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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훼손당할 '명예'가 있는가
한겨레기자에게 소송거는 조선일보의 유치한 저널리즘을 비판한다ba.info/css
 
이승훈   기사입력  2002/08/12 [19:40]
언론의 공기능과 언론자유보장의 확대가 의미하는 것

{IMAGE1_LEFT}요즘 한겨레만큼 거액의 명예훼손 송사에 잘 휘말리는 언론사가 없다. 지난 8월 1일 한겨레의 고명섭기자와 안수찬기자가 조선일보로부터 명예훼손을 이유로 4억이라는 거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받았다. 이번 조선일보의 제소는 올해 1월에 '조선일보민간법정'을 한겨레 고명섭기자와 안수찬기자가 기사로 다룬 것을 조선일보가 반년이 지난 후에 와서 편파허위보도임을 이유로 명예훼손이라고 트집을 잡은 것이다. 이에 대해 날마다 새 정보를 편집하는 신문의 성격에 비추어볼 때 조선일보사의 뒤늦은 소송은 한겨레 미디어면이 조선일보 지면을 비평하고 있는 데 대한 ‘재갈 물리기’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다소 감정적 판단인 그 재갈물기기라는 실체를 증명하기 어렵고 또 명예훼손이라는 소송의 승패여부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 대신에 이 사건에 산재해있는 결정적인 쟁점과 논점들의 실체를 분석해서 조선일보 주장의 논거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

[관련기사] 조선일보의 한겨레 소송 기사 모음
[참고기사] 이승훈, 언론은 이회창의 이름에 먹칠했는가? (1)(2), 대자보 86,87호

필자가 언론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지난 한나라당-정경희씨 송사에서 신문에 올라온 언론학자들의 논평을 볼 때 가장 중요한 논점인 '언론소송의 냉각효과'를 놓치고 있음을 보면서 언론학자들이 민주적참여저널리즘에 대한 이해가 낮음을 보아왔다. 또한 이 사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헌법학에서는 현재 언론자유와 관해서는 구시대적인 이론에 머물고 있음이 한국 현실이다. 아마도 헌법학과 언론학사이의 학제적인 연구가 잘 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앞으로도 큰 문제다. 학설은 실제 재판에서 법관의 판단의 근거로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 언론학자들과 법학자들의 시대에 뒤떨어져 현실에 부응하지 못하는 학문연구 현실을 보면서 이번 송사의 위태함을 느끼고 있기에 만에 하나인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다행히도 학계와는 달리 현재 우리 나라의 판례를 보면 법원과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직관력 강한 통찰 덕택에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면서 언론자유에 대해서 꽤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판결을 보여주고 있다.

저널리즘과 언론기관의 자유에 관한 법제도와 판례등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분석할 때 언론자유의 보장은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지표가 있겠지만 특히나 이번 사건과 관련된 것들로서 언론사의 취재원묵비권·증언거부권, 언론사의 허위보도와 명예훼손에 관한 법제도와 판례의 태도이다. 헌법학자들은 현재 취재원 묵비권은 국내외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상황에 따라 비교형량하여 취재원묵비권을 인정하고 있다. 허위보도와 명예훼손에 관해서는 과거에는 언론기본법 같은 법들이 진실의무를 강조하며 언론의 재갈을 물렸지만 현재는 공적 토론과 검증을 위한 목적으로 한 비의도적 허위보도는 용납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두고 볼 때 조선일보에 의해 허위보도라고 문제가 제기된 <한겨레>의 '조선일보민간법정'보도가 어떻게 평가되야 할지는 명백하다. 법원이 이번 조선일보의 제소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예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한겨레의 보도가 허위보도인지 아닌지를 나중에 다시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설사 허위보도라 해도, 즉 공적 관련성이 있고 충분한 근거가 있는 상태에서의 보도가 결과적으로 설사 허위보도가 된 경우라도 그 허위보도를 관용하는 것이 현대사회이다. 당연히 명예훼손으로 될 가능성도 그만큼 같이 줄어든다.

언론자유의 보장수준을 높이는 법제도의 변화, 판례의 형성은 국가 사회가 언론의 공기능을 인식하고 그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이다. 오늘날처럼 언론의 공기능과 그 작용이 이토록 확대됨에 따라 언론은 권력작용의 주체로까지 나서게 된다. 이때 권력기관의 작용을 분석하는 현대적 관점으로서 형식적인 고전적 국가권력기관(정부, 국회, 법원)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본권보장과 권력통제, 사회통합기능을 발휘하는 실체(언론, 정당, 시민사회단체, 여론 등등)나 시스템(연방제국가의 연방-주, 중앙정부-지방자치정부, 여당-야당 등의 대립시스템 등등)이 있다면 그 실체나 시스템의 권력작용에도 주목하는 관점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라는 고전적 3개 권부에 추가하여 '제 4권부로서의 언론'이 나서게 되는 것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생긴다. 현대국가에서 정당이 고전적 권력기관 내부로 침투해서 사실상의 권력행사와 통제의 주체, 객체로 대두되었듯이 언론은 고전적 권력기관 외부에서 여론형성을 통해서 사실상의 권력행사와 통제의 주체, 객체로 되는 것이다. 언론의 공기능과 언론자유보장의 확대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통제하고 통제받아야 할 권력으로서의 언론이다.

