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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과 교육의 질
교육적 상상력의 열림을 향해
 
이순철   기사입력  2002/07/20 [03:22]
1. 사회문화적 현상으로서 2002년 6월 거리의 ‘붉은 물결’
  

2002년 6월은 1987년 6월을 연상시킨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의 6.10을 생각나게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2002년 6월의 현상은 ‘월드컵’을 원인으로 촉발되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거리를 가득 메운 2002년 6월의 ‘붉은 물결’은 정치현상이 아니다.

1920년대의 6.10항쟁이 제국주의 극복과 민족주권 회복의 ‘정치운동’이었다면, 1987년 6월투쟁은 군부독재 극복과 민주화를 중심으로, 한국현대사에 누적된 미완의 과제를 해결하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는 가깝게는 1980년의 광주항쟁에 직접적 연원을 둔 운동이었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보다 근대적인 정치구조를 확보하는 듯 보였다. 강고한 ‘성채’로 여겨졌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가 무너져 내렸다.  머리 길다고 거리에서 경찰이 가위질하던 시대, 정치와 사회문화 영역에서 ‘일상적 삶’까지 규정했던 ‘전일적 독재’가 끝났다. 그 끔찍한 기억 ! ‘민주주의’는 시대적인 대세처럼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진 것이다.

그 절정은 1997년의 정권교체에서 이루어졌다. 민간정부가 들어선 데 이어 ‘정권교체’까지 ! 민주주의의 민족자주성 회복의 지평이 한꺼번에 열리는 듯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권교체로 들어선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임기 말에 가까워 갈수록 평범한 국민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노동자들에게 남은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치를 떠는 증오’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정권교체’를 포함하여 민간정부 10년 간은 이른 바 ‘거대담론’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채, 후일담과 ‘포스트 모던’ 담론이 융성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라는 의문이 제기되는 순간부터, 다시 ‘거대담론’은 복원될 수밖에 없었다. 거대담론. 쉽게 얘기해서, 구체적 일상적 ‘삶’의 부대낌이 오히려 심화되면서, 집단적 전망을 새롭게 설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1987년 투쟁의 의미를 다시금 돌이켜보도록 한다. 군사독재정부는 무너지고, 91년 5월투쟁까지 진행되면서, ‘민주화’는 되돌릴 수 없는 추세로 정착해 가는 듯 했다. 여기에 39만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나마 ‘역사적인 정권교체’의 위업까지 달성했다. 하지만 1997년의 가혹한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노동자와 민중운동 진영이 ‘발견’한 것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였다. 이는 1987년을 다시금 되새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되새김 분석은 이제 어느 만큼 ‘축적’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듯 ‘거대담론’이 복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6월과 2002년 6월은 쉽사리 연결되고 있지 못하다. 앞에서 논술했듯, 필자는 우선 2002년 6월의 ‘붉은 함성’ 물결이 ‘사회문화현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범주를 제한할 경우의 이점은, 여기에 대한 과도한 해석이나, 지나친 반응을 모두 지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월드컵’과 관련된 피파나 한국자본, 그리고 국가주의 수구세력의 의도를 중심에 놓은 ‘부정적 해석’과, 이를 제쳐놓고 ‘거리의 현상’만에 주목하여 과도하게 고무적 해석을 낳는 시각을 모두 벗어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 정치적 민주화의 결과로서 2002년 6월  
  
