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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를 그린 성화들, 그리고 몇가지 단상
[기자의 눈] 종교계 내부비판은 빛과 소금,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자
 
황진태   기사입력  2006/12/30 [08:44]
성탄절마저 지나고 남은 달력은 망년 혹은 송년회에서의 소주잔들만이 수북하게 쌓인 우울한 연말이다. 기자가 특별히 종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시즌동안 세계 성인 중 한 분인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한 번 쯤 해보는 것은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기독교인이더라도 때마침 청계천을 환하게 비춘 루미나리에의 전구들처럼 피상적인 이벤트에만 몰두하여 이 시기쯤에 곱씹어 볼 가치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작자 미상,『성녀마리아기도서』, 15세기 후반 토리노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방박사의 경배는 기독교 미술에서 흔한 주제 중 하나다. 위 그림은 몇 년 전 읽었던 웬디 수녀님이 펴낸 <웬디 수녀의 그림으로 읽는 성경이야기>(2002, 예담)에서 처음 보았던 성화다. 수많은 동방박사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 이 그림만이 유독 인상적인 것은 동방박사 중에 한 명이 흑인이란 사실이다. 웬디 수녀님은 흑인이 들어간 사실에 대해 "이 부분이 가장 낭만적이다"고 언급하고 있다. 적극 동감하는 바다.

이 그림이 그려진 15세기라면 유럽의 식민지 정복으로 인해서 삼각무역을 통하여 흑인노예를 삼던 시기가 교차되었던 역사의 궤적을 떠올리면 매우 예외적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엔꼬미엔다(encomienda)로 지칭되는 식민경영체제를 통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혹사시키던 백인 기독교도들은 원주민들이 아기 예수탄생을 경배할 주일조차도 노동력 착취를 이유로 이들의 개종을 반대했다. 그러한 역사가 포개어지는 15세기에 이러한 그림은 낭만적일뿐만 아니라 가슴이 울컥해진다. 
   
두 번째 그림도 동방박사를 주제로 한 웬디 수녀님의 그림책에 실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는 박사들이 '정상적인' 백인이다. 웬디 수녀님은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왕들을 모두 백인으로 묘사했다"고 평한다. 기자 또한 유감스러웠다.

일말의 양심이라 불린 목사 라스 카사스의 미덕은 엔꼬미엔다로 인하여 물리적 폭력과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흑인들에 대한 양심적인 고발이었지만 그의 문제의식이 흑인을 백인과 동일하게 보지 못한 인식의 선상은 두 번째 그림에 하인으로 등장한 흑인 밖에 그릴 줄 모르는 화가가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와 동일하다.
 
마지막 그림은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에서 활동한 베노초 고촐 리가 그린 동방박사들의 행렬이다. 앞의 두 그림에서 동방박사들이 대부분 나이가 들어 보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그림을 보라. 가운데 백마를 탄 앳된 젊은이를 부연 설명이 없다면 동방박사로 알아 볼 수 있을까. 그는 바로 르네상스 시기 상인가문에서 후에 왕가로 거듭나는 메디치 가문의 '국부'란 칭호까지 받은 학문, 예술의 후원자이자, 메디치 가문을 명실상부한 피렌체의 제 1인자로 만드는데 기여한 '코시모 데 메디치'가 자신의 손자인 '위대한 로렌초'를 동방박사의 일원으로 그리도록 한 것이다. 코시모 본인은 그림의 왼쪽에 수많은 행렬 중에 한 명으로 그려진 반면 말 위에 늠름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위대한 로렌초를 통해서 메디치가문의 영광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을 암시한 듯하다. 정치경제적 권력이 예술작품을 통해서 투영된 전형적인 예다.

▲ 크리스토포로 데 프레디스 작,『성 요아킴의 일생에 대하여』, 1476, 토리노    

동시대에 동방박사라는 흔한 주제를 통해서 그려진 그림 몇 점을 통해서도 우리는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성인의 탄생은 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포근한 아우라(aura)에 기대어 가족과 함께 축하하는 것이 옳다. 정말이지 이런 축복된 날만큼은 정치, 사회란 단어와 포개는 것은 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를 보면서 정치사회적인 틀을 끌어내려는 것은 고촐리의 그림에서 당대의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하는 것처럼, 백인들로 채워진 동방박사들에 대한 문제인식처럼 현대사회에서 불거진 불화들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문제적 시선이다.

얼마 전 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과제 수행이라면서 기자의 집을 방문해서는 하는 말이 스스로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긍정적이다!"고 못 박아놓고서는 몇 년 전 발생했었던 쓰나미의 원인이 이교도들 때문이란다. 한창 신학을 공부하며 시루의 콩나물처럼 쑥쑥 커야할 이들 학생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사고의 폐쇄성에 비록 지리를 게을리 전공한 기자지만 쓰나미 발생의 지리학적 설명 정도는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가벼운 성경해석에 대한 논쟁에서 이미 지쳐 짜증 반으로 포기했다.

류상태를 비롯한 기독교 내부의 고발은 빛과 소금 같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가장 쿨하다는 종교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불교 종단의 대학에서는 사상, 학문의 자유하나 보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수를 쫓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 베노초 고촐리 작,    <동방박사들의 행렬>    

어디 종교뿐이랴. 한국사회에 널브러진 모순을 도려내고 새살을 돋게 하는데 요청되는 문제적인 시선은 먹물로 색칠된 표면은 상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아기 예수 탄생을 경배하는 동방박사들의 행렬만큼이나 내재된 의미는 성스럽다. 새해에도 소주 한잔 입안에 털어내고 미약하나마 강준만 교수의 오래된 신선한 구호처럼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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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2/30 [08:4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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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냥 2007/01/02 [06:22] 수정 | 삭제
  • 예수가 없었다면 수많은 학살과 전쟁이 없었을것이다. 예수이름으로 자행된 인종말살, 마녀사냥,전쟁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의 뜻을 잘못알고 잘못 자행된 행위라고? 유학으로 인한 우리사회의 잘못은 당연하고 정말 거악인 예수로인한 범죄는 담론화 하는것 자체가 금기시되는게 비정상적이지 않은가? 평화의 종교 기독교? 정말 악마가 있다면 기독교다. 악마교위 태두 예수 이세상의 아이들은 어여쁘지만 태어나지말았어야할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