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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하여
우리민족이 겪은 역사의 상처와 아픔, 문학으로 일궈낸 소설 '태백산맥'
 
최을영   기사입력  2005/04/01 [02:54]

▲조정래

‘빨갱이’에 대한 단상(斷想)


‘빨갱이’. 나는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섬뜩함을 느낀다. 이 단어에서는 왠지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리고 섬뜩한 총구와 매섭게 노려보는 눈초리, 또 죽음이 연상된다. 때문에 나는 누군가 나를 ‘빨갱이’라 부를까봐 겁이 난다. 나에게 ‘빨갱이’란 딱지가 붙는 순간 곧 자연스레 죽음이 연상되는 것이다.

‘빨갱이’. 이는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만을 가지고 ‘빨갱이’란 단어가 가진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적 함의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빨갱이’란 단어에는 좌익 사상에 대한 부당한 평가가 서려 있고 좌익 인사들에 대한 편견이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엔 좌익 사상과 좌익 활동가에 대한 사회적인 멸시와 숨겨진 공포가 깔려 있다.

‘빨갱이’란 단어에 이렇듯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 이유는 한국이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좌우 이데올로기의 차이에 따라 생겨난 분단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는 우리와 같은 유(類)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음해하고 붕괴시키려는 세력이었고 적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빨갱이’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불순한 세력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이런 이유로 ‘빨갱이’는 남한 사회에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가 주는 혐오감 또는 거부감은 같은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빨갱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총탄 세례에 직면해야 했다. ‘빨갱이’가 아닌 빨간 물이 약간 들어간 ‘주홍이’, ‘선홍이’, ‘분홍이’ 등도 ‘정통 빨갱이’들의 운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 자식들도 인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빨갱이’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던 이유는 대한민국 전반에 깔려있는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반백(半百)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그 동안 정권 유지의 충실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분단 이후 한국 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는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기 앞에서 ‘자유’나 ‘민주’는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 분단 이후 한국 사회는 반공 규율사회였던 것이다.

문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동안 반공 이데올로기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던 국가보안법에 걸려 붓을 꺾어야 했던 작가는 과거부터 끊이지 않았다. 1965년 『분지』의 남정현, 78년 『순이삼촌』의 현기영, 87년 서사시 『한라산』의 이산하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자신의 창작물 때문에 필화사건을 겪어야 했고 국가보안법에 의해 단죄되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올가미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자기검열을 해야만 했다.

작가 조정래.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그도 국가보안법이 쳐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그 자신의 대표작 『태백산맥』 때문이었다. 일부 우익단체들은 『태백산맥』에서 한국전쟁을 인민해방전쟁이라 지칭한 점, 이승만 정권을 친일 및 친미 괴뢰정부로 묘사한 점, 빨치산을 인민해방전사로 표현한 점 등을 들어 『태백산맥』에 이적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조정래를 국가보안법 위반과 명예훼손 등으로 고발했다. 조정래는 이 같은 고발에 따라 검찰에 송치돼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빨갱이 혐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태백산맥』도 이적표현물이라는 오명을 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태백산맥』을 둘러싼 이적성 논란은 아직까지도(2000년 7월 현재-편집자) 계속되고 있고 검찰의 조사도 계속되고 있다.

『태백산맥』은 과연 이적성을 띤 소설인가

과연 『태백산맥』은 이적성을 띤 소설인가? 먼저 이적성이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자. 이적성(利敵性)은 말 그대로 적을 이롭게 하는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적은 누구인가?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아마 알겠지만 국가에서 규정짓고 있는 주적(主敵)은 북한이다. 결과적으로 이적성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태백산맥』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성향을 가진 소설이 되는 것이다. 물론 색안경을 끼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말이다. 그러면 과연 『태백산맥』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소설일까? 『태백산맥』의 주제를 고찰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태백산맥』의 주제는 분단과 민족, 그리고 역사다. 때문에 『태백산맥』은 좌우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지 않고 오직 민족이라는 명제를 최우위에 두고 분단에 대해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 한다. 『태백산맥』을 곰곰이 읽어보면 이 글이 단순한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좌익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양을 얘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태백산맥』에서 좌우 이념의 대립은 그냥 발생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땅을 ‘목심(목숨)’으로 아는 농민들의 땅에 대한 애착이 깔려 있고 친일 모리배들이 해방이 된 후에도 다시 권력을 잡아가는 것에 대한 일반 민중들의 분노가 깔려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에 눈이 멀어 농민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고혈 위에서 기와지붕을 올린 지주들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다.

조정래는 이 같은 사실에 입각해 어떻게 좌익운동이 활성화되었고 빨치산이 탄생했는가를 소설 속에서 개연성 있게 또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 소설은 남한 정권의 정당성에 문제제기를 한다. 즉 남한 민중들의 요구를 폭력과 압제로 물리치고 정권을 유지시켜나간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에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태백산맥』의 이적성 시비를 불거지게 한 요인이었다. 즉 『태백산맥』에 이적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이들은 『태백산맥』이 남한 정권의 정당성을 박탈함으로써 북한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고, 이 때문에 소설 『태백산맥』은 북을 이롭게 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백산맥』은 북을 찬양하지도 좌익 이데올로기를 찬양하지도 않았다. 또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을 박탈하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조정래는 이승만 정권 시절 남한 내의 민중들이 무엇을 원했는가 하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을 뿐이다.

