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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서술과 상처뿐인 자화상, ‘프랑스적인 삶’
[책동네] 국가주의와 모방만 남은 한국에서 ‘프랑스적인 삶’은 가능할까
 
우석훈   기사입력  2006/08/15 [14:33]
1.

서평은 늘 어렵다. 서평을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책에 대해서라도 신랄하게 비판을 하기는 어렵다. 몇 권의 책에 대해서 불쏘시개로 쓰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것은 코팅지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평을 달아주고 싶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우스꽝스럽더라도 책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형편없는 책에 그래도 꼭 한 번 읽으시라고 달아야한다는 상황이 편하지는 않다. 
 
2.

▲속살 드러낸 프랑스, 그들의 상처뿐인 자화상을 담담한 필체로 써내려간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     © 밝은세상, 2006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이라는 소설은 나에게 스물 한 살부터 스물 아홉살까지의 기억을 그야말로 숨결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결코 프랑스를 사랑하지도 않을 뿐더러 파리의 잘난척 하기를 좋아하는 옛 식민지 시절의 영광을 은근히 기억하고 있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의 이중적 행태를 앞으로도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불안하면서도 시기심 많고, 사람들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현실적인 프랑스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내가 생각하는 방식 그 자체라는 점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시기를 그곳에서 보냈고, 불어로 프랑스책을 읽고, 불어로 시험답안지와 숙제를 쓰고 논문을 만들면서 성인이 되었다.
 
3. 

이 소설은 고급스러운 소설이다. ‘성찰(speculation)’이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분명 스스로에게 고민하고 삶을 되돌아보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지나치게 난해하지 않고, 도저히 형상화되지 않는 그림들을 너무 많이 집어넣으면서 영화의 권위를 빌려와 이미지를 편집하려고 시도하는 요즘의 이상한 소설들에 비하면 고전적이고, 정통적이면서 성찰 위에 서 있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차분한 소설이다. 첫 수음의 기억을 되살려야 하고, 첫 사정의 기억과 스쳐지나가면서 가졌던 온갖 음탕한 생각들과 그 속을 채워나갔던 삶의 한 구석까지를 떠올려야 비로소 책이 재밌어지는 이 책은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소설이다.
 
요즘의 소설은 1주일, 한 달, 심지어는 24시간이라는 시간적 공간 속에 주인공을 집어넣고, 그 안에서 마치 거대한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처럼, 수학공식처럼 포장된 것처럼 그리고 영화처럼 계산된 것처럼, 그리고 마치 저자가 “나는 참신해”라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는 것처럼 그야말로 ‘젊은 오빠’ 혹은 ‘어려보이는 누나’라는 말을 백 번은 하고 싶은 것처럼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이 상업적 코드에 맞추어 조작해낸 시대의 거짓에 다름 아닌 경우가 많다.
 
이런 소설들에 대해서는 ‘짱인’ 장정일이 한 평가가 대체적으로 옳다. 그래도 “자신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하는 여인”이 백만권을 팔아대는데, 여기에 대해서 저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담큰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소박한 것은 소설을 읽는 데 대한 거부같이 치졸하면서도 별 의미없는 자학적 행위 밖에는 없다. 이어령의 거들먹거리는 ‘디지로그’가 팔려나가는데, 역시 거들먹거리며 별 의미 없는 음소들로 가득 찬 김지하의 책은 왜 전혀 팔리지 않지? 이런 질문에는 전혀 답하고 싶지가 않아진다.
 
4.

프랑스의 철학자나 지식인이 높은 반열에 올랐을까? 난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마치 새 길을 열었다는 것처럼 거드름피우는 것 외에는 한 적이 없는 쥴리앙 크리스테바의 글이 퇴행적인 것처럼 평생을 자학과 잘난척 사이를 외줄타듯이 오간 들레쥬의 글이 높은 반열에 올라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기꾼에 불과한 라깡을 읽지 않으면 정신의 깊은 세계에 대해서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우리나라의 지적 사기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프랑스 사회에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지도 않고, 마치 소설속 주인공이 나의 50에 결국 직업상담소 직원 앞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적이 있다고 얘기했을 때, 대답했던, “그런 건 잊어주세요.” 우리나라에서 과대포장된 프랑스 철학자들은 프랑스 내에서는 그런 위치에 속해있고, 그들을 알지 못하면 새로운 생각을 해낼 수 없다는 그렇게 거드름 피울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렇지만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은 까다로우면서도 변덕스러운 프랑스의 독자들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우디 알렌의 영화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봐주는 이 독자들은 축구와 선거에 열광하면서도 또한 까다로와 어지간한 질문으로는 그들의 시선을 5분 이상 잡아두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면서도 속내가 알기 어렵다. 출판사 갈리마르에 월요일마다 도착하는 트럭 몇 대분의 원고를 뚫고 프랑스에서 실제로 뭔가를 출간한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작가와 사상가들도 다 이 벽을 뚫으면서 뭔가를 출간하게 되는데, 심통맞으면서도 잘 교육받은 프랑스 에디터들은 그들의 독자들이 얼마나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출간물들은 고급스럽다.
 
