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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배제된 여성정치를 비판한다
[정문순칼럼] 여성은 역사에서 자유로운가
 
정문순   기사입력  2003/06/21 [12:55]
잇따른 납치·강도 사건으로 세상이 흉흉하다. 최근엔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가공할 범행을 조직적으로 일삼아온 일당이 검거되었다. 범행 동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잘 살아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대답이 나오더란다. 혹시 카드빚에 쪼들리거나 파산을 맞아 막다른 길에 내몰린 자들일까. 아니면, 가진 것 변변찮다는 이유로 천대받거나 불이익을 당해도 어찌 해 볼 수 없던 무력한 인생들인지도 모른다.

범인들을 동정하고 싶은 마음까지야 없지만, 잘 사는 방법을 돈에서 찾은 것만큼은 이들의 죄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법과 원칙을 내팽개쳐서라도 잘 살고 싶었던 자들은 이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특권층이 부를 축적한 방식 역시 정당성의 부족함을 논하자면 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범인들에게 죄값을 치르게 하는 것만큼, 사회의 비뚤어진 가치관과 부당한 기득권층의 행태에도 눈감을 일은 아닌 것 같다.
▲ 여성정치인은 여성이 소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박근혜(좌), 추미애(중), 강금실(우)     © 당사자 홈페이지

사회 정의가 허물어진 사회, 기득권층의 지배력이 물 샐 틈 없이 강고한 사회에서 약자더러 법과 정의를 지키라고 요구한다면 매몰차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성의 정치력이 바닥이고 여성 정치인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현실에서 수구 세력에 속해있는 여성 정치인을 보는 심정도 그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수구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구 여성에게서 기득권을 대변한다는 것보다 정치적 소수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여성이라고 한다.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여성의 정치 세력화가 한시라도 급한 마당에 그나마 있는 싹을 자르는 가혹한 일이라는 주장이 가능한 것은, 정치적 색채가 어떠하든 여성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약자인 여성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박근혜 논쟁 이후 최보은 씨처럼 수구적 여성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거나 여성의 정치적 성장을 위해서라면 극우 정당도 참여의 대상으로 고려할 수 있다고 한 여성들은, 혹독한 비판을 받아왔다. 아니 거센 비판을 받지 않았으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특히 좌파 남성들로부터는 '천박한 여성주의'니, '여성 우월주의'니 하는 공격도 쏟아졌다. 분을 못 참는 듯한 이러한 감정적 언사가 과연 적절한가는 살피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것은 수구와 여성의 결합이 정당한가 여부를 판단하는 것과는 별개이다. 여성들이라면 비판을 해도 이런 정도로 뭇매를 가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을 주목해본다. 그 주장이 아무 생각 없이 막무가내 식으로 나온 것이 아님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비난에는 박근혜 지지와 같은 유의 주장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그런 주장에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 및 정치적 소수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처지에 대한 고민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적어도 남성이 정치적 다수자이고 그에 따른 혜택을 조금이라도 누리고 살아왔다면, 약자로서 여성의 처지에 초점을 맞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성이 또 하나의 계급임을 밝혀낸 것이 페미니즘 이론의 큰 성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성 내부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차이와 다양성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같은 사물을 놓고서도 서로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여성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같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이름이 현실의 모든 여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데는 조심성이 요구된다.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가 몸의 성적 쾌락과 여성 인맥 쌓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이들이 직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계층이 중산층 지식인임을 말해준다. 성적 쾌락 등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거나 그것이 중산층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여성 현실에서 여성들의 처지마다 절실한 욕구와 관심의 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과 인맥 문제는 경제적 여유와 자아의 사회적 성취, 여성의 활발해진 사회 진출, 그리고 그에 따른 정치적 욕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서구 여성주의에는 '신체페미니즘'이라고 하는, 남성에 대비되는 여성의 성차와 타고난 성적 자질의 의미에 주목하는 한 조류가 있다. 이 이론이 관심을 기울이는 여성적 쾌락은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편견을 전복하는 데 공헌한 바 없지는 않으나, 당대 역사와 현실 속의 구체적인 몸인 서구 백인 중산층 여성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서구권 바깥의 여성들, 평생토록 중노동이나 사회적 편견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자부심이나 철학적  성찰은 고사하고 스스로 모멸과 혐오감만 갖기 쉬운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의 경험과는 거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땅에서 간통제 폐지 논의를 비롯하여 성과 관련한 논의에 관한 한 하층 여성의 말은 배제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요즘 들어 부쩍 빈번해진 여성 인맥에 관한 논의도 여성의 정치적 성장이라는 현실, 최소한 그에 관한 욕구를 말할 수 있는 현실과 떼놓고 말할 수 없다. 박근혜 지지론도 여성의 정치적 인맥 축적의 방법론 중 하나로서 나온 것이다. 급증하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정치적 성장 욕구가, 수구세력일 망정 '자신'을 대변하는 데는 그리 지장이 없거나 '자신'의 정치세력화에 조력이 될 수 있는 여성 정치인들의 부상을 원하도록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신'에는 모든 여성이 포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 지식인 여성들이 우선 낙점될 것이다. 인맥을 쌓고 싶다는 꿈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과 지식이라는 물적·문화적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박근혜-장상-이계경으로 이어지는 여성 정치인 논쟁은 90년대 이후 중산층을 중심으로 두드러진 여성의 경제적 성장과 그에 따른 정치적 욕구와 무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신문이 박근혜 논쟁이 있기 이전부터 정당을 초월한 여성 지지를 공언해왔고, 급기야 이계경 사장이 대선 직전 한나라당행을 택한 것하며, <이프> 지가 박근혜 지지 주장에 긍정적인 목소리를 내고 그것을 여성 인맥의 형성과 연관시켜 논의한 것은, 이들 여성 언론이 대변하고 있는 집단을 생각하면 의외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박근혜 논쟁 등은 찬반 논의를 요청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다. 자신이 중산층 여성이라면 수구 여성이라도 키워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할 수 있고, 만약 동의할 수 없다면 비판을 가할 일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만 확인하고 넘어가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진보누리(www.jinbonuri.com)에서 '새벼리'라는 이름을 쓰는 인터넷 논객은 최보은 씨를 비판하면서 '남성혐오주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 감정적 언사라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전혀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과연 박근혜를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이 남성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는 낡은 정치를, 특권층의 전횡을, 온갖 불합리와 차별과 갈등을 청산하는 작업에 목소리를 보탤 수 있을까. 오히려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낡은 질서 안에서 여성에게 이익이 될 것을 찾고 있으니 박근혜 지지론이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관련기사]
최보은, 다시 이계경 전 여성신문 사장의 '선택'을 말한다, (오마이뉴스, 2003. 6. 10)
새벼리,  [오마이 최보은비판]  정치적인, 그러나 천박한 여성주의!!!(진보누리, 2003. 6. 11)