통제하고 통제받아야 할 권력으로서의 언론

모든 권력주체가 그렇듯이 언론 역시 권력작용의 주체로 언론은 스스로 통제받아야 할 필요가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이 때 고전적 권력기관들은 서로를 통제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있지만 -사실은 고유의 기능만 보장하고 그 외의 기능은 서로 섞여서 발휘되기 때문에 새로운 권력통제시스템을 개발할 요구가 생겨났는데. 이 요구에 의해 생겨난 이론이 기능적 권력통제론이고 삼권분립론등 고전적 권력분립론을 대체 혹은 보완하고 있다.- 그러한 기존의 고전적 권력기관들이 기능적 권력기관인 언론을 통제하기란 참으로 곤란하다. 과거에는 언론탄압을 함부로 자행했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언론의 공기능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현대에는 오히려 비대해진 언론권력이 문제가 될 정도이다. 그렇다면, 언론의 힘은 자꾸만 커지는데도 다른 권력기관들이 언론을 통제하기 어렵다면 과연 누가 언론을 통제해야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언론이 언론을 통제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현대적 기능적 권력통제이론에 부합하는 선진국들의 일반적인 언론시스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한겨레의 조선일보에 대한 미디어 비평의 노력은 시대적 정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언론참여대중들의 안티조선일보운동은 시대적인 요청에 따른 당연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과거를 반성하고 민주와 통일에 앞장서는 새로운 신문으로 거듭 태어난 후라도 안티조선일보운동은 -모습이 좀 바뀌겠지만- 계속되어야한다. 왜냐고? 정부가 일을 잘해도 항상 권력통제를 받고 일을 잘 못해도 항상 권력통제를 받는 걸 생각해보라. 모든 권력에 대한 통제는 그 권력기관이 잘하건 못하건을 떠나서 항상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적 권력통제와 민주적참여저널리즘이라는 배경지식이 있다면 선진국들의 경우 언론사들의 상호 미디어비평등의 이유로 언론사들간의 싸움이 있을 때 법원등 국가기관이 관여하기를 꺼리는 것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 문제는 언론사끼리 서로 알아서 싸우고 말고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언론사들끼리 싸우게 함으로서 서로 미디어비평의 수준을 높이고 종국적으로는 기능적 권력기관으로서의 언론에 대한 언론의 통제효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태도 역시 이러한 선진국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최근 <문화방송>이 <월간조선>을 상대로 낸 ‘출판물 발행·판매·배포 금지 가처분신청’에서 서울지법이 “언론기관 상호 간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고 하면서 기각을 한 판례가 그 실례이다. 법원이나 국가기관들은 상관하지 않겠다면서 오히려 언론사들끼리 더 격렬하게 서로 치고 받고 싸우라고 주문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게 공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언론자유보장과 기능적 권력으로서의 언론권력통제의 상호관계가 이렇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번에 조선일보가 한겨레에 제기한 소송이 어떤식으로 판단되어져야하고 또 법원은 어떻게 판단하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이해 못하고 기능적 권력통제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민주적참여저널리즘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안티조선운동'을 언론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했던 연세대의 모교수는 시대와 역사에 대한 통찰력이 전혀 없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시대적 정당성이 인정되는 한겨레의 미디어비평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송이나 하고있는 조선일보의 구시대적 언론관은 참으로 문제라고 하겠다. 안티 당하는 조선일보는 조선일보 자신도 안티한겨레운동하면서 미디어비평을 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시장 점유율 1위로 최고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언론사 조선일보이다. 그래서 서로 논박할 때 여론형성을 더 쉽게할 수 있는 조선일보가 유리한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뭐가 두려운가? 한겨레의 주장에 대해서 제대로 논박해보길 바란다. 그게 언론사로서 해야할 일이다.

반대의견 언급해주기와 허위보도 명예훼손죄와의 관계

조선일보가 소장에서 주장하는 것의 핵심은 한겨레의 기사가 허위보도라는 것이다. 그밖에 원색적인 제목을 붙이고 욕설을 여과없이 그대로 인용보도 했다고 불평하는 것은 단지 불평일 뿐, 그것은 이번 사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겨레의 기사가 허위보도가 아니면 명예훼손도 성립하지 않고 이번 소송은 조선일보가 지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허위보도라고 해도 조선일보가 지게되어 있는 소송이다. 즉 공적 관련성이 있고 충분한 근거가 있는 상태에서의 보도가 결과적으로 설사 허위보도가 된 경우라도 그 허위보도를 관용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언론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겨레의 '조선일보민간법정'관련 기사가 허위보도인지를 따질 필요가 그다지 없지만 그래도 조선일보가 너무나 유치한 불평을 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따져보겠다.