거리응원 현상에 대하여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공통점은 ‘정치적 민주화’가 어느 만큼 정착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자발성의 고양’이 가능했다는 인식이다. 특히 ‘붉은색’이 본래의 색채지위를 복원하게 된 것조차 ‘민주화’ 없이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독재가 국민의 ‘사생활’가지 규정하던 시기에는 ‘문화적 감수성’조차 독재의 감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5.16광장과 전국체육대회의 ‘카드섹션’과 매스게임으로 상징되는 강요된 동원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독재’시기를 살아온 40대 이상의 세대에게 1987년 6월만큼이나 2002년 6월이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했다하나 한계도 여실하다.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법제도와 정치적 요구를 반영할 정치적 ‘통로’가 제도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 현단계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이다. 노동조합의 선거참여가 확보되고, 정당명부비례대표제의 도입으로 부분적으로 통로가 열려가고는 있다. 하지만 이를테면 ‘전교조’는 노동조합이며 민주노총 소속의 ‘산별노조’임에도, 민주노총은 할 수 있는 ‘정치활동’을 전교조는 할 수 없는 ‘모순’이 잔존해 있다. 대학교수는 교육위원을 포함한 ‘선출직’을 겸임할 수 있으나, ‘초중고 교사’는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전근대성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의 한 측면이다. 공무원의 노동3권과 정치활동 금지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이렇게 본다면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정착하지 못했다는 평가까지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차적 민주주의 진전 결과로서, ‘노동자’ 문제는 적어도 ‘사회적 의제화’는 이룩되고 있다. 노동조합의 결성과 활동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과정’에서의 ‘의제설정’과 정책을 통한 ‘해결’의 경로에는 전혀 못 미치고 있다. 각종 선출직에의 진출을 포함한 의미있는 ‘정치세력화’의 과제를 남겨 놓고 있다. 요컨대 최소한 ‘조직 노동자’의 문제는 이제 사회적 의제수준을 넘어 막 제도정치영역까지 ‘정치의제화’로 상승하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며, 그만큼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가 정치 의제화 단계에 이를 정도로 진전된 것이다.  

하지만 여자와 10대,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문제는 이제 겨우 ‘사회적 의제’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 여기에 1997년의 경제위기 속에 탄생한 ‘비정규직 노동자군’의 문제가 있는데, 이들도 이제는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는 조직 노동자에 대비해 ‘사회적 약자’로 떠올라 있지만, 아직은 ‘사회적 의제화’ 수준조차 불충분한 실정이다.  

요컨데 1997년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전면화된 한국적 ‘신자유주의’는, ‘약육강식’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면서 ‘개인주의’를 넘어서 극단적 이기주의를 부추겨 왔으며 그 결과 사회문화적 ‘심급’에서는 오히려 ‘반민주주의’ 경향조차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1978년 6월투쟁은 ‘정치영역’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머물렀을 뿐, 사회민주화의 확대로 진전되지 못한 한계가 뚜렷한 것이다.  

민간정부의 8년 동안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대는 역으로 사회문화의 심급에서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보수성을 드러내는 계기였다. 그 핵심은 청산되지 못한 전근대성의 잔재로서 남은 수직적 위계적 ‘관계’의 문화이다. 군,관,민이 ‘민,관,군’으로 바뀌었지만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잔존하는 질기디 질긴 ‘보수성’은 진보적인 노동운동 내에서조차 뿌리깊게 잔존하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특별히 10대와 여성에 대하여 그러했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새로운 현상이다.    

여성, 10대, 외국인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의 증대라는 측면에서의 사회문화적 심급의 ‘민주화’는 여전히 지체되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월드컵 현상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 관점에서 볼 경우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의 소외와 착취는 부정적인 측면의 ‘민족의식’까지 맞물려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를 산출하고 있다. 여자와 10대들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치적 민주화의 결과로서 탄생한 권리의식을 갖춘 여자들과 10대 학생들은 2002년 6월의 ‘전사’를 이미 마련하고 있었다.    
  
3. 2002년 6월의 전사 - 2000년의 10대, 여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향한 진출

2002년 6월, ‘거리의 주력’은 10대와 여자들이었다. 이들의 ‘진출’은 앞에서 논술한 ‘사회문화적 심급’에서의 ‘민주주의 확대’가 지연된 현실과 연계된다. 요컨데 이들이 거리의 ‘주력’을 이루기까지 만만치 않은 저항을 딛고 나왔어야 했다는 뜻이다. 사회문화적 보수성의 성채를 뚫는 과정이 2002년 6월을 향한 10대와 여자들의 ‘전사’를 구성한다.  