당시 민중들이 원했던 것은 친일파 척결이었고 토지의 고른 분배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이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그런 목소리를 탄압하기에만 바빴다. 민족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친일파 척결과 토지의 고른 분배를 주장했던 좌익 이데올로기는 농민 대부분이 소작인이었던 남한 민중들에게 널리 유포될 수밖에 없었다.

조정래는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그런 ‘과거의 현실’을 추적해 현실에서 진실로 통용되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해방 전후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분단과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을 통해 소외된, 민족이라는 개념을 일깨웠다. 때문에 『태백산맥』에 씌워진 이적성이라는 혐의는 ‘반공’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소설을 오독(誤讀)한 사람들의 잘못된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나 오독의 결과물인 이적성이라는 혐의는 오랜 기간 동안 조정래와 『태백산맥』을 괴롭히고 있다. 오독자(誤讀者)들과 그들의 사상적 기반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우 양쪽에서 공격받은 『태백산맥』의 이적성 논란

『태백산맥』의 이적성 논란이 시작된 때는 1991년이었다. 이적성 논란이 불거진 직접적인 이유는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이 책을 학습자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91년 4월 대검 공안부는 『태백산맥』이 민중봉기를 미화하는 등 이적성이 있다고 판단해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이 소설을 의식화 자료로 사용할 경우 국가보안법으로 사법처리하겠다고 발표했다. 단 순수한 목적으로 소설을 읽은 독자는 제외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태백산맥』에 내려진 높은 문학적 평가와 『태백산맥』을 접했던 수백만의 무시할 수 없는 독자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린 모호한 사법처리 기준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태백산맥』의 일부분에 이적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했다. 조정래는 이 때문에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검찰은 소설 『태백산맥』에서 이적성을 입증할 만한 내용을 찾아내지 못했고, 『태백산맥』을 둘러싼 첫 번째 이적성 시비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태백산맥』에 대한 이적성 시비가 다시 불붙은 때는 공안정국이었던 94년 4월이었다. 3년 전 검찰의 미온적인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그리고 소설 『태백산맥』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이때는 이승만의 양아들 이인수(명지대 교수)와 8개의 우익단체들1)이 책 한 권 분량이 되는 고발장을 들고 나섰다.
1) 이들 8개 단체들은 구국민족동맹, 한국전쟁참전총동맹, 대한민국무공훈장자회, 대한파월유공전우회, 6ㆍ25참전철도동지회, 전국철도노우회, 건국청년운동협의회 총본부, 실향민애국운동협의회 등이다.


그들의 주요 주장은 『태백산맥』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북한 정권만이 정통성을 가진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당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던 『태백산맥』의 감독 임권택에 대한 신랄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들은 고발장을 통해 “‘빨갱이의 아들’인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빨치산과 좌익과 김일성 정권의 위대함을 부각해 선전함으로써, 자신의 가족사에서 비롯된 한을 풀겠다는 비원까지도 깔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임권택 감독을 ‘빨갱이의 아들’로 몰아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한 것임과 동시에 영화 『태백산맥』의 제작을 한 개인의 불순한 의도로 몰아 무산시키려 한 것이었다.2)
2) 일부 극우단체의 영화 『태백산맥』에 대한 협박은 고발장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과 제작사 측은 『태백산맥』의 영화화 때문에 밤마다 협박 전화에 시달려야 했고 『태백산맥』을 상영하려 했던 영화관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 결과 영화 『태백산맥』의 시나리오는 고쳐져야 했으며 이 영화는 소설의 의도를 왜곡한 어정쩡한 반공영화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태백산맥』은 “이념의 과잉”기였던 80년대 일부 진보적 지식인과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비판의 주요 논점은 『태백산맥』의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김범우가 ‘계급적 관점’ 없이 민족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황광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히 일부 운동권에서는 ‘안기부 돈을 얻어 쓰는 것이 아니냐?’고 공격하면서 자체적으로 1년간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거부감은 이 소설의 김범우가 해방 공간에서 극단적인 좌익과 우익을 거부하고 민족주의자 입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계급 관점 결여’라는 비판에는 일부 문단이나 진보적 사회과학자들까지 가세하여 한때 작가를 좌절시키기도 했다. 80년대 초엽의 상황은 그만큼 이념의 과잉 반응을 보인 시대이기도 했다.”

