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력은 구호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정치적 이념이나 목적을 단순화하여 전달함으로써 일체감을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면서 그 구호도 영어로 바뀌나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즐겨 쓰는 영어단어가 등장한다. 더러는 생소하다 못해 당혹감마저 준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하면서 '올인'(all-in)이라는 말을 연발하더니 요즈음은 뜸하다. 권력자들이 너나없이 '올인', '올인'하더니 언론보도에도 온통 '올인'을 합창하는 소리로 가득 찼었다. 전력투구한다는 뜻으로 짐작되기는 한다. 이 말은 노름판에서 막판에 모든 밑천을 털어서 한판 승부를 건다 뜻이다. 왜 이런 영어단어를 즐기는지 모를 일이다. 노무현 정부는 툭하면 '로드 맵'(road map)이라는 영어단어를 썼다. 도로지도처럼 갈 길을 나타낸다는 의미로 쓰는 것 같다. 왜 청사진이나 장기계획이라는 말로 표현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을 맡다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 뜻을 모르는 국민을 헤아렸으면 싶다. 요즈음은 학자출신의 고위직 공무원들이 '클러스터'(cluster)란 말을 자주 쓴다. '지역농업 클러스터'니 '산업 클러스터'니 하면서 말이다. 'cluster'는 과실 따위의 송이, 덩어리를 나타내니 다기능이 모인 단지가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산-학-연이 연계된 복합단지란 의미일 것이다. '농업복합단지'나 첨단복합단지'라고 말하면 권위가 떨어지는지 묻고 싶다. 이명박 체제의 서울시는 영어로 서울을 치장하고 있다. 곳곳에 '하이 서울'(Hi Seoul)이라는 구호가 나부낀다. '하이'는 인사말 말고도 높다는 뜻과 함께 취했다는 뜻도 있다. '하이' 다음에 쉼표(,)가 없는 것을 보면 외국인이 서울에 도착해서 반갑다고 하는 인사말이 아닌 것 같다. 서울이 고산지대에 있는 것도 아닌데, 또 마약을 먹고 취한 것도 아니데 왜 '하이 서울'인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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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국제도시를 만든다면서 만든 버스 새 디자인 ©이대로 | 지금 서울에는 버스들이 G, B, R, Y이니 하는 커다란 알파벳을 달고 달린다. 그것은 버스의 색깔을 나타내는 영어단어의 첫 글자라고 한다. 또 그 색깔은 버스노선의 종류를 나타낸다고 한다. 많은 시민들이 그 뜻을 몰라 당황하고 있다. 외국인인들 알 리 없다. 우리말로 노선의 종류를 나타내서 시민들이 쉽게 알도록 하면 왜 안 되는지 항변하고 싶다. '워크아웃'(work-out)과 '빅딜'(big deal)은 김대중 정부의 전매특허 같은 영어단어다. 김대중 정부는 이 단어들이 마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묘수나 되는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 막상 외국언론들은 그 뜻을 몰라 당황했다. 살 빼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체중조정을 위한 운동을 워크아웃이라고 표현하고 그것을 감량경영에 빗대서 쓰기도 한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도산위기에 몰린 기업을 회생시키는 특별한 제도처럼 떠들었다. 빅딜은 더 우습다. 이 말은 대단하다는 뜻의 반어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연일 '빅딜'이라고 외치면서 산업구조 조정을 위한 기업교환이라는 의미로 썼다. 정부가 민간영역에 개입해서 사업영역을 조정한다는 것부터 잘못된 발상이었다. 어쨌든 외국언론은 본래의 뜻을 찾아 business swap(사업교환)이라고 고쳐 썼다. 이 무슨 망신인가? 교통-통신기술의 발달로 세계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지구촌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영어가 세계공용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아무리 세계화라고 하지만 정권이 뜻도 모르는 영어를 함부로 써서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어도 좋은지 반문하기 바란다. 또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쓰는 언론도 반성해야 한다. /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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