거리응원을 불러일으킨 핵심부대로서의 ‘붉은 악마’ 현상은 1998년에 그 씨앗이 뿌려졌다. 하지만 씨앗을 뿌린 것만으로 2002년 6월은 불가능했다. 10대와 여자들이 붉은 악마들의 ‘감성에의 호소’에 적극 호응할 수 있었던 조건은 10대와 여자들의 ‘미시적 권력’ 딛고 넘어서기를 통해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극복해야 했던 ‘미시적 권력’의 중심은 단순하다. 어른들과 남자들. 공동의 표적은 ‘남자 어른들’. 10대 학생들에게는 어른의 대표로서 ‘교사들’이었다. 지금도 계속되는 그러한 흐름을 2000년의 사회적 의제에서 찾을 수 있다.  
2000년 한해는 ‘성담론’으로 표상되는 여성의 문제와 두발자유화로 요약되는 10대 학생들의 움직임이 할발했던 해였다. 구성애의 ‘아우성’에 이어서 금기시되던 주제들이 여자들이 주체가 되어 공공연히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의 성’이니 하는 프로그램들이 ‘침실’속의 문제를 ‘공중파’로 끄집어내어 널리 퍼뜨리고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이른 바 O양, 백양 비디오 등 ‘인터넷’을 타고 확산된 흐름이었다. 여기에 영화 ‘거짓말’과 ‘천국의 신화’ 음란물 판정 시비까지 있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장0, 주00의 성추행 사건 등등 ‘성담론’에 얽힌 사건이 많이 떠올랐던 한해였다. 물론 2000년 이전에는 ‘우조교 성희롱 사건’으로 대표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러한 흐름들은 ‘여자의 권리’로 모아져 나갔다. 그리하여 그 힘은 공중파 방속에서 ‘미스코리아 중계’를 몰아내는데 까지 이르렀다.

2002년 6월의 거리에 왜 여자들이 많이 나왔는가 한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유와 권리가 신장된 만큼, 은밀한 욕망 또한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그동안 미스코리아를 보면서 ‘공개적으로’ 욕망어린 시선을 보내 왔다면, 여자들이라 해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이 운동장을 힘차게 뛰는 모습에 욕망어린 시선을 보내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한가지 이유’일 뿐이다. 억눌림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권리의식의 충만함이 이들을 거리에 나오게 한 힘이었다.      
      
10대들의 ‘운동’ 또한 2000년 여름에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는 1998년에서 1999년까지 극심했던 이른바 ‘학교붕괴’가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10대들은 인터넷에서 ‘온라인 모임’을 만들고, 이를 활용하여 여름에서 가을까지 ‘두발자유화’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10대 학생들의 두발자유화 담론이 공중파 방송국의 ‘공개토론’ 프로그램에 올려질 정도로 ‘폭발’했었다. 10대들이 주체적으로 제기한 2000년의 두발자유화 논쟁은 어느 만큼 결실을 거둔 바 있다. 이후 2년여 경과한 현재, 어른들은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눈에 띄는 변화가 진행되었다. 거리의 여중고생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전에 ‘귀를 내놓는’ 정도로 짧은 머리를 강요받던 시기는 이제 가버린 것이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웬만한 학교의 여학생들은 모두 하고 다닌다. 가장 앞선 경우는 ‘파마,젤,염색’까지도 자유롭게 하는 정도에 이르러 있다. 바로 이 아이들이 2002년 6월에 대거 거리로 진출했던 것이다.    

왜 2000년 들어 여자와 10대들의 권리문제가 갑자기 ‘폭발’하는 양상을 보였을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 시기가 1997년의 경제위기를 극복한 ‘직후’라는 점이다. 2000년 4월에는 아이엠에프 대부자금을 모두 갚고, 이른 바 ‘아이엠에프 졸업’ 선언이 있었다. 두 번째로, 경제위기라는 ‘전국가적 어려움’을 벗고 나서, 본격적으로 ‘정권교체’에 의한 사회문화적 ‘기대감’이 폭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파시즘의 소멸에 뒤이어, 일상적, 억압적 권력이 도전받는 ‘당연한’ 순서가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나타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부의 ‘부추김’과 정책실패를 일단 제외하더라도, ‘학교붕괴’ 현상을 억압과 통제속의 10대들이 ‘어른들의 대표자’로서 교사들에 대해 ‘저항’을 증대시킨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 효과가 사회 문화적, 일상적 영역까지 파급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체로서의 권리의식을 갖춘 ‘개인’이 탄생하면서 일상속의 ‘파시즘의 유산’인 ‘미시적 권력’이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여자들에게 ‘미시적 권력’은 ‘남자’일 수밖에 없듯, 10대들에게는 ‘교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듯 ‘단순화’ 할 수 없는 복잡한 ‘층위’의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다. 2002년 들어 나타나는 양상은 양파껍질처럼 ‘접혀’ 있던 복잡한 층위의 문제들이 한꺼풀씩 벗겨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100인 위원회의 활동은 ‘진보’의 영역속에 ‘여자들’의 문제를 넣을 것을 강제하고 있다. 2000년에 만들어진 ‘여성부’의 영어명칭이 ‘Ministry of Gender Equality'인 것을 감안하면, 성평등에 대한 지향은 이제 보편화된 요구라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이는 ‘성평등’을 관행과 제도에서 확립하는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다. ‘여성할당제’는 성평등 제도화의 핵심이다. 그만큼 적어도 노동조합과 같은 진보적 단체의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자유와 권리신장 문제가 이렇듯 눈부시게 진전하고 있음에 반해, 10대 학생들은 원천적인 한계에 갇혀 있다. 여전히 어른들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학교는 여전히 ‘열려’ 있지 못하다. 특히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강고한 ‘보수주의’의 성채이다. 2002년 6월 학생들이 ‘거리의 주력’이 된 까닭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머리모양’ 포함 약간의 ‘사생활 자유’를 획득한 이 아이들, 이제 보다 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찾아 ‘억압된’ 에너지를 분출할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월드컵’은 최고의 ‘기회’였다. 왜냐하면 ‘국가’의 보호가 이미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에 1998년부터 ‘문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역시 강력한 문화적 보수주의 ‘붉은악마’가 앞장서서 뚫어냈다. 현 10대나 20대의 ‘감성’과 전혀 거리가 먼 일부 ‘어른들’의 ‘백의 천사’가 되라는 압력을 그들은 물리쳤다. 그리하여 10대 학생들은 붉은 악마가 개척한 루트를 따라, 국가의 보호속에 거리에 진출할 수 있었다.      