황광수의 지적은 『태백산맥』에 씌워진 이적성이라는 혐의가 얼마나 자의적인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우익 단체들로부터 이적성이 철철 넘쳐흐르는 소설로 낙인찍힌 『태백산맥』이 80년대 운동권과 진보적 사회과학자들에게는 ‘계급 관점 결여’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여기서 이적성이라는 혐의가 갖는 이데올로기 편향을 읽어낼 수 있다. 이데올로기에 갇혀 소설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소설 속에서 좌우익을 돌아보다 결국 민족을 선택하는 김범우의 입장처럼 조정래도 현실에서 김범우와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됨을 보여준다. 이데올로기가 앞서고 인간이 뒷전인 사람들에게 조정래는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80년 5월 ‘광주항쟁’의 광장에서 소설의 길을 고민하다

『태백산맥』의 이적성 혐의가 이데올로기 편향에 따른 결과라는 사실은 『태백산맥』의 탄생 과정과 조정래가 『태백산맥』을 쓰게 된 이유, 그리고 이 소설에 쏟아진 문학적 평가와 독자의 찬사를 살펴보면 더 명확히 드러난다.

조정래가 『태백산맥』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겪고 나서부터였다. 광주가 계엄군의 군홧발 아래 짓밟힌 직후 광주를 찾았던 조정래는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80년 광주’를 있게 한 근원을 더듬어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만난 것은 분단이었고 분단으로 지속되고 있는 민족의 아픔이었다. ‘80년 광주’를 기점으로 그는 자신의 문학관인 ‘분단에 대한 총정리’를 좀더 빨리 실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잘못되고 왜곡된 역사의 비뚤어진 물줄기를 소설적 언어로 바로잡은 『태백산맥』이었다. 조정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분단에 대해서, 민족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굳이 그것을 쓰고자 함에 대하여, 무엇을 쓰느냐에 대하여,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하여 질문은 무성했다. 그 질문에 대한 일부분의 대답이 바로 사천오백 매인 것이다. 민족 분단의 삶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민중의 상처와 아픔을 감싸고자 하는 베짜기 작업이 어떻게 종합되고 통일을 이루어, 잘려진 태백산맥의 허리를 잇는 데 얼마나 기여할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 짐을 나는 지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허리잇기’ 염원이 언제인가는 성취될 것을 믿으며, 앞으로도 동반자 없는 등반을 계속해 나가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등단 이후 쓴 소설의 70%가량이 민족분단을 주제로 한 것이다. 나머지 30%는 소외계층을 다룬 것이고. 『태백산맥』은 이런 작업들을 결산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분단의 분기점이 해방이고, 분단이 고착화된 결정적 계기가 전쟁이다. 원인의 시대를 들여다보면 그 경과와 결과가 드러나는 것은 필연적 아닌가. 그래서 이 시대를 형상화했다. 좀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문학으로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때야 하나 하는 화두를, 민족상잔의 출발이 됐던 그 시절의 상처와 괴로움을 제대로 찾아내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 속에서 찾아본 것이다.”


‘역사에의 신뢰’ 하나로 버텨낸 숱한 밤들의 테러협박

『태백산맥』의 첫 시작은 1983년 9월이었다.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태백산맥』은 만 6년 동안의 길고 긴 여정을 거쳐 89년 11월 전 10권으로 독자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태백산맥』이 연재되면서 조정래에게 가해진 보이지 않는 세력의 압력과 테러위협이 그것이었다. 이런 위협은 『태백산맥』 제1부 ‘한의 모닥불’이 86년 7월 전 3권으로 간행된 후 본격화되었다. 새벽 2∼3시경이면 그에겐 어김없이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이 빨갱이 새끼야, 그것도 소설이라고 써. 당장 때려치워. 말 안 들으면 네 놈을 없애버릴 거야!”, “지금 당장 네 놈 집이 폭파된다”, “이 새끼, 느네 가족을 싹 몰살시키고 말 거야”, “평생 따라다니며 끝끝내 죽이고 말 거니까 안심하지 말어” 등과 같은 입에 담기도 힘든, 그리고 정말 유치한 협박이 이어졌던 것이다.

조정래의 창작에 대한 압력은 단순한 협박전화로만 그치지는 않았다. 『태백산맥』의 연재가 『현대문학』에서 조정래가 주간으로 있던 『한국문학』으로 옮겨지자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한 달에 한두 번씩 조정래를 방문해 소설 창작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조정래가 소설 집필을 위해 ‘성 나자로 마을’에 가 있는 동안에도 형사들의 방문은 그칠 줄을 몰랐다. 또한 조정래를 취재한 KBS PD가 청와대에 끌려가 혼이 나고 그 프로그램의 제작팀이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소식도 조정래에게는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했다.

조정래의 아내 김초혜가 조정래 혼자 밤에 나다니는 것을 극구 만류할 정도로 협박의 강도는 높아만 갔다. 그럼에도 조정래는 이 같은 위협에 굴하지 않았다. 1987년 전 2권으로 간행된 『태백산맥』 제2부 작가의 말에서 조정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 속의 올곧은 진리를 발견해내는 일과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내적 의지와, 그것을 글로써 표현하고 기록하는 행위와 그 앞을 막아서는 여러 어려움들, 그것은 오로지 글쓰는 자 혼자서만 겪어내고 이겨내야 하는 외롭고도 힘겨운 그러면서도 보람된 고문이었다. 그 길을 인도하는 멀고먼 불빛 하나가 곧 ‘역사에의 신뢰’였다. 역사는 ‘힘있는 자들의 기록’이어서는 아니된다. 우리의 분단된 삶, 통일을 찾아가야 하는 우리의 민족적 삶에 있어서는 더욱이 그러하다. 역사의 그런 허위가 파괴되고, 역사가 ‘자각하는 민중의 소유’가 될 때 비로소 우리 민족의 ‘허리잇기’인 통일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 중간 과정에 문학이 해내야 할 몫이 있다고 확신하며, 나는 소설로써 그 일을 이루어보려고 욕심부리는 것이다.”

