮았다. 당시 벨기에 정부는 시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고, 이후 범죄에 대한 사법적 대응에서 많은 진척을 이루었다는 평가가 보인다. 또 사건 직후는 아니지만 몇 년 뒤 재판 도중 뒤트루가 탈출을 시도했을 때는 사건 당시 당국의 미흡한 대처를 기억하고 있는 시민들의 분노를 새삼 일으켜 총리, 내무장관, 경찰 총수 등이 줄줄이 옷을 벗게 되었다. 이에 반해 안양 사건에서 용의자를 지척에 두고도 천금같은 시간을 날려버린 한국 경찰에서는 청장의 사과조차 나온 바 없다.
 
여린 생명에 대한 잔인한 성범죄와 살해 행위는 사형을 통해서라도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는 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천인공노할 범죄와, 잔인한 범죄를 사형을 동원하여 척결하자는 주장이 모두 인권 감수성의 측면에서 배를 맞대고 있다는 점은 간과된다. 흔히 사람들은 스스로의 위치를 선량하고 무죄한 처지에 두면서 범죄에 분노만 할 뿐 자신은 만인의 공적인 흉악범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흉악범이란 오명을 가진 사람들은 유복한 것과 거리가 먼 환경이나 개인사를 가진 경우가 많다. 해방 이후 역대 사형수 가운데 대학 졸업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통계는 범죄를 개인의 심성이나 성품과 관련짓는 태도가 무리임을 말해준다.

범죄자가 흉악한 심성을 가졌다고 단정 짓기는 쉽지만, 범죄는 악마의 마음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배려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부동산 투기꾼은 심성이 고약해서 땅 불리는 데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없는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는 감수성보다 자연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더 앞선 사람이다. 만인의 지탄을 받는 흉악범이라도 평소 남에게 싫은 소리도 제대로 못한 사람일 수 있고, 아이가 예쁘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이 끔찍한 아동 성폭력범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나쁜 환경과 범죄가 결코 무관하지 않는 한 오염된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만은 때가 묻지 않았거나 흉악범과 다른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형제 찬성론자의 감정적인 태도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흉악범이 사형을 통해 사회에서 영구히 배제된다고 하여 흐린 물이 맑아지지도 않을뿐더러 법의 이름으로 살인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결코 인권 감수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 목숨을 능멸하는 범죄나, 법의 틀에서 살인을 합법화하는 사회나 둘 다 폭력에 둔감하고 인권을 경시하는 점만큼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살인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정도의 무딘 감수성이 흉악 범죄를 낳는 토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둔감한 사람들이 많다. 
 
다른 여론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잇따르는 범죄에 자극 받은 사형제 폐지 반대 목소리에는 귀가 솔깃한 것처럼 보이는 정부의 태도는, 힘들게 이루어놓은 실질적인 사형제 폐지국란 이름을 헛되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부터 사형제 찬성론자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권 감수성을 평가할 만한 부분이 없다. 규제 완화와 감세로 부자에게 혜택을 몰아주기만 하면 분배와 복지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경제정부의 생각은, 가진 자가 지금보다 더 배가 불러지면 없는 자에게 콩고물이 떨어질 것이라는 말과 같을 뿐이니, 서민을 이만저만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다.

땅 투기꾼이 집 없는 이에게 땅을 나눠주는 ‘어리석은’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가진 자에게 자발적인 소득 분배를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자의 호의나 자비심에다가 약자의 생존권을 내맡겨두겠다는 정부의 발상이, 어린 목숨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흉악 범죄보다 얼마나 덜 비인간적인지는 알 수 없다. 약자의 처지에 공감하는 감수성이 설 자리를 빼앗는 사회가 제 손으로 흉악범을 극형에 처한다면 자기모순에 불과할 수 있다. 

유럽은 저개발국가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나 포르노 산업이 한창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아동 인권을 경시하는 세상에 산다면 아무리 흉악한 성범죄자라도 극형만큼은 억울하다고 말할 권리가 있을지 모른다. 벨기에 당국은 시민들의 사형제 요구는 듣지 않았으며, 뒤트루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 적어도 그 나라 정부는 사회구조의 잘못을 한 개인에게 몽땅 뒤집어씌움으로써 자신은 결백한 척하는 위선을 범하진 않았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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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3/30 [21:2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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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2008/04/19 [23:59] 수정 | 삭제
  • 그러면 흉악 범죄를 줄이기 위한 대안도 내놔야지 자신의 하기 좋은 얘기만 하면 무슨 도움이 될까요?....

    누구든지 좋은 소리는 다 할줄 알지만 용기 있는 쓴소리를 하는자들이 필요한 때이고 그 소리를 들을수 있는 귀 있는 자들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