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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해 '첫사랑'을 사수하나?
'첫사랑 사수궐기대회'라고? 촌스러움과 마초들의 한마당
 
김주영   기사입력  2003/07/03 [12:02]

▲ '첫사랑사수궐기대회' 포스터 ⓒ팝콘필름
첫사랑 하면 풋풋하고도 애틋한 우리의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지난 27일 개봉한 '첫사랑사수궐기대회'에서 이런 풋풋하고 아련한 첫사랑을 기대하였다가는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이 영화는 지극히 남성중심적 영화이며, '첫사랑'이라는 것은 단지 포장에 불과할 뿐이다. 재미의 여부를 떠나, 너무나도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 배제적인 이 영화는 '여성들이여 조선시대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걸까?, 아니면 우리시대의 '코드'라고 외치는 걸까!

가부장적 영화, 여자는 남자 맘먹기 나름?

영화의 주된 줄거리는 자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성에 대해 편집증적인 집착으로 일관하는 남성과 그 남성에게 사회적 성공을 하면 딸을 주겠다는 남성으로 요약된다. 공부를 안하는 문제아 손태일을 공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선생인 주영달은 모의고사점수를 올리면 딸을 주겠다고 한다. 점수를 올리자 '우선 대학부터 가고~~!' 라는 말로 회유한다. 서울대 법학과에 떡하니 붙은 손태일이 "이제 일매는 지꺼지예?"라는 물음에 "그럼, 그럼 니꺼고 말고"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또다시 주영달은 이화여대는 재학시절에는 결혼이 안되니 사법고시에 붙고 나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달랜다. 영화는 시종일관 내꺼니 내놔라, 뭔가 하면 주겠다 식이다. '내딸을 주겠다', '일매는 내꺼다', '사우~~ 장인어른~~', 하는 과정속에서 여성의 존재 자체는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 두명은 한 여성을 놓고 조건을 서로 내세우며 협상을 하는 동안 여자주인공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뿐 어디서도 자신의 의사를 내세우는 법이 없다. 바로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가부장제의 논리가 이 영화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 '일매는 나의것, 일매를 내놔라'를 외치고있는 손태일    ⓒ팝콘필름
이런 가부장적인 코드에 대한 비판은 여성주의 저널 일다(http://www.ildaro.com)에서 비판된바 있다.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쉽게 피상적으로 읽혀질 수 있는 너무도 전형적인 구도를 배경으로 택한 이 영화는 결국 여성의 '순결'이라는 역시 전형적인 가부장적 테마를 축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 <친구>가 고착화시킨 부산의 이미지-조폭, 강한 방언, 항구 등-는 이 영화에서도 고대로 차용되어 손태일은 단지 주영달이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조직폭력배에 가담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보스가 주영달의 제자여서 그 일은 무산되고 말지만, 보스 역의 성지루가 이후 영화에 지속적으로 등장하여 '부산=조폭'이라는 이미지 형성에 일조하게 된다. (일다 기사 '가부장을 사수한다' 中)

그런데 이런 설정은 수없이 반복된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 부산인가? 그것은 아마 우리사회에 알게 모르게 형성되어온 부산 '싸나이'를 오버랩 시키면서 가부장적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미화시키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선택'의 이문열이 유씨부인의 일대기를 통해 그 당시 여인들이 규범화했던 현모양처로서의 삶을 나타내어 현재의 우리에게 그 가치관을 설파했듯이, 가부장적 여성억압의 이데올로기는 영화라는 외피를 입으면서, 혹은 이인화의 의해 '영원한 제국'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딸은 아버지의 소유물로, 여성은 남성말을 따라야 하는 존재로, 조건의 대가로서 여성의 사물화인 것이다.

혼전순결의 의미, 그래도 '내몸은 니몸일 수밖에 없어'.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혼전순결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대학에 들어가서 남자 손 한번 잡지 못하게 하거나, 집앞에서 키스신을 연출하려는 일매에게 물을 퍼붖는 태일이의 행동과 '너만 믿는다' 식의 주영달의 행동은 '결혼하기 전에는 키스도 안된다', '너는 내꺼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접촉도 하지 마라' 식이다. 연애에 있어서의 기본인 서로간의 의사소통은 전혀 배제되어있다. 언제나 뒷전에서 얌전히 앉아 기다리는 여인상이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것이다.