판매량과 질적 평가에서 한국 문학 최고봉을 이루다

끊임없는 협박과 압력은 『태백산맥』이 완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유서를 두 통이나 써놓고 덤빈, 치열한 작가의식에 사로잡힌 조정래의 글쓰기 또한 계속되었다. 그 결과 89년 11월 『태백산맥』은 전 4부 10권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6년 동안 글감옥에 갇힌 작가의 결과물이었다.

『태백산맥』은 완간된 후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찬사를 받았다. 『태백산맥』은 88년 문학평론가 48명이 뽑은 ‘80년대 최대의 문제작’ 1위, 90년 출판인 34명이 뽑은 ‘이 한권의 책’ 1위에 올랐다. 또한 독자가 뽑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1위와 대학생이 뽑은 ‘가장 감명깊은 책’ 1위에 올랐다. 92년에는 일본 3대 출판사 중 하나인 슈에이샤(集英社)에서 계약을 체결해 5년간의 번역 작업을 끝내고 99년 10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태백산맥』은 주위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았고 지금까지도 그 찬사는 계속되고 있다. 계속된 독자들의 찬사로 『태백산맥』은 97년 2월 1백쇄를 돌파했다. 최인훈의 『광장』,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이어 한국 소설 역사상 『태백산맥』이 세 번째로 1백쇄를 돌파한 것이다. 앞의 두 소설이 한 권짜리 장편이었던 반면 『태백산맥』은 10권짜리 대하소설이니 그 판매량이 같은 1백쇄라 할지라도 앞의 두 소설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태백산맥』의 판매량은 박경리의 『토지』(400만 부), 황석영의 『장길산』(180만 부)보다 많았고, 80년대의 대표적 상업소설인 김홍신의 『인간시장』(360만 부)과 9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400만 부)보다 많은 450만 부(1997)의 판매량을 보였다. 순문학으로서는 대단한 판매량이었다.

『태백산맥』이 이같이 독자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왜곡된 한국 현대사를 사실에 기초한 소설적 언어를 통해 복원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작품 속에 올올이 녹아 있는 맛깔스런 전라도 사투리와 고향을 느끼게 하는 자연의 서정성, 시대와 같이 호흡하며 자신의 길을 걸었던 전형적이고도 독특한 인물들, 작품의 맛을 더해주는 여러 유형의 사랑 이야기, 분단의 내적 요인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작가의 분단의식, 분단 문제에 대한 작가의 총체적 해석 등이 이 작품의 인기 비결이었다.

조정래는 이같이 『태백산맥』을 통해 그 자신이 창작 신념으로 삼았던 분단과 소외계층을 위한 글쓰기를 실현했다. 거기에 부가적으로 그는 왜곡된 한국 현대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통해 남한의 뿌리깊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가진 허구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당시 민중이라 불리는 일반민들이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으며 그들이 좌익사상을 갖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나를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과 한국전쟁으로 피해 입은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주었다.

조정래는 『태백산맥』으로 일약 스타 문인이 되었다. 거기에는 그의 성실한 작업이 있었고 분단과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겠다는 올곧은 문학관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문학관에 기대어 성실하게, 때로는 치열하게 글쓰기를 수행했다. 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태백산맥』은 탄생할 수 있었고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래는 어째서 분단과 민족, 그리고 소외계층을 소설로 그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조정래의 삶과 무관치 않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가난과 분단에서 비롯된 아픔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때문에 그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조정래의 작가관과 소설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보자.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이 조정래 어린이에게 안긴 상처

조정래는 1943년 8월 17일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처승은 처자식이 있는 승려를 말한다. 우리의 관습상으로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물 건너 일본에서는 분명 존재한다. 즉 대처승은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이식시킨 풍습이다. 조정래의 아버지 조종현은 1927년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시조시인이자 ‘철운’이란 법명을 가진 승려였다. 그런 그가 대처승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내선일체를 부르짖었던, 그리고 황국신민화 작업을 줄기차게 펼쳤던 일제 덕분이었다. 즉 조종현은 승려 신분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일제의 강압 아래 시범적인 대처승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난 조정래는 어린 시절을 절에서 보냈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 몇 해 후 그는 가족과 함께 절을 떠나게 된다. 이유는 진보적인 주장을 펼쳤던 아버지와 절과의 마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 조종현은 해방이 되자 ‘절은 소작인을 거느려서는 안 된다’, ‘절은 대중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리고 1947년에는 선암사의 부주지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소작인들에게 사답(寺畓)을 분배하여 주지와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이 일로 조정래의 아버지는 선암사를 떠나야 했고 이때부터 조정래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가난이라는 멍에가 씌워졌다.