3. 아이들은 거리에서 무엇을 체험했는가

그들은 거리에서 ‘놀았다’. 아주 즐겁게 놀았을 뿐이다. 놀면서 ‘평생’ 마음에 아로새겨질 엄청난 체험을 했다. 이는 80년 광주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체험이 평생 그들의 삶에 대한 ‘규정력’으로 남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렇다. 바로 이 때문에, 2002년 거리에서 10대와 여자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들었던 87년 6월투쟁의 세대들은 그때 그 시절의 ‘체험’을 반추하고 또 반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놀고 싶은 생각에 가득 차 ‘거리’로 나가기 위해 들썩거렸지만 일상적 학교운영은 전혀 문제가 안되었다. 아이들은 말하자면 ‘얌전히’ 뛰쳐나갈 기회를 엿보았다는 뜻이다. 거리에 나가서 ‘전혀 딴애’가 되는 바로 그 아이들이, 교실에서는 여전히 수업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광주의 어떤 초등학교의 경우는 ‘붉은 악마’ 티셔스를 한국의 경기가 있는 날 ‘입고 오도록’ 권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주에서 독일과의 경기가 있던 날에는 학급단위로 담임교사의 인솔 하에 거리응원을 ‘체험학습’하는 사례도 있었다. 중고생들의 경우는 한국이 16강에 진출하고 8강이나 4강 경기로 나아갈수록, ‘아침 일찍부터’ 광화문 일대로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한 학급에 1-2명 정도는 ‘가족과의 동반’이라는 ‘제한’과, ‘체험학습’이라는 그나마 열린 ‘제도적 숨통’을 창구삼아 ‘합법적으로’ 절차를 밟고 아침부터 학교가 아닌 ‘광화문’이나 강남역 일대로 ‘진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학교들은 학내 강당이나 체육관에 커다란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학생들이 ‘집단시청’하기도 했다. 심한 경우는, 1500명의 전교생에게 ‘응원’에 열심히 참여했다고 한명도 빠짐없이 ‘상’을 준 초등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월드컵’의 아이러니를 만나게 된다. 그야말로 국가주의를 내면화한 세대들에게도 거리응원은 당연시되고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코드에 따라 87년 6월세대가 우려하는 획일적 방식으로 그 행사에의 참여를 독려한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비밀’이 있었다. 월드컵 기간 내내 ‘응원’의 형식과 내용은 다름 아닌 ‘붉은악마’가 주도했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중계방송 직후 텔레비전에 비치는 사람들은 ‘나이에 무관’하게 붉은 티셔츠를 입고, 인터뷰의 끝말은 거의 대부분 ‘코리아 파이팅’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사회문화적 ‘보수성’의 성채인 하는 50-60대 노인들 조차도 똑같이 붉은 티셔츠에 태극문양을 얼굴에 새기고, 붉은색 두건을 두르고 ‘코리아 파이팅’을 외치면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는다고 자랑스럽게 나섰다는 사실이었다. 거의 대부분 붉은 악마 ‘아이들’의 행태에 혀를 끌끌 차거나 ‘붉은색’ 알레르기에 엄청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가운데, 일부 노인들이 그러했던 것일까 ?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던 듯 하다. 붉은색 티셔츠는 나이와 세대 남녀 구별없이 보편적으로 입었기 때문이었다. 50대와 60대도 마음놓고 붉은 티셔츠를 입은 것이다. 2002년 6월의 최대 비밀이었다. 붉은 악마 응원단이 자신의 이름과 색깔을 끝까지 고수했기에 얻어낸 성과였다. 어른들이 권하는 대로 ‘백의 천사’라는 감성적으로 맥빠진 이름을 택하는 ‘타율’의 길로 들어섰다면, 2002년 6월의 거리응원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감수성과 ‘젊은 감각’을 고수했기에 정치적 국가주의와 한 짝을 이루는 ‘문화적 보수주의’의 강고한 성채를 타고 넘었던 것이다.  
  