"인맥 문제만 해도 그렇다. 최근 장상 전 총리서리와 인터뷰한"  여성신문은 그가 인사청문회에서 미끄러진 데는 정치권의 인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그러나 흠결 있는 인사를 자신과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총리로도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성 인맥이라면, 그건 하루빨리 이 사회에서 일소되어야 할 전근대적인 연줄 문화, 패거리 문화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힘있는 남자들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배경도, 기댈 데도 변변찮은 여자들에게 하지 말라고 한다면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비판은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따지다가는 언제 여성 일꾼을 키우느냐는 말도 나올 법하다.
그러나 여성을 선거에서 한 사람이라도 당선시키기 위해서라면, 기성의 낡은 질서에 편승함으로써 사회의 윤리 의식을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수구와 여성의 결합을 기꺼이 지지하는 모험이 얼마나 정당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여성은 남성의 지배적인 문화를 비판하는 작업은 일체 그만두고 남성들이 기득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박근혜를, 장상을, 이계경을 지지하고서, 영남패권주의를, 개발독재를, 빈부 격차를, 농촌 파탄을 극복하자고 말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것은 박정희 기념관 추진으로 상징되는, 진작에 유물 창고에 들어갔어야 할 역사의 망령을 청산하는 과업에 여성이 소외되어도 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 서는 일을 기꺼이 포기해도 좋을 만큼 여성 정치인 몇 명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일까.
당장의 여성 권익에 눈을 밝히는 데 찬성하지 않는 시각은, 여성 문제가 사회적 맥락과 관계없이 홀로 작동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 궁극적으로 여성의 이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관점이라면, 여성 정치인 몇 사람에게 여성의 명운을 의탁해도 좋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구 여성 정치인의 성장이, 또는 그들과 결탁한 지식인 여성들이 발언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서민 여성층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도 생각해야 한다. 지식인 여성들은 자신의 말이 모든 여성을 대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여성 집단의 이해 관계에 충실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성의 체제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는, 오히려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찾는 사람들과, 세상이 뒤엎어지지 않는 한 주인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의 처지는 하늘과 땅처럼 멀고도 다르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충실한 정치적 동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련의 여성 정치인 논쟁을 통해 드러난 건, 특정한 여성 단체나 소수의 여성들이 모든 여성을 대표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운동이든 그렇겠지만 여성운동 역시 세분화되고 나누어질 필요가 있다. 자매애라는 혈연주의적 이름으로 차이를 무화하고 모든 여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발상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다가 필요에 따라서 합류하는 것은 분열이 아니다. 박근혜 논쟁 등이 여성의 연대 못지 않게 내부의 차이와 다름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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