절에서 쫓겨난 조정래 가족은 순천에 정착했다. 그런데 순천에 정착한 지 1년 정도가 지난 48년 10월 20일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빠른 시일에 걸쳐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이 이어졌다. 『태백산맥』의 시작이 ‘여순사건’의 진압이 종료된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은 조정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조정래는 ‘여순사건’을 “불행한 그러나 값진 체험”이라고 술회한다.

“나는 그 사건을 계기로 정도를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입음과 동시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철이 들어 버렸다. …… 총구의 공포, 싸늘한 총소리, 시뻘건 피의 홍수, 시체의 더미 ……. 나 자신이 의아할 정도로 그때의 체험이 나 자신에게 많은 의문과 질문과 탐색을 반추하게 만들었다. 불행한 그러나 값진 체험이었다.”

‘여순사건’의 여파는 조정래의 가족에게도 밀려왔다. 조정래의 아버지는 이 사건과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암사에서의 일이 문제가 돼 주위로부터 ‘빨갱이’라는 엄청난 모략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결국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조정래의 아버지는 1950년이 되어서야 누명을 벗고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가족을 이끌고 순천을 떠나 논산으로 이사했다. 논산으로의 이사는 조정래 가족에게 큰 행운이었다. 순천에 남아 있었다면 순천에서 좌익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던 아버지가 보도연맹사건3)에 연루되어 즉결처분을 당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는 사람들이 없었던 논산에서 조정래 가족은 다행히 가장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3) 보도연맹사건은 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한 사건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10월 좌익 전향자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으로서, 좌익 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과정에서 이들 보도연맹원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이것은 평택 이남의 전 지역에서 발생했다.

보도연맹사건은 한국전쟁 중 벌어진 최초의 집단적인 민간인 학살이었고 이는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났던 좌익 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사사전편찬회 편, 『한국근현대사사전』(가람기획, 1990), 317쪽. 


조정래는 논산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7살이었다. 전쟁은 어린이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참혹하고 잔학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중 그는 야뇨증에 시달려야 했고 그것은 51년 1ㆍ4 후퇴 때 겪은 미군이 자행한 가족들에 대한 폭행으로 더욱 심해졌다. 조정래는 전쟁의 참혹함과 잔학함, 그리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인권이 짓밟히는 전쟁의 현실 한가운데에 어린이의 몸으로 서 있어야 했고 그것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가 나중에 천착하게 될 분단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로 이어지게 된다.

벌교에서의 행복했던 시절과 광주ㆍ서울로의 이사

1953년 휴전이 이뤄지자 조정래 가족은 피난생활을 마감하고 아버지의 두 형제가 살고 있던 전남 벌교에 정착했다. 조종현은 벌교상고 교사로 취직했고 조정래는 초등학교 4학년에 진학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벌교 땅에서 조정래가 시달림을 당했던 야뇨증은 자연스레 치유가 되었다. 그러나 가족의 생계 문제가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의 벌이가 신통치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거기에 매달린 식구가 너무 많았다. 아내와 4남4녀의 자식들의 생활을 책임지기에는 교사 월급이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조정래는 여전히 가난과 싸워야 했고 계급의식까지는 아니어도 부자와 빈자와의 격차, 그리고 그 불공평함에 대한 문제의식을 몸으로 느꼈다. 조정래는 훗날 이 시기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고르게 나눠 먹는 것’이라 답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벌교에서 보낸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조정래는 남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해, 언제나 이야기꽃이 피는 사랑방을 순회했다. 그리고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해야 할 숙제를 안 해 어머니에게 혼나기도 많이 했다고 한다. 또 아버지의 채점 시험지 뒷면을 활용해 문집을 만들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문학에 대한 꿈이 있었다.

벌교에서의 생활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조정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빨리 지나갔다. 1956년 아버지의 직장이 벌교에서 광주로 옮겨짐에 따라 조정래는 광주로 중학교 진학을 하게 되었다. 그가 진학한 곳은 광주 서중이었고 그는 한동안 벌교에 대한 향수에 시달려야 했다. 광주에서의 생활도 잠시 조정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자 다시 이사를 한다. 아버지가 서울 보성고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었다. 조정래도 역시 서울 보성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이는 보성고등학교 선생의 자식들에게는 수업료를 전액 면제해 주는 제도를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조정래 가족은 이때까지도 가난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조정래는 의외로 이과반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농촌 사회 활동에 대한 꿈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그런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아버지가 문예반 지도교사로 있어 문예반에 들지 않았던 그는 혼자 교외 서클을 통해 꾸준히 글을 써나갔고 그것을 그의 개인문집에 고스란히 기록했다. 그런데 이 문집이 교내 문예반원들에게 알려졌다. 조정래는 문예반의 추천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 그의 글을 학교 신문에 실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던가?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대학 진로를 국문과로 정했고 문과반 수업을 따로 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한 채 입시 공부에 열중했다. 그리고 1962년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했다.

