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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개혁의 주체'아닌 개혁의 대상일 뿐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진정한 개혁은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류상태   기사입력  2006/05/01 [18:29]
현재 지구마을을 갈등상태로 몰아가는 세계적 불량배 둘을 들라고 하면, 나는 미국과 기독교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활'을 목표로 레이건 이후 줄곧 공화당 강경파를 밀어온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은 결국 부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성공했다. 부시는 기독교 우월주의를 넘어 기독교 절대주의로 무장한 네오콘의 철학을 그대로 따르며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신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

조지 부시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이후, 세계는 하루도 바람잘날 없는 불안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또한 미국이라는 신제국의 정신적 기초가 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인류 사회에 저지른 죄악상은 충분히 증명이 되고도 남았지만 골수 기독교인들은 좀처럼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려 든다.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라 하겠다.

웬만한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미국과 기독교라는 두 불량배가 매우 닮았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명콤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저지르는 폭력성에는 치를 떠는 '깨어있는 진보 기독인'조차도 그 동안 줄기차게 저질러왔고 지금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기독교의 폭력성'에는 의외로 둔감하다.

지난 4월 24일부터 2박 3일간 열린 <기독교사회포럼>은 모처럼 진보진영과 복음주의권 개혁 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인 뜻깊은 자리였다. 진정으로 교회를 염려하며 사회를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모습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기독교인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한 자리이기도 했다.

포럼에 참석한 대부분의 '개혁적 활동가'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몸담은 자신들을 '개혁의 주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개혁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이 스스로를 '개혁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점이 기독교 개혁 운동의 한계이며, 그들이 스스로를 '개혁의 대상'으로 먼저 인식하지 않는 한, "개혁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문제는, 깨어있는 진보 기독교인이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 즉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갖는 폭력성과 정복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와 맞서 싸우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에 포위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몇가지 들어 보자.

개혁을 추구하는 기독교 단체들 중에는, 대형교회, 혹은 탄탄한 재정을 가진 중견교회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단체가 적지 않다. 보수의 길을 택하지 않고는 교인이 모이지 않는 한국 교계의 현실에서 이런 식의 공생은 피하기 어려운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진보 단체가 그런 '공생 관계'를 선택하는 한, 개혁의 칼날은 무디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최근 KNCC의 무력한 모습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또한 기독교개혁단체들은 대부분 평신도들보다 목회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신학적 전문성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종교단체로서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적 정서에서, 신학교 선후배로 끈끈하게 맺어진 목회자들 간의 인간관계는, 교회 비리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고발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결과로 나타난다.

기독교 개혁 운동이 갖는 한계의 보다 중요한 원인은,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은채 '바깥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데 있다. 미국이 휘두르는 폭력성에 대해 고발하고 대처하는 일은 신제국주의의 팽창을 막고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또한 인권 및 환경 문제, 토지정의, 여성과 장애우 등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들을 위해 교회가 나서는 것 또한 기독교 개혁 단체가 감당해야 할 대사회적 몫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기독교 자체의 문제는 외면한채 '바깥의 문제'에 매달리는 기독교개혁단체나 진보기독교인들을 향해 우리 사회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점에 대해 기독교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똥 묻은 개가 자기 똥은 떨지 않고 겨 묻은 개만 나무란다"고 비웃는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새겨듣지 않는 한 기독교 개혁 운동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개혁하겠다는 사람들의 정당성이 도전받는 상태에서 개혁은 없다. 기독교개혁운동 단체는 자신이 가해자 위치에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일본의 정치인이 과거의 역사에 대해 "그건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일이지 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이 하루 빨리 망하게 해 달라"고 평생에 걸쳐 기도했다. 자신이 일본인이기에 어쩔 수 없는 가해자요 죄인임을 인식한 그는, 군국주의 일본이 망하지 않고는 일본의 미래가 없다는 점을 꿰뚫어본 지식인이며 양심적인 선각자였다.

기독교 자체가 '개혁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문제 해결에 나선 목사나 단체도 있기는 하다. 김동호 목사나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제도와 윤리개혁 운동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의 개혁은 껍데기 개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갖는 근본 문제는 윤리나 제도 이전에, 교리 자체가 갖고 있는 폭력성과 정복성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현상을 치료할 수 있는가. 원인 해결에 나서지 않고 현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오히려 문제를 더욱 곪게 만들 수 있다. 박정희 독재가 18년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로, 그의 금전적 청렴성이 지적되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그가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부패한 사람이었다면 정권을 18년 동안이나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독교가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제도를 개혁하고 윤리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면, 교리가 갖는 공격성과 문화적 강요는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진정 기독교의 개혁을 원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갖는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교리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진정한 개혁은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해체해야 한다. 또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죄지른 죄악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고 피해를 입은 우리 사회와 이웃 종교인들에게 진지하게 사죄해야 한다.

개혁을 말하는 기독교 단체들은, 비록 자신이 직접 행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매 형제'라 부르는 다른 기독교인에 의해 저질러진 '단군상 목자르기'나 '사찰 파괴 및 방화 행위' 등의 폭력행위에 대해 우리 사회에 공개적으로 사과하라. 그것은 피해를 입은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뿐만 아니라, 노상이나 지하철 등에서 안하무인 식으로 가해지는 협박성 포교행위와, 제사문화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인한 가정파괴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적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단체는) 피해를 입은 이웃들에게 진지하게 사과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일본의 과거사 만행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없다.

(참고로, 나는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작년 추석을 맞이하여 <한국의 이웃종교인들께 드리는 사죄문>을 발표하였으며, 그 글은 지금도 불거토피아(http://cafe.daum.net/bgtopia)의 '이웃종교 이해'방에 공지로 올려져 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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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5/01 [18: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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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가죽어야산다 2006/06/17 [13:29] 수정 | 삭제
  • 교회는 수구집단의 소굴이다.교회가 언제부터 구국기도라는 명복아래 자행되는 수구화 이념화는 국민들이 경계해야 한다.배타적이 몰상식적인 교회는 죽어야 국민들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