요컨대 10대 학생들은 학교에서 ‘얌전한 듯’ 수업에 열중하면서, 무리없이 ‘놀러나갈’ 기회를 만들어 내려고 했고, ‘국가적 행사’였기에 학교는 ‘평소답지 않게’ 유연하게 아이들을 거리로 내보낸 것이다. ‘체험학습’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마련되어 있었으나, 이보다는 ‘국가행사’라는 규정이 훨씬 학교를 유연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또한 ‘붉은악마’는 ‘문화적 감수성’에 대한 반격을 물리치고 오히려 그 힘을 한국사회문화 정체로 확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아이들이 붉은티, 태극기 패션, 얼굴 문양을 하고 거리에 나설 수 있었던 두 가지의 ‘힘’이었다. 그렇게 ‘기회’를 얻은 아이들은 거리에서 ‘놀았던’ 것이고 평생 하기 어려운 체험을 했고, 그 체험은 그들만의 ‘공유’영역 하나를 마음깊이 심어 놓았다는 것. 그렇듯 ‘문화적으로 해방’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이 앞으로 에너지의 분출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사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체험이 자발적 참여를 기본으로 한 ‘열린광장’에서의 공동체적 체험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 ‘에너지’를 어떤 방향으로 모아나갈 것인가 ?  

7월17일 신문에는 정부가 꿈꾸는 ‘포스트 월드컵’ 계획이 나왔다. ‘경제 4강’이 핵심이다. 국민들에게 ‘먹고사는 일’이 중요한 만큼 경제를 4강에 올린다는 언명은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내용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이미 세계 12위의 생산력을 자랑한다. ‘경제력’에 대비해서 이번 월드컵에서의 축구 4강은 때늦은 것이다. 8강에 오른 나라 중에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큰 나라는 미국이나 독일 정도이다. 우승국 브라질은 경제력을 비교하면 한국에 훨씬 떨어진다. 때문에 정부의 경제4강을 핵심으로 한 ‘포스트 월드컵’ 기획은 크게 잘못되었다. 우리사회에  ‘결핍’된 것은 경제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복지4강’ 교육4강 문화4강,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삶의 질 4강’이라는 상상력은 안나오는가. 면적으로는 전혀 세계 12위가 아니면서도, 생산력으로 세계 12위라면 그만큼 자연생태계의 ‘하중’도 엄청날 터인데, 왜 이렇듯 한국 어른들의 상상력은 빈곤하기만 한가.              

4. 지식, 경쟁, 학벌, 특권획득에 갇힌 한국교육

한국의 현재 교육은 10대 학생들의 거리체험을 ‘받아 안을’ 수 없다. 경제규모는 어느덧 세계 12위에 이르렀고, 월드컵은 ‘특별과외’를 통해 목표였던 16을 넘어서 4강까지 나아갔지만, 한국의 공교육은 전혀 아니다. 굳이 순위를 따진다면 월드컵 직전의 한국 피파순위와 비슷하다. 4강에 오르고 난 이후 새롭게 발표된 한국의 피파순위는 22위라고 한다. 거의 20단계를 뛰어오른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공교육은 교원1인당 학생수로 따지면 32위. 기업에서 좋아하는 경쟁력 지표만을 놓고 보아도 44위이다. 이 두 가지 지표만으로도 한국교육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신비스러운’ 사실은 한국의 10대 학생들의 ‘학력’만큼은 세계 최상위권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수학이나 과학 모두 세계 ‘4강’이 아니라 ‘우승권’에 진입해 있는 것이다. 더 신비스러운 것은 ‘점수’를 척도로 한 학력에서 한국의 10대들 ‘평균’이 세계 우승권이면서 또한 ‘수학’을 싫어하는 비율도 세계 우승권이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한국의 10대들은 ‘하기 싫은’ 공부를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게 형편없는’ 교육환경 속에서 ‘억지로’ 한 결과, 세계적으로 높은 점수를 올리고는 있으나, ‘교육성취도’를 점수가 아닌 ‘창의력’으로 넓힐 경우 세계 평균수준에서 한참 뒤진다는 뜻이다.