순수문학의 바람에 밀려 작가가 되지 못하고 선택한 군대

대학은 조정래에게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대학에서 자유로움을 한껏 만끽했다. 그러나 그가 자유로움에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시도 펜 놀리는 것을 쉬지 않았고 그것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대학 시절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쓸 것인가를 정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도 조정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분단과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였다. 그가 이렇듯 자신의 문학관을 정한 이유는 자신의 삶에 기초한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체험했던 가난에 대한 진저리, 한국전쟁을 통해 체험한 분단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반골 기질은 가난에서 싹텄습니다. 문학이 왜 필요한가의 출발점도 거기지요. 때로 피로가 쌓여 도망가 버리고 싶을 때, 소리 지르고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고 글이 안 될 때, 내가 술이나 농땡이로 도망치지 않고 책상 앞으로 더 다가앉는 건 어린 시절 나 자신에게 다짐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한 번 살다간다. 한 번 살기 때문에 적당히 살 수는 없다. 너는 글쓰는 놈이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부지런히 글쓰는 것, 글로써 가난한 자와 가난한 자들의 위에 서 있는 자들을 가려내 그 모순을 고발하는 것, 그게 너의 본분이다.”

자신을 “넌 글쓰는 놈이다”고 규정하며 글쓰기에 잠시의 게으름도 허용치 않았던 조정래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군대에 갔다. 가고 싶어 간 군대는 아니었다. 자신의 창작 신념과 시대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시사인물사전 8: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가
8100 원
(지식열쇠 112개)

“소설은 모두 인간들의 삶을 쓰되 고통과 부조리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 결론 앞에서 나는 다시 두 가지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우리 민족의 역사는 왜 이렇게 참담하고도 비참한가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왜 인간의 사회에서 삶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문제들을 작품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니 지극히 필연적인 결과였지만 주제가 강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문학청년으로 처해 있었던 1960년대에는 순수문학의 바람이 압도적이었고, 그 바람은 그 당시 하나뿐이던 잡지 『현대문학』의 추천위원인 몇몇 작가가 일으키고 있었다. 그 문단 실세들인 작가에게 주제가 강한 작품은 비순수문학이거나 참여문학으로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끝내 작가가 되지 못하고 군대에 나가야 했다.”

이렇게 간 군대에서 그는 결혼식을 올렸다. 1967년 육군 일등병의 신분으로 대학 시절부터 연인이었고 조정래보다 먼저 시인으로 등단한 김초혜와 화촉을 올린 것이다. 김초혜는 이때부터 조정래 글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자, 그리고 조력자가 되었다.

70∼83년까지의 험난한 작가생활

69년 군을 제대한 조정래는 70년 자신의 첫 단편소설 『누명』이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누명』은 한국인 카투사 병사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서 일종의 반미소설이었다. 조정래는 그 해 말 『선생님 기행(紀行)』을 다시 한 번 『현대문학』에 올렸다.

그러나 그는 전업작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문학으로는 생계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교사 생활을 73까지 3년 동안 했다. 그러나 군 장성 출신이던 교장이 조정래가 쓴 『누명』 등의 글을 읽고 그를 퇴직시켰다.

조정래는 그 후 출판사를 전전하다 직접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작품을 내놓았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72년 중편 『청산댁』을 『현대문학』에, 그리고 『이런 식이더이다』를 『월간문학』에 발표했다. 그리고 부부작품집 『어떤 전설』을 출간했다. 이 중 『청산댁』은 후에 나올 『유형의 땅』, 그리고 『태백산맥』과 맥을 같이 하는 작품이다. 즉 한국전쟁의 발발로 빚어진 분단이라는 민족의 아픔을 그려낸 것이다.

그 후 조정래는 73년 중편 『비탈진 음지』와 단편 『타이거 메이저』『거부반응』『동맥』 등을 내놓았다. 또 이 해에 작품집 『황토』를 출간했다. 조정래는 70년대 말까지 『대장경』(1976),『어떤 솔거의 죽음』(1977), 『비둘기』(1977), 『마술의 손』(1978), 『미운 오리새끼』(1978), 『장님 외줄타기』(1979)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작품집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1977), 『한, 그 그늘의 자리』(1978)를 간행했다.

1980년 조정래는 작품집 『허망한 세상이야기』를 펴냈고 81년에는 작품집 『대장경』을 간행하는 한편 『태백산맥』과 연장선상에 있는 『유형의 땅』(1981)을 발표했다. 그는 81년 『유형의 땅』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82년 조정래는 연작소설 『인간연습』『인간의 문』『인간의 계단』『인간의 탑』을 발표했는데, 이 중 『인간의 문』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조정래는 이 네 편의 연작소설을 83년 작품집 『불놀이』를 통해 내놓았다. 『불놀이』는 『유형의 땅』과 『태백산맥』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그는 이 글을 통해 분단현실하의 한국 사회의 모순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글쓰기를 계속해 나갔다. 자신의 창작 목표였던 분단과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총체적으로 그려낼 소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작품이 1983년 『현대문학』 9월호에 처음 연재된 『태백산맥』이었다.