이후 기다림으로 지쳐버린 일매가 자유분방한 연애를 시작하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반발과  여성개인으로서의 의미를 찾아가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하지만 역시나 열렬한 구애를 하는 태일을 차갑게 대하는 일매는 '아빠, 나 다른 사람하고 잤어, 수십번, 태일이가 싫은게 아니라, 내가 태일이에게 돌아갈 수 없는 몸인거야!'라고 말한다. 이것은 나중에 지병이 있어 바람둥이를 선택했다는 그 병든 몸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태일에게 설명하고 빰을 맞는 일매의 모습은, 다시 기존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니 그럴 의도가 없음을)숙명론적인 몸부림으로 만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하다. 우리의 여주인공, 최선을 다했다고 하겠지..)

남자들의 저녁식사, 그들만의 디저트

▲ '내꺼 내놔라', '못준다' 싸우는 두남성, 그리고 그 사이에 끌려다니는 여성   ⓒ팝콘필름
이 영화는 시작부터 성적인 코드를 이용해 시종일관 블랙코메디를 지향한다. 시작부분 강에서 보트를 타고 내려와 확성기로 남녀학생들이 있는 장소에서 손태일(차태현)은 "주일매(손예진)는 내껍니더~~"라고 말한다. 이후 태일은 자신의 중요부위에 털이 난다면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주영달(유동근)선생님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중요부위에 털이 난지 오래다'라면서 바지를 벗어 내린다. 영화는 계속해서 이런 식의 남성의 시각에서 접근한 코믹을 이용해, 시종일관 남성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후 선생과 제자사이의 인사 중 성기를 꽉 잡거나, 손태일을 때린 후 약을 발라주면서 엉덩이를 치거나하는 등의 행동으로 영화에 대한 자연스런 재미보다는 억지웃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영화 내내 성적인 농담과 당사자는 빼놓고 '니꺼니, 내꺼니' 하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던 스토리는 영화 마지막부분에서는 지병으로 인해 죽음을 눈앞에 둔 여자주인공이 남자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끝이 난다. 영화는 친절하게 ending에서도 배신을 잃지 않는다. 이런 비극과 희극의 겹침이 난무하는 영화의 상업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문화연대에서 발행하는 '문화와 사회' (http://culture.jinbo.net/maynews)에서 언급된 바 있다.

지금의 한국영화에서 웃음과 눈물의 배합은 철저히 계산된 흥행 보증수표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도 산업이며, 비즈니스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너도나도 대박의 트렌드만을 좇는 지금의 현실은 결국 제 무덤을 파는 형국밖에 되지 못한다. 대박의 트렌드라는 골리앗에 맞설 '문화지킴이' 다윗의 존재가 그립다. (문화와사회, [문화읽기] [이주영] 대박의 트렌드라는 골리앗 ― <첫사랑 사수 궐기 대회> 中)
 
한국영화에 소재와 형식에 있어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여성이라는 코드에 대한 제대로 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영화는 드물다. 변영주의 '밀애'나 이재용의 '정사'와 같이 여성에게 선택권을 주는 영화는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 한번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든 여성은 부차적인 존재이고, 남자를 '주'로 하여 진행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언제까지 남자들의 '호탕한' '욕심사나운' 웃음 뒤에 감춰진 타자화 된 여성들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런 영화는 소재나 형식에 있어서도 한국영화에 발전에 타블로이드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암적인 존재인 것이다. 차라리 첫사랑사수궐기대회라는 영화가 '첫사랑'으로 포장되어 나오기보다는 그들이 내세우고 싶은 것, 예를 들면 '내 여자 지키기'로 당당하게 나왔다면, 좀더 영화에 대한 배신감이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영화에는 '첫사랑사수궐기대회'라는 제목보다는 혼전순결사수궐기대회가 더 어울리는 제목일 것이다. 더 이상의 촌스러운 블랙코메디는 이제 그만을 외치고 싶다. 이런 마초들에게 새로움을 기대한다면 이것은 너무 성급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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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7/03 [12:0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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