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라크에만 있나 노무현 정권의 전격적인 파병으로 전쟁과 살육은 더 이상 이 땅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돼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이전에도 남의 나라만의 일인 적은 없었다. 집밖에만 나가면 살벌한 전쟁터인 이 나라의 여성들에게 ‘이라크’는 처음부터 몸으로 느끼는 현실이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 사건과, 여성 정치인에 대한 패러디는 이 전쟁의 생생한 증언자들이다. 희대의 여성 대상 범죄를 다루면서 미디어들이 여성에게 한 일은 살 떨리는 ‘충격과 공포’를 심어준 것 외에는 없었다. 살인범의 어처구니없는 여성 혐오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언론은 내게 범인 못지않게 혐오스러웠다.
누군가로부터 이유 없는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건 두렵기 그지없는 일이다. 범죄를 당하지 않으려면 집에 틀어 박혀 있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피해를 입지 않은 여성들은 언제 자신이 비슷한 범죄에 노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떨고, 비명에 간 피해자들은 넋을 위로 받지도 못한다.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 언론이 피해자 중에 유흥업소에 나가지 않는 ‘일반’ 여성이 있나 없나 캐는 것은 얼마나 천박하고 상스러운가. 어느 신문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여성들도 반성해야 한다는 살기등등한 글이 버젓이 논객의 이름으로 올라와 있다. 겉으로는 범죄에 경악을 느끼는 척하지만 내심 사건을 즐기고 피해자들을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이들은 여성 경멸이라는 점에서만큼은 가해자와 감수성이 통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자들이 죽은 듯이 수그리고 있는 세상이라면 여성 혐오는 굳이 고개를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꿈틀거리는 기척만으로도 위협을 느끼는 자들이 세상에는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세상에서 약자들은 지은 죄도 없이 돌을 맞는 처지에 놓인다.
드물게 남들이 무시못할 힘을 가진 여성의 처지는 증오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다수의 힘없는 여자들과는 처지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라고 해서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성으로 태어난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평판으로 사는 여성 정치인들의 경우 꼬투리만 잡히면 언제든 만인의 웃음거리로 떨어질 위기에 놓인다.
최근 한 야당의 여성 대표는 당의 행보에 분노를 느낀 어떤 네티즌에 의해 성적 패러디 대상으로 전락했다. 속옷만 입혀진 여자 사진에 정당 대표의 얼굴이 박힌 것을 보고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킬킬거린다. 문제의 패러디 제작자가 노린 것이 이 지점이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성적인 모멸을 당하는 처지로 떨어지는 데서 패러디의 효과를 계산한 것이다.
이유 없는 적대의식 사라져야 여성을 공격하는 데 성이 곧잘 동원되는 것은 여성의 수치심을 일으켜 무력하게 하는 데 효과 만점이기 때문이다. 성이 여성에게 금기로 통하는 세상에서 성적인 것은 언제든 여성을 괴롭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남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약점을 건드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성적 패러디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방패막이에 곧잘 숨음으로써 여성 정치인에 대한 성적 비하의 근절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정치적 행적이 논란을 일으킬만한 여성들은 예외 없이 이런 식의 성적 모욕을 통과의례처럼 겪었다.
여성 혐오 범죄와 여성 정치인 패러디 모두 집밖을 나선 여성들이 피해자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여성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 의식이 밑바탕에 도사리고 있는 점도 동일하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끔찍한 일을 당할 때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지위에 있는 여성들은 대중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했다.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는 누군가의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불황일수록 자신들과 경쟁하려는 여성에게 느끼는 남성들의 경계심은 커지며, 가정에 머물지 않는 여성은 냉소를 당하기 쉬워진다.
집밖을 나가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이 사회는 여성들에게 총성 없는 전쟁터다. 그러나 여자들이 집에서 나오지 않거나 자신들의 보조 업무로 만족하길 바라는 남성들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은 이미 지났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 본문은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 경남도민일보
http://www.dominilbo.co.kr/ 8월 9일자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