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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한기총과 일본 보수우익의 매트릭스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강자의 이데올로기’라는 매트릭스에 갖힌 그들
 
류상태   기사입력  2007/03/09 [17:03]
안중근은 바보였나

약자는 강자의 무서움을 알지만, 강자는 약자의 서러움을 알기 어렵다. 나는 100 여 년 전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아시아 침탈에 나설 때, 일본의 식자층 중에 “진실로” 서구 제국의 폭력으로부터 아시아를 지켜내야겠다는 불타는 사명감에 젖어 자신의 조국 일본의 희생을 각오하며 생명을 내던진 순교자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받아 쓰러지던 이또오 히로부미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마디는, “바보같으니라구...” 라는 독백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오늘날 일본의 보수우익 정객들 가운데는, 여전히 ‘대동아공영권’ 의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기독교 용어를 빌리자면, 일본이 아시아로 ‘진출’한 것은,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민족적 혈연적 우월감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서구의 침략 야욕에 맞서 아시아를 구해내야 할 ‘메시아적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이 이루려던 숭고한 사명을 독일 따위와 비교해서는 안되며, 비록 그 과정에서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 하더라도 독일처럼 사과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대동아공영권’ 사상을 여전히 흠모하는 일본 보수우익의 논리가 되겠다.

서글픈 현실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진중권 교수와 설전을 벌였던 지만원을 비롯하여 한국의 식자층 가운데, 이런 일본의 논리에 세뇌되어 그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무리들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 뿐 아니라 찬탈을 당했던 일부 피해국가의 식자층에도 일본의 논리가 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강자와 그 패거리들이 누려온 ‘정글의 법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자연 상태에서 강자가 약자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정글의 법칙이다. 그러나 짐승이라도 같은 종을 대상으로 착취하고 죽이는 일은 그리 흔치 않지만, 인간세상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난다.

인간세상에 작동하는 질량 불변의 법칙

‘정글의 법칙’과 함께 인간세상에 작동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법칙이 있다.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배우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다. 물건(질)이 분해되면 분자가 되고, 분자가 나뉘면 원자가 되지만 원자는 더 이상 분해되지 않고 흩어져 다른 물질을 이룬다고 해도 그 전체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은 자연세계 뿐 아니라 인간세상에도 고루 적용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누군가 땀을 흘리지 않고 돈을 벌면 그 땀은 다른 사람이 대신 흘리게 된다. 강남에서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앉아서 돈을 버는 사람이 많아지면, 뛴 집값이나 전세값을 대기 위해 누군가는 피땀을 흘려야 한다. 앉아서 돈을 번 사람이 다 투기꾼은 아니다. 투기할 의사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냥 운이 좋아서 돈을 번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질량 불변의 법칙’은 그런 현실을 피해가지 않는다. 의도가 있건 없건 그 사람들을 ‘풍요와 누림’으로 이끈 그 보이지 않는 손은, 그들을 강자의 자리, 가해자의 자리에 앉히는 대신, 사회적 약자를 피해자로 만들어 그들에게 강자가 흘리지 않고 누린 풍요의 대가, 즉 억울한 ‘피와 땀’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강자가 ‘약육강식’이 아니라 ‘약자와의 공영’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약자의 처지를 헤아리고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혹 강자가 약자의 희생을 담보로 혜택을 누리려는 얄팍한 계산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상은 강자가 차지하는 ‘풍요와 누림’에 비례하여, 그만큼 약자의 피를 빨아내기 때문이다.

‘강자, 가진 자’가 놓치기 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자신은 약자를 괴롭힐 의사가 없는데, 아니, 오히려 약자를 돕기 위해서 하는 일인데, 약자가 괴롭다고 난리를 친다. 강자는 약자의 호소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아도, 자신은 약자를 괴롭힌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 곳곳에서 나타난다.

나는 오늘날 일본사회에서 정말 모범적이고 희생적으로 살아가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아도 일본의 과거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양심적인(?) 일본의 보수우익 인사들의 진정성을 이해한다. 강자요 가해자인 일본이 피해자이며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한국이나 동남아시아의 절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 ‘자신의 입장’ ‘자신의 논리’에 몰두한 나머지 상대편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할 때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 여사도 이런 강자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그와 그의 빼어난 저작 <로마인 이야기>의 열렬한 팬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아쉬움이 바로 이런 점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에 깊이 빠진 그는, 로마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역사학자들을 아쉽게 생각하고 로마와 카이사르를 열심히 변호하지만, 로마제국에 당한 약소국의 입장은 깊이 헤아리지 못한다. 재미있는 현상은, 시오노 여사가 과거의 일본제국은 로마를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얼치기쯤으로 보고 있지만, 만일 그가 ‘제국의 후손’이 아니라 한국이나 약소국의 백성으로 태어났다면, 과연 지금의 시오노적인 눈을 가질 수 있었을까.