<누벨 옵제바퇴르>에 15년이나 객원기자를 지내면서 어렵게 살았던 장폴 뒤부아가 이 출간의 벽을 뚫기 위해서 했던 고민의 깊이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고, 한국 출판시장 덕분에 자신이 글만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베르베르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게 된다.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기는 한데, 움베르트 에코와 베르베르의 유머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장폴 뒤부아가 베르베르 보다는 나에게 훨씬 다가오고, 그야말로 그가 어떻게 살아오고 무엇을 생각할지가 숨결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의 배신, 딸의 급격한 실어증, 그리고 갑작스러운 성공과 함께 찾아온 정원사 시절로의 복귀와 평생 처음인 것처럼 나이 50에 가지게 된 새로운 직업과 같은 것들은 소도구일 뿐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라는 사회가 얼마나 중앙적이며 동시에 거대한 구조주의 같은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뚤르즈의 ‘촌놈’에 불과한 몰락한 귀족의 자식이 결코 미테랑을 사랑하지 않으며 평생을 좌파로 살아가면서 쌓아올린 누각들이 얼마나 자폐적이고, 혼돈스러운 것인가를 보여주면서, 장폴 뒤부아는 교묘하게 이것들을 대통령의 ‘시대’로 설명하는 구조주의자들의 핑계를 보여준다.
 
주인공인 지스카르 데스탱 시절에 끊임없이 방황하였고, 미테랑 시절에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진작가가 되었고 자신의 집을 가지게 되었고, 시락이 대통령이 되면서 다시 몰락하게 되었고 부인은 죽고, 딸은 실어증에 걸리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교묘함이란! 그래서 더욱 무섭다. 무의식 속에서라도 도망가고 싶은 길을 작가는 아예 막아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5.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아마도 몰리에르 이후의 최고의 히트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프랑스의 특징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약간의 예의갖추기 정도 이상 판매되기는 않을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라는 배경이 되는 사회의 차이점 때문이 아니라 2006년의 평균적 한국사람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잔인한 서술방식과 차가운 독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주의와 모방으로 만들어지는 한국적 군상에 이 책은 잘 맞지 않을 것 같다.
 
어쩔거냐! 그것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특징인데, 그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68년의 사회학 학도이며 락 그룹의 키보드 연주자가 나무에 대한 사진작가가 되었다가 다시 정원사가 되는 50년 동안의 역사를 반추하지 못하는 것은 서정과 정서의 차이일 수도 있고, 기질의 차이일 수도 있고, 구조의 차이일 수도 있다.
 
너무 예민하면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 반대로 너무 둔감하면 프랑스 사회에서는 살아남기가 어렵다. “프랑스적인 삶”은 병적으로 예민하고 민감해서 수다 보다는 연애를, 그리고 사교보다는 고독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 사람들은 우디 알랜의 “맨하탄”에 나오는 연애중독자들과는 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이 주는 무게들을 짊어지고 살아간,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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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8/15 [14:3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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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받 2006/08/17 [13:08] 수정 | 삭제
  • 라깡이 사기꾼에 불과하고, 들뢰즈가 잘난척이라...
    하여튼 이글을 쓰신분이 사기꾼이던지 아님 위의 두사람이 사기꾼이던지 둘중 하나로겠군요.
    아님...아마도 이게 답이겠지만...이글 필자는 평소에도 원래 (가끔^^) 저렇게 쓰는 분이시던지...^^
  • 게늠 2006/08/15 [18:58] 수정 | 삭제
  • 하긴 병이긴 병이다. 이론 도구들이 유행처럼 퍼지는 한편, 그것이 비판당할시엔 또 우~ 하며 비판해댄다. 내용은 없다. 우석훈씨가 잠깐 거론한 라깡이나 들뢰즈, 크리스테바등은 분명 한국이란 시장에서 그렇게 팔렸고, 그렇게 배척당했다. 그 중간은 없는듯 하다. 하여 나는 내용없이 마구 저들을 까대는 우석훈씨의 양식에 자신이 비판하는 한국적 상황을 보는듯 한 것이다.

    자신은 쿨하다는 듯이 그들을 비난해대는 꼬라지는, 일견 탁월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여타 비난자들과 다를게 없어보인다. 포스트모던의 신봉자들을 그들 철학 자체의 문제로 귀속시키는 짓거리는 아무리 좋게봐도 삼류수준의 논리 전개일뿐.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지. '나에게 들뢰즈의 문제의식은 너무나 명료해 보인다' 비록 후기에 찢어졌지만..

    왜 어째서 들뢰즈나 라깡같은 성실한 학자들에게 사기꾼이란 단어가 붙었는지.. 고작 소칼이나 들이대면서 걔네들 철학은 모두 가짜야라고 말씀하실 생각인가? 그런 수준이라면 밞아줄 용의는 얼마든지..

    들뢰즈 만큼 철학사에 매진한, 한마디로 기본기가 튼튼한 학자는 드물다는 사실, 라캉만큼 사유의 깊이를 지닌 학자도 드물다는게 사실.. 이런 사실을 알고있는 나로선, 그들 이론에 대한 단 한마디의 일언 반구도 없이 걔네들은 모두 사기꾼이야라는 막말에 기가막히는 것이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