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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에 오른 그들, 더이상 마지막은 없다
태식과 브래독, ‘주먹이 운다’와 ‘신데렐라 맨’에서 찾은 인생 이야기
 
홍성관   기사입력  2005/09/28 [16:10]
누구를 위해 주먹을 울리는가

여기 밥을 먹기 위해 글로브를 낀 두 사나이가 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이들이 사각의 링 안으로 올라섰다. 사람들의 환호도, 야유도 들리지 않는다. 차압딱지가 다닥다닥 붙은 집이 지겹다고 울부짖는 아내와 아들, 전기세와 수도세가 밀려 끊기고 우유마저 배달되지 않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신음하는 아내와 자식들만 떠오를 뿐이다.
 
생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들
 
한때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로 잘 나가던 태식. 도박으로 진 빚과 공장의 화재로 인해 가진 것을 모두 잃은 그에게 더 슬픈 것은 자신에게 남았던 유일한 재산인 아내와 아들마저 떠나려 한다는 현실. 이제 그가 가진 것은 초라해진 몸뚱이뿐이다.
 
제임스 브래독. 그도 한때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노리던 뉴저지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부상을 숨기고 출전한 경기에서 패하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선수로서의 자격마저 박탈당한다. 빈민촌과도 같은 아파트에서 어린 세 남매와 아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 거울 앞에 선 그의 어깨는 잔뜩 쳐져있고,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이 켜켜이 묻어있다.
 
먹고 살기 위해 거리로, 노역장으로
 
▲ 영화 '주먹이 운다' 포스터     © 류승완 필름 제공
유흥가의 옥탑방에 혼자 남게 된 태식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내던지고 거리로 나선다. 그는 스트레스 받는 아저씨, 아줌마, 언니오빠에게 인간 샌드백이 되기로 한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 그래도 방송을 한 번 탄 뒤로 그의 주머니가 두둑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맞는 것이 단련된 그라도 기계가 아닌 이상 연일 두드려대는 매에 성할 리 없다. 뇌에 생긴 이상으로 그는 시야도 흐려지고 건망증도 생긴다. 더구나 배운 것 없는 그가 아들 학교에 일일교사로 나섰다가 망신만 당하고, 아내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며 이혼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 좌절하는 그에게 던져진 한 마디. "조지 포먼은 마흔 다섯에 챔피언이 됐어. 아직 나이 마흔밖에 안 된 새끼가..." 그리고 흐린 눈에 들어온 권투 신인왕전 광고.  
 
 왼 주먹을 쓰지 못하던 브래독의 오른손이 망가졌다. 1930년대를 미국의 암흑기로 만든 대공황. 더 이상 복싱을 하지 못하는 그는 이제 부둣가의 노역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야 하지만, 그 일거리마저도 불안정하다. 전기와 가스가 끊기고, 우유도 배달되지 않지만, 그는 가족들과는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정부 보조금까지 탄 그는 복싱협회 사무실을 찾아가 잔돈푼을 구걸하기에 이른다. 얼마 후 브래독의 오랜 벗이자 매니저인 조 굴드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물고 온다. 헤비급 챔피언의 예비 대전자와의 단일 매치.
 
링에 다시 오른 그들 - 이것이 마지막이다
 
▲영화 '신데렐라 맨'의 한 장면     ©론 하워드 필름 제공
등 뒤로 보이는 것은 그저 절벽뿐인 태식과 브래독. 인생 막장의 복서 둘은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대회 경기를 치르면 치를수록 태식은 예전의 노련함을 되찾아 결승에까지 오르고, 노역장에서의 고된 노동이 선사한 단단한 왼 주먹으로 브래독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암울한 세상, 그래도 아름다운 그대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쓸쓸히 비디오방에 비스듬히 누워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를 보았다. 군복 주머니에서 뒹굴다 꼬깃꼬깃해진 담배를 연신 입에 물지 않을 수 없었던 영화. 지지리 궁상의 극치. <신데렐라 맨>은 또 어떤가. 너무 배가 고픈데 숟가락은 없고, 손에 감은 붕대를 풀 수도 없어 그릇을 붙잡고 입으로 퍼먹는 브래독의 궁상도 태식에 만만치 않다.
 
그러나 어쩐지 그들의 저 궁상이 보기 싫지도, 답답하지도 않다. 보기 싫고, 답답한 것이 있다면 그들을 저 벼랑 끝으로 몰고 간 세상이겠지. 대공황이라는 암흑기 상황에서도 점잖은 클래식이 흐르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옷을 입고 앉아 비싼 밥을 쳐드시는 양반들의 모습. 그리고 제 자존심 다 내팽개치고 내민 모자에 겨우 동전 몇 개 넣어주는 그들의 센스. 소주 한 잔 더 들이키게 한다. 면상에 화악 부어주고 싶다만, 요즘엔 소주로 피부미용 하시는 분들이 있다니 남 좋은 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쉽다. 물론 감독들의 의도들은 그것이 아니었겠지만, 태식의 불행은 그저 개인의 불행. 세상사람 많은데 당연히 못사는 사람도 있게 마련인 법. 태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비아냥에서 좋게 발전해봐야 동정심. 브래독도 마찬가지다. 그의 승승장구는 대공황의 그늘에 고달픈 이들의 가슴을 적셔주는 감동 그 자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들이 쫙펴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간들 기다리는 것은 또다시 전기세 고지서와 가스 공급해지를 알리는 통지서, 그리고 지독한 감기에 걸려 앓고 있는 자식들뿐이다. 태식에게도 브래독에게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영화를 두고 너무 꼬치꼬치 캔다고 싫어할지 모르겠다. 영화는 그냥 보고 즐기는 거지, 하는 분들도 있겠다. 그래, 뭐라고 하지 말자. 그나마 태식과 브래독은 자기들 나름으로 극복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할 몫을 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 그리고 가족쯤의 영웅이지 당신들과 나의 영웅은 아니니까.
 
오십대의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 번도 일해본 적 없던 공장에 나가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십 분 정도 걸어서 공장에 가 저녁나절이나 되어 다시 이십 분 정도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그. 몇 군데 넣은 이력서가 나이 많다며 퇴자를 맞았는데, 여기서라도 일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그의 목소리. 태식을 보면서, 브래독을 보면서, 아버지를 보면서 싸해진 가슴을 어쩔 도리 없이 한 잔 소주로 달랜다.
 
나도 내일부턴 열심히 살리라. "조지 포먼은 마흔 다섯에 챔피언이 됐어. 아직 나이 마흔밖에 안 된 새끼가..."그래 난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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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9/28 [16: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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