‘대동아공영권 사상’을 맹신하는 일본 보수우익들은 앞으로도 피해자들의 아픔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약자는 강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아도 그들의 무서움을 잘 알지만, 강자는 약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는 한, 그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일본 보수우익들이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피해자들의 아픔’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도 그와 같고, 그 패거리가 되어 강자의 ‘풍요와 누림’에 편승했던 피해국가의 일부 ‘얼치기’ 식객들 역시 그 간사함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가 되겠다.

한기총과 일본 보수우익의 매트릭스

이렇게 ‘강자의 삶’에 편승해 ‘풍요와 누림’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받고 살아온 무리들이 있다. 바로 기독교라는 ‘강자의 이데올로기’에 속한 무리들이다. 결코 ‘예수의 종교’라고 할 수 없는 이 강자의 종교를 숭배하는 자들은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는데 매우 둔하다.

아예 종교를 빌미로 사기를 치는 ‘선수들’ 말고 (이런 종교장사꾼들이 매우 많지만), 진실로 종교적 신념으로, “하나님 앞에 일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확신하는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그들은 세상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예수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함께 하늘의 은총을 누리는 ‘대동아 공영권’, 아니 ‘대기독 공영권’을 꿈꾼다.

그들이 세상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 전체와 함께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에 들고 싶은 숭고한 열망이요 사명감 때문이다. 그런데 ‘영적인 통찰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그 마음을 몰라주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것은 ‘세상의 논리’에 빠진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해서 하는 미련한 짓이기에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기도 한다. (슬프게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성서 구절이 이 사람들의 무서운 확신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준다.)

이들은 결국, 어린 심령들에게 이런 숭고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종교교육을 시켜주는데, 고마운 줄 모르고 왜들 그렇게 ‘종교강요’니 뭐니 하며 사학의 자율성을 해치려 하는지 너무나 안타까워 머리를 박박 깎지 않을 수 없었다.

2천 년 전 옛사람들의 인식과 기록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순진한 그들이 “당신들이 똥을 먹고 그 똥을 얼굴에 바르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제발, 나도 당신들과 같이 해야 된다고 강요하지는 말아 달라.”고 외치는 지성인들의 호소를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사람들이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라는 ‘무자비하고 열등한 종교 이데올로기 신봉자들’ 중에 적지 않게 있다. (나는 진정성이 묻어나는 그들을 노골적인 종교장사꾼들과는 구분하고 싶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종교적) 강자였다. 최강대국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그 강자는 국회에도, 정가에도, 경제계에도 무수히 많다. 그들의 세력은 권위와 권력이 무너진 세상에서 가히 ‘절대 권력’이라 할 만하다.

한기총 사람들 가운데도, 또한 보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수많은 한국의 기독교인 가운데도, 도무지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일본의 정치인들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일본 보수우익의 논리에 세뇌된 다수 일본인들의 꽉 막힌 ‘보편적 무지’를 보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인들이, 과거 일본제국보다 훨씬 더 무서운 폭력으로 지구마을을 어지럽혔고, 지금도 여전히 무서운 폭력을 행사하는 괴물이 바로 그네들이 신봉하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한기총과 일본 보수우익’, ‘순진한 기독교인과 순진한 일본인’은 같은 매트릭스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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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3/09 [17: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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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물 2007/05/17 [20:01] 수정 | 삭제
  • 기독교 뿐 아니라 유일신교가 그 성격이 비슷하다
    자기의 신만이 절대자 이며 유일 하다는 교리 자체에 문제가 있고
    독선배타성 이라는 악마성을 유전자로 보유하고 있다

    대부분 기도교국가인 과거의 제국주의 자들은 자기들 종교의 우수성을 식민지배와 셰게경영 및 군림으로 증명하여 더욱 오만해 졌다

    현재도 세계유일 초 강대국인 미국 또한 그러하다
    기독교인들의 전도,복음주의 라는게 이단자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전멸시켜 에쑤의 재림을 준비 한다는 거다

    이 재림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들 이단자의 방해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악마성이 여기서 근원 한는거다
    聖戰 이라는 말 자체가 전쟁을 통하여서라도 이단자를 박멸 한다는 계념인거다

    외부로 부터의 자기신앙의 지킴이 아니고 다른 종교를 공격하는 전쟁이 성전이다

    타 종교와의 평화와 공존을 거부하는 기독교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종교임이 세계가 다극화 다양화 되는 것과 병행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