그럼 이 사건에서 조선일보가 허위보도라고 주장하게 된 까닭을 다시 알아보면 다양한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일부의 의견을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그 일부의 의견만을 보도했기에 허위보도라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반대의견 언급해주기와 허위보도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반대의견 언급해주기를 일러서 기자들 사이에서는 보통 '반대멘트따기' 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멘트는 comment, 혹은 mention을 약칭한 것이다. 반대의견 언급해주기는 사실 기사쓰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일단 자기의 말이 아닌 타인의 말을 언급하는 것 그 자체에서 주관적인 글에서 객관적인 글로 성격이 바뀐다. 기사의 객관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다시 타인들의 말 중에서도 어떤 일방의 의견과 그 상대방의 반대의견이 있을 때 반대의견을 언급해줌으로써 기사를 읽는 사람에게 더 신뢰감을 줄 수 있다. 이렇게 교차확인해서 반대의견을 언급해주면 기사가 훨씬 더 객관성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반대의견을 언급해주면 당연히 허위보도의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허위보도가 아니라면 명예훼손죄 같은 복잡한 문제에서 벗어나는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사적인 사항에서는 진실의 보도이더라도 명예훼손죄가 성립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반대의견 언급해주기가 필요한 정도는 논설·칼럼의 경우, 사설의 경우, 박스기사의 경우, 스트레이트기사의 경우 등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반대의견 언급해주기가 기사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반대의견이 언급되어있지 않은 기사에 대해서 편집장이 책임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편집장은 그 기사를 그대로 올릴 때도 있다. 그리고 반대의견 언급해주기와 허위보도와의 상관관계(조선일보가 소장에서 주장하고 있는 요지)를 알아보면 반대의견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허위보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의견 언급을 하지 않으면 단지 표본에 의한 오류가 발생활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그것이 곧바로 허위보도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IMAGE2_RIGHT}따라서 이번 한겨레의 '조선일보민간법정'에 관한 기사가 반대의견이 언급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허위보도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조선일보가 한겨레에 반론권을 행사해서 한겨레에 기사를 올리던가 아니면 자사의 신문에 반대의견을 내면 된다. 그렇게 되면 의견과 반대의견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이 싸움은 시장점유율에서 월등한 조선일보가 한겨레보다 훨씬 유리하다. 조선일보가 이런 어정쩡한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즉 여기에 더 나아가서 의견과 반대의견 사이의 진위를 가리고 싶으면 조선일보는 각 의견 속에 들어있는 논거를 포착해서 논증을 하면 된다. 그것이 올바른 언론기관의 기본자세이자 언론기관의 권리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러한 언론기관의 기본자세에 벗어나고 스스로 언론기관으로서의 권리를 팽개치고 소송이나 하는 유치함을 보이고 있다. 앞서 선진국들의 경우와 우리 나라의 최근판례에서 소개했듯이 현대국가에서 사법부등 국가기관은 언론사간의 미디어비평등으로 인한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겨레의 '조선일보민간법정'에 관한 기사는 미디어비평의 일환이기 때문에 사법부가 허위보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않고 기각해버린다는 것을 조선일보가 이해하기를 바란다. 민주적참여저널리즘의 시대에서는 이런 미디어비평이 언론사 상호간, 그리고 언론참여대중까지 참가한 3면 구조상에서 활발하게 행해지는 것이 공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 문제에 설상(雪上)하여, 사법부가 이번 사건을 기각하지 않고 판단한다고 해도, 그리고 여기에 가상(加霜)하여 한겨레의 보도가 허위보도라고 사법부가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명예훼손죄를 물으리라는 것은 회의적이다. 여러번 말했듯이 공익에 관련된 사항에서 의혹에 대해 충분한 근거가 있다면 토론과 검증을 위한 언론활동은 공익을 신장시키기 때문에 사실여부가 아직 불명확할 때도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이 우리 나라 헌법재판소의 태도이다. 현재는 폐지된, 예전의 언론기본법(제 9조, 제 49조)시절처럼 언론기관의 진실보도의무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일보가 알아주길 바란다. 안티조선은 조선일보가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 의무다. 지금의 안티조선일보운동은 민주적참여저널리즘의 시대에, 기능적권력통제관점이 일반화된 시대에서는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는 엄살떨지말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미디어비평을 위한 기사에서 반대의견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허위보도이며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선일보의 논리실력이 형편없으며 조선일보의 저널리즘이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언론관이 형편없이 유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공익기관으로서, 현대적 기능적 권력기관으로서의 언론의 자세를 가지길 바란다. 조선일보 그대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다. 언제까지 닭장 속에서 닭짓만 하고 있을 것인가? 천길 아래를 조망하는 독수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라. / 논설위원

*사진 : 한겨레신문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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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8/12 [19: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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