『태백산맥』 이후 또 스스로 찾아들어간 『아리랑』 글감옥

『태백산맥』은 1989년 전 10권으로 완간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2000년 7월-편집자) 검찰로부터 계속 그 이적성 여부를 조사받고 있고 조정래는 아직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로 남아 있다. 말 그대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태백산맥』을 바라보는 일부 우익단체들과 그것을 조사하는 검찰의 태도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래는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90년 12월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아리랑』의 집필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1년 동안 자료를 모으느라 중국과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하와이 등지로 돌아다닌 후였다. 어느 정도 자료가 모이자 그는 다시 글감옥으로 들어갔다.

원고지 30장을 하루 안에 기필코 쓴다는 신념 아래 그는 밥 먹는 시간과 잠깐 동안의 운동ㆍ낮잠 시간을 제외하고는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30장이 찰 때까지 쓰고 또 썼다. 아무리 글이 안 써지는 날도 책상머리에서 떨어질 줄 몰랐고 글이 안 써지면 더욱 악착같이 원고지에 달려들었다. 그의 작업 결과물이 총 12권짜리 대하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 분량을 다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덕분이었고 철저하고 성실한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90년 12월 『한국일보』에 연재하면서 시작한 『아리랑』은 94년 6월 제1부 ‘아, 한반도’가 3권으로 출간된 것을 시작으로 그 해 12월 8권까지 출간됐다. 이후 조정래는 소설 집필에만 몰두하기 위해 『한국일보』에 연재를 중단하고 계속 『아리랑』을 써나갔다. 그리고 95년 8월에 『아리랑』 집필이 완결되어 전 12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4년 8개월 만에 이룩한 성과였다.

『아리랑』이 쓰여지던 당시는 조정래가 우익단체들로부터 고소를 당해 검찰로부터 조사를 받았던 시기였다.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래는 작품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 계획이었던 4년 만의 탈고는 8개월이나 늦춰져야 했다. 『태백산맥』을 두고 벌어졌던 이적성 시비에 따른 결과였다. 그렇게 『아리랑』은 탄생되었다.

독자들은 작가의 그런 노고를 아는 듯 『아리랑』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아리랑』의 판매 속도는 『태백산맥』의 그것보다 빨랐다. 『태백산맥』에 감명받은 독자들은 조정래의 소설이 나오자마자 사들였고 그것을 탐독했다. 책이 출간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97년, 『아리랑』은 250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아리랑』에 쏟아진 독자의 호응도는 이같이 대단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의 상처와 아픔’,

“역사학도, 사회학도 그 소임을 포기한 마당에 그 일은 문학의 몫”

조정래가 『아리랑』을 통해 전달하려 했던 것은 사그라지고 있는 민족의 부활이었다. 그는 『아리랑』을 완결한 후 다음과 같은 집필의도를 밝혔다.

“나는 『아리랑』을 왜 쓰며, 무엇을 쓰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부(部)가 바뀔 때마다 작가의 말을 통해서 대충 밝혔다. 그건 한마디로 줄이면, 분단대립으로 반토막나고, 또 친일파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차단시키고 망각을 조장한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구체적이며 총체적으로 바로 알고, 우리 모두가 식민지 시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굴복감과 패배감, 수치심을 진실한 역사 사실들을 통해 우리의 식민지 시대는 저항과 투쟁과 승리의 역사였음을 확인시키고, 우리 모두에게 상실되어 있는 민족적 긍지감과 자긍심, 자존심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민족의 부활을 위해 『아리랑』을 썼고, 『아리랑』을 통해 세계 여러 곳으로 삶을 위해 뻗어나간 한민족과 만주와 국내에서 끊임없이 일제에 저항했던 한민족의 투쟁을 총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하와이로, 중앙아시아로, 만주로 뻗어나간 한민족이, 척박한 그 땅에서 더구나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삶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가를 보여줌으로써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성실성과 끈기 등을 부각시켜 민족의 긍지를 일깨웠다.

그리고 일제식민지 시절 수많은 곳에서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들을 등장시켜 한민족의 해방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즉 그는 『아리랑』을 통해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폄하된 한민족의 민족성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정립하려 한 것이었다. 이런 작가의 의도는 작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조정래가 민족이라는 개념에 천착한 것은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분단의 상처 때문이었다. 그는 왜 우리 민족은 분단과 같은 아픈 상처를 가져야만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대학 시절부터 갖고 있었다. 이후 조정래는 항상 민족문제에 관심을 보여왔고 민족의 역사를 올바르게 그려냄으로써 민족의 자긍심을 세우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민족의 언어로 문학이라는 것을 하면서 민족의 삶과 역사를 진정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작가의 소임이라는 생각을 나는 신념처럼 갖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태백산맥』에 이어 『아리랑』도 무수한 독자들의 사랑 속에 있게 됨으로써 내 생각과 실천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내가 써낸 민족의 이야기에 대해 묘하게 비판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민족주의는 해묵은 것이며 반인류적인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들은 설익은 지식인이거나 사대주의적 발상자들이다. 나는 히틀러식의 배타적이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민족주의를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을 맞은 이후 어느 때 한 번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의 상처와 아픔에 대해 그 진실과 실체를 객관적으로 작품화 해 본 적이 있는가. 분단상황 속에서 역사학도, 사회학도 그 소임을 포기한 마당에 그 일은 문학의 몫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일을 통해 약소민족의 생존을 위한 방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이며 화합적인 민족주의를 일깨우는 동시에 우리 민족이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자존심과 긍지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휴전 후의 “눅진한 민중사”를 위한 글감옥 『한강』