사실 이 문제는 새로울 것도 없다. 학교를 다니던 10대 시절을 ‘즐겁게’ 회고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기 힘들다.  40대 이상의 세대는 ‘학교’를 다니는 기회를 얻는 것 자체를 축복으로 알았다. 대신에 학교생활은 절대 즐거울 수 없었다. 현재의 10대와 20대는 학교다니는 것을 ‘기회’로 여기지도 않을뿐더러, 학교생활을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왜 여전히 한국의 10대들은 ‘못살던’ 때나 잘사는 지금 막론하고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 왜 여전히 낡아빠진 억압과 통제 속에서 ‘사생활의 자유’조차 침해당하는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가?          

군사정부가 물러가고 민간정부가 들어오면서,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교육개혁이 진행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자치활동이 고교에서 초등학교까지 확대되면서 학생들의 권리도 존중하는 방향으로 학교는 변화하는 듯 보였다. 획일적인 교육을 탈피하고, 교육을 ‘다양화’한다는 수사는 자체로서 완전한 ‘교육의 민주주의’ 지향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학력, 학벌사회를 탈피하고, 능력주의 구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설정된 ‘신지식인’상이 지금은 완전히 희화화되고 말았지만, 상고출신의 대통령이 강조했기에 1998년 무렵만 하더라도 설득력이 있었다. 1998년 그 무렵, 중고교의 보충수업은 국민정부의 ‘개혁적’ 장관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학교현장의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남는 현 정부 교육개혁의 ‘유일무이한’ 성과는 이 ‘보충수업’ 폐지조치였던 것이다. 보충수업 폐지와 특기적성 교육의 강화는 오전에는 교과수업, 오후에는 각종 특기적성활동이라는, ‘선진국형’의 초중고 교육과정의 정상화를 지향했다.    

그러나 불과 2년 정도의 ‘실험’으로 끝났다. 선진국형 ‘실험’이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완전히 파탄났다. 남은 것은 0교시로 상징되는 혹심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다. 0교시 폐지가 여론화되었지만 잠시뿐이었다. 0교시 자율학습은 고스란히 살아있다. 굶은 채 새벽에 등교하는 아이들이 안스러워 0교시 폐지찬성 여론을 80%로 끌어올린 바로 그 ‘엄마’들이 다시금  새벽부터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있다.

거리의 엄청난 ‘국민적 응원열기’를 근거로, ‘경제4강’을 정부가 외치고 있음에도 학교에서는 ‘0교시’ 수업(자율학습) 조차 폐지 못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야만적’이고 후진적 행태가 계속되어야 할까 ? 경제규모 세계 12위에, OECD 가입 ‘선진국’의 교육표준에는 도대체 언제나 다가설 수 있는 것일까 ?  
0교시 폐지는 학교단위의 ‘자율’로 넘겨져 있다. 그러나 어떤 학교도 ‘자율적으로’ 폐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0교시 운영’은 그야말로 교사와 학생의 반대조차 딛고 ‘자율’적으로 강행된다는 사실이다. 1998년에 교육부 ‘장관’이 결정이 ‘학벌획득경쟁’의 현실에 밀린 전형적인 사태가 0교시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평준화를 깨자’는 ‘비평준화 세대’ 중심의 주장이 활갯짓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교육의 ‘획일성’을 극복하기 위해 평준화를 깨자고 주장한다. 교육의 다양성 확보가 평준화 해제의 명분으로 주장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무슨 내용을 ‘다양하게’ 가르칠 것인지 관심이 없다. 평준화를 해제하고 다양한 고등학교를 세우면 그만인 것이다. 어떤 인간을 키워야 하는가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주장에서 유추하면 국가경쟁력 강화에 맞는 인간상을 이들은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경쟁력 강화의 구호 속에 한국의 10대들, 특히 고교생들