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리의 초록세상 만들기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일본식 표현인 ‘필자’, 알고보면 권위적
[비나리의 초록공명] 존댓말에 치이는 우리말 겸양어, ‘나’를 정확히 해야
 
우석훈   기사입력  2005/10/10 [20:13]
"오등"은 에서 "필자"는...
 
예전에 왕한테 신이 올리는 편지는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이란 말로 주어를 삼는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서 납품 수량을 급히 줄여달라거나 무과를 한산도에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이 전부 이러한 주어로 시작한다.
 
말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하지만 군신관계 속에서 왕의 지시를 무시하려고 할 때 올리는 말이 이러한 주어를 가지고 있다.
 
불어권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배운 건 주어를 쓰지 않는 법이다. Je라고 하는 "나는" 혹은 "저는"이라는 표현이 수 백 페이지 정도 되는 학위 논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수동태가 잘 발달하거나, on이라고 하는 무격 대명사, 즉 누구는 이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데카르트가 고전철학의 중요한 전기점을 가져온 코지토(cogito) 명제인, Je pense donc je suis,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는 분명히, je, 즉 내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지금 시락 대통령을 비롯해 현대 프랑스 정치학자들은 "나"를 분명히 하고 말을 한다.
 
영어권에서는 대학원 이상의 학생들에게 "I thinkk"라는 표현을 쓰지 않도록 지도한다.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진짜 사실인 경우에만 말을 하라는 뜻에서, I think that을 생략하도록 얘기하라고 한다.
 
UN에서 연설할 때에는 이 주체의 I가 Korea, China 혹은 US 같이 국가로 변하게 된다. 어차피 정부 대표들이 온 것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얘기할 때에도 국가를 주어로 사용하게 된다. 굳이 자신의 개인생각이라고 할 때에는 personally라는 말을 붙이지만, 기조 연설에서는 이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한문(어)에서는 "오(吾)"라는 표현을 썼다. 제일 잘 알려진 표현이 3.1절의 명문이라고 하는 최현배가 쓴, "오등은..." 우리들은 이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에 얘기할 때 "저는"이라는 말 대신에 "우리는"이라고 표현하라고 80년대 이후에 지적이 있었다. 국가를 낮출 수는 없다는 말인데, 존댓말이 특징인 우리나라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은 것 같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 존댓말을 남용해서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의 만년필이나 넥타이 색깔 같은 것을 높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넥타이 색깔이 참 예쁘시네요?" 상대방을 높이다 못해 넥타이의 색깔님까지 높이는 경우인데, 물론 뜻이 나쁘지 않다고 해서 참지만 원래 우리말 경어법에서는 이 경우는 실례에 해당한다. 사람을 높이고, 다른 건 낮추는 것이 경어법이니까, 위의 경우는 넥타이의 색깔을 높이면서 넥타이의 주인을 낮추는 의미를 발생시킨다. 경어법상은 오류이다.
 
90년대부터는 신문에 글을 쓰면서 "필자"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 이건 일본식 표현인데, 독일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근대 과학주의가 낳은 권위주의의 산물이다. 보통은 "연구자"라는 표현인데, 이걸 주어로까지 가져온 건 일본이다. 자신이 한 얘기가 아니라 어떤 논문이나 연구에서부터 권위를 빌려왔다는 표현이다.
 
이게 우리말로 들어오면서 필자와 독자는 상당히 권위적인 관계이고, 한 사람은 글을 쓰고 다른 사람은 그 글이나 보는 사람이라는 은근한 권위 관계를 설정하고 쓴다.
 
이게 점잖은 표현 혹은 객관적인 표현이라고 하면서, 요즘은 개나 소나 글을 쓰면서 "필자는"이라고 하면서 자신이라는 표현을 가늠한다.
 
오등, "나"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권위에 숨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촌스러움이 약간은 묻어있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5/10/10 [20:1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토달이 2005/11/01 [02:39] 수정 | 삭제
  • 중국에서도 쓰는 말인데 일본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근거인가요?

    그리고 필자는 본인을 지칭하기 보다 글을 쓴 제3자를 지칭할 경우에 쓰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라는데...
  • 알폰스 2005/10/18 [19:05] 수정 | 삭제
  • * 필자는 경제학박사로 초록정치연대(www.greens.or.kr) 정책실장입니다.
    * 최근 (뿌리와이파리, 2005)를 출간했습니다.
    * 필자의 블로그안내 http://blog.naver.com/wasang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