『아리랑』의 집필을 마치고 그는 잠시간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글에 몰두한다. 시대는 휴전 이후부터 92년 문민정부가 시작되기 전까지로 잡았다. 말 그대로 굴곡 많고 탈도 많았던 한국 현대사 모두를 소설로 형상화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95년 10월부터 그는 베트남과 독일, 미국 등지로 취재여행을 떠났다. 글감옥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였다. 그리고 98년 5월 『한겨레』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가 『한강』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눅진한 민중사”다.

“이번에도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것은 눅진한 민중사가 될 것입니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한국 현대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민중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박정희를 떠올립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어리석음이고 비극입니다.”

▲조갑제

조정래는 『한강』에 담길 것은 민중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경제성장의 공(功)이 박정희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는 『한강』을 통해 한국의 경제성장이 박정희 한 사람만의 것으로 치부되는 현실에 맞서 그것이 한국 민중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밝혀내려고 하고 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조선일보』에서 주도적으로 조성했던 ‘박정희 신드롬’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그들은 대중에게 최면을 걸어 그 신화를 파급시키려 합니다. 내가 『한강』을 쓰려는 작은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소설을 통해 그 왜곡된 신화를 깰 것입니다. 실증적 작업을 통해 한국 현대사 건설의 주인공이 박정희가 아니라 이 땅의 민중들임을 분명하게 보여줄 겁니다. 그래서 조갑제나 이인화 등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부끄러운 짓인가를 느끼게 해 줄 겁니다.”

▲이인화



그가 이 같은 작업을 ‘작은 이유’라 한 것은 박정희 살리기 자체가 “난센스”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며칠 후 조정래는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박정희 신드롬’을 생산해내는 공장이라 할 수 있는 『주간조선』과 인터뷰를 해 글쓴이를 무척이나 당황하게 만들었다.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신드롬을 “난센스”라 평했던 이가 그 “난센스”를 조장하는 매체와 인터뷰를 한 것이다.

더구나 조정래는 94년 『월간조선』으로부터 『태백산맥』을 통해 역사를 왜곡했다는 혹평을 받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조선일보 가족매체’는 『태백산맥』을 이적 성향이 철철 흘러넘치는 소설이라고 몰아가 조정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준 매체였던 것이다. 조정래와 그의 소설 『태백산맥』을 아끼고 사랑하는 조정래의 팬으로서 그런 매체와 인터뷰를 가진 모습을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현재(2000년 7월-편집자) 『한강』은 『한겨레』에 계속 연재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두 권 분량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조정래가 계획한 10권짜리 책으로 묶여 나오기 위해서는 좀더 기다려야 한다. 조정래는 『한강』 집필을 위해 담배도 끊고 글쓰기에만 매진하고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문학

조정래는 두 편의 대하소설로 자신의 문학관을 실천했다. 분단과 소외계층, 그리고 그렇게 도출된 민족이란 개념. 그는 자신이 실천하고자 했던 주제들을 두 편의 소설에 올올이 형상화시켰고 그로 인해 또 하나의 개념을 이끌어 내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다.

조정래가 그의 소설을 통해 이끌어낸 인간이란 개념은 단순히 분단과 민족, 소외계층에 시선을 던지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밝힌 조정래의 문학관에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고 문학이 인간에 기여해야 한다는 조정래의 생각에 맞닿아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문학도 바로 그것에 기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나의 글쓰기는 바로 그런 정신에 뿌리를 대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정신에 바탕을 두고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새삼스레 부여했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얻어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조정래는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서 빨치산도 인간이었다는 것을 그려냈던 것이다. 『태백산맥』 집필 도중 전화를 걸어온 늙은 목소리의 독자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조정래와 소설 『태백산맥』이 이룩한 성과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웅변해주는 사례일 것이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같은 것들을 사람 대접해 주시니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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Ω조정래, <구만리장천 떠돈 한의 모닥불>,동아일보 출판부 편,『나의 길 나의 삶』(동아일보사,   1991), 283,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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Ω조정래, <14년 동안>, 『실천문학』, 1999년 겨울호, 91~92쪽.

Ω최재봉, <‘태백산맥’ 문단 최고봉>, 『한겨레』, 1997년 3월 4일, 11면.

Ω황광수 엮음, 『땅과 사람의 역사』(실천문학사, 1996), 355, 361, 366쪽.

Ω황광수, <두 벌의 시나리오와 두 통의 유서>, 강준만 외 지음, 『레드 콤플렉스』(삼인, 1997),   236∼237, 247, 250, 252쪽.

 
* 본문은 『시사인물사전 8: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가』(인물과사상사, 2000년 8월)에 발표된 것으로 웹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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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4/01 [02:5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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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길 2005/04/01 [12:03] 수정 | 삭제
  • 난 민족주의자도 아닌데 왜 민족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는건지 이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