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맘때가 반갑지만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여자들에게 가을 들머리는 명절을 준비해야 하는 때이다. 고향의 부모가 그리워도 차마 빈손으로 집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 명절을 앞둔 이맘때면 언론에 단골로 비치는 메뉴들이다. 그러나 세상의 인심은 가계에 주름진 사람들에게만 후할 뿐 명절 때문에 마음에 주름진 여자들에게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명절이 여자를 피곤하게 한다고 말하면 막중한 노동력이 요구되는 제사 준비가 떠오를 것이다. 연전에 여성단체에서는 남편을 비롯한 시댁의 남자 식구들을 제사상 차리는 데 참여시키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나의 경우 상차림이 좀 더 간소해지고 남편과 역할을 나눈다면 제사 지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여성들의 희생은 여전히 잔재
생전의 고인을 추억하는 자리가 될 수 있고, 죽은 이를 위해 산 자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제사라는 생각에 미치면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면 이승에 없는 이를 위해 음식을 차리는 건 한결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착한 생각은 여기까지. 지금의 제사 문화에서는 결코 조상이 주인공이라 할 수 없으니 문제다.
명절날 여자들은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하는데 남자들과 아이들은 배 두드리며 먹고 노느라 피곤한 풍경은 가족 관계에서 말석에 위치한 며느리의 위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혼한 여자에게 남편의 가족들은 그다지 편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며느리는 가족이되 아직 가족이 아니다. 가족이라면 염치나 체면은 굳이 차릴 필요가 없다. 의무만 있지 발언권이 없다면 당당한 가족 구성원일 수 없다. 며느리에게 시댁은 구석구석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지 발 뻗고 편히 누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허드렛일과 뒤치다꺼리는 자신의 몫일 뿐 나이어린 시동생, 시누이마저 상전으로 대접해 주어야 한다. 남편의 일가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잘못한 것이 없어도 미안해야 할 때가 많다. 몸가짐은 언제나 조신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다소곳하게 있어도 안된다. 적당히 어울릴 줄 알아야 하지만 너무 나서는 것도 책잡힌다. 이런 고난도의 역할에 적응하려면 뼈를 깎는 훈련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내 육신을 만들어준 선대의 제사는 모시지 않아도 되지만 얼굴도 본 적 없는 남편의 조상신은 섬겨야 하고, 떳떳한 가족의 일원 대접도 받지 못하면서 남편 일가를 곡진히 모셔야 하는 불합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려면 얼마만한 고난과 수행이 필요한 것일까. 이 과정을 통과한 여성이라면 정말 대단하다고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가부장 가족 제도 이젠 변모해야
우리 어머니들이 겪어온 삶의 내력이 그랬다. 그러나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싫은 내색도 할 수 없는 삶을 강제당한 며느리의 내면은 어느새 독한 시어머니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그만한 노력을 가족에 쏟지 말고 사회를 위해 기울였다면 큰일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남자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 가족 제도는 여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명절만 되면 이유 없이 몸이 아프다고 하는 여자들이 왜 나오겠는가.
생활양식의 변화로 가족제도도 변모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지만 여전히 여성의 희생을 밑천으로 삼는 가족 구도가 건재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명절에 있다. 멀리 있어도 명절이면 일가가 떠들썩하게 모여 치르는 제사는 부계 혈통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계승을 다짐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열 몇 시간 꼼짝 없이 막히는 길이라도 남자들에겐 고향길이 즐겁겠지만 일상의 교란과 초인적인 자기 절제가 요구되는 명절이 여자들에게 달가울 리 없다. 여성의 소외를 대가로 한 남성 자손의 축제로 명절이 변질될 바에야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평범한 여자들에게 언제까지 초인의 역할을 요구해야 하는가./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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