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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본부 폐지만이 능사는 아니다
제왕적 재벌 세습체계는 폐지하고 조정기능은 살려야ba.info/css.html'>
 
민경진   기사입력  2003/01/08 [16:01]
{IMAGE1_LEFT}남들이 말하는 기준에 맞추어 보면 필자의 이념적 위치는 중도에서 약간 좌파로 기운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스스로 이념적 위치를 별로 고민해 본 적은 없다. 유일한 판단기준이 있다면 과연 이것이 쓸모가 있느냐는 것이다. 시장경제파든 분배우선파든 당시의 현실에서 무엇이 최대의 공익과 효용을 창출하는지는 염두에 두지 않고 스스로의 공허한 논리적 완결성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을 필자는 가장 싫어한다. 재벌정책에 대한 필자의 생각도 이런 접근에서 나왔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정권인수위 측에서 아마 몇몇 유수 재벌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규제 정책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보수계층에서 동요가 있는 것 같다. 그 중 핵심 논란거리인 구조조정본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존속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최근 산업의 흐름을 보면 정보화로 인해 Commoditization(이 용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Commoditize everything이란 필자의 글을 참조하기 바람)이 심해지면서 각 업종마다 독특한 노하우로 여겨왔던 것들이 급속하게 평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제조업에서 이런 경향이 심하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경우 ‘X-박스’를 출시하면서 자체공장을 두지 않고 플렉스트로닉스라는 외주전문업체에 생산을 위탁했다. 전자제품 제조업은 그 자체로서 더 이상 경쟁우위를 가지지 못하고 단순한 제조전문 서비스업으로 점차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Commoditization이 산업전반에 미치는 영향 중 가장 주목할 것은 업종간 장벽이 흐릿해 지면서 기존의 산업분류가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무수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제조기능 중심으로 나뉘던 산업구분은 점차 용도 폐기되고 소비자의 효용이라는 기준에 맞추어 이 업종들이 분주하게 헤쳐모여를 반복하고 있다.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이런 현상을 명쾌하게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앞으로 은행의 경쟁자는 다른 금융기관이 아니라 이동통신회사나 인터넷 포털이 될 확률이 훨씬 높다고 말한바 있다. 소비자의 금융수요를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만족시켜줄 수 만 있다면 그것이 은행이든 이동통신회사 든 상관없다는 뜻이다. 결국 기업은 자기논리를 소비자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의 요구에 맞추어 기존의 업종들이 재편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수많은 이 업종을 그룹 산하에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재벌들이 의외로 덕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간의 익숙한 논리로는 문어발 식으로 이 업종 저 업종에 손을 대면서 덩치를 키워 온 재벌들이 지탄의 대상이었지만 이런 다각화된 업종양태가 오히려 미래의 생존력을 더 키워주는 든든한 경쟁우위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미래의 산업 양태가 어지러울 정도의 속도로 재편되면서 도대체 어떤 그림이 나올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따라서 재벌의 다양한 업종을 상호조정하고 최적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조정본부의 존재가 새삼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현재와 같이 뚜렷한 법적 근거가 없이 재벌 일가의 친위대 역할만 하는 구조조정본부라면 당연히 사양이다. 어디까지나 기업의 경쟁우위 논리에 의거한 조정기능만을 수행해야 할 것이고 그 경우에도 지주회사(Holding company) 같은 합법적 기구를 통해야 할 것이다.

{IMAGE2_RIGHT}물론 필자가 재벌의 부도덕한 행태를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똑똑한 인재를 모두 제치고 굳이 회장의 자제만이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 최고경영자가 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겨우 몇 % 에 불과한 지분만으로 방계회사를 씨줄날줄로 엮어 사실상의 초법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재벌 세습체계는 당연히 척결 대상이다.

재벌 오너가 사실상의 최고의사결정권자 노릇을 하면서 그룹 전체를 지배하려는 것은 수평적 네트워크 조직과 의사결정권한의 이양이라는 미래산업의 트렌드와도 어긋난다. 한 명의 똑똑한 CEO가 얼마나 현명한 의사결정을 내리느냐가 아니라 말단 조직이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얼마나 자율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느냐가 경쟁력 있는 조직의 나아갈 길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당선자가 누차 자랑한 것처럼 굳이 최고결정권자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하부조직이 스스로의 판단력으로 결정을 내려 일하고 결재가 필요한 경우에도 두세 단계에서 끝이 나는 기민한 선거조직이 지난 대선의 커다란 승인 중 하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계열사의 의사결정마저 재벌 오너의 재가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조직이라면 그 기업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외부로부터의 수술은 불가피할 것이다. 일부 재벌은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재벌 오너가 책임부담을 지고 커다란 투자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지금처럼 발전이 있을 수 있었다는 반론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대우처럼 오너의 독단적인 오판으로 그룹 전체가 망조가 든 경우도 부지기수다. 결국 성공률 50:50이라면 설득력 있는 논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소수의 독단적 결정을 적절히 견제하는 이사회의 구조가 기업의 안정적인 성장을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것이 합리적인 리스크 매니지먼트이다.

정리하자면 급변하는 산업환경에 맞추어 그룹전체의 통합조정기능은 존속 강화하되 재벌 일가의 독단적 세습경영은 견제하는 재벌정책이 바람직 할 것이다.

jean

* 필자는 [테크노 폴리틱스](시와사회, 2002)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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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1/08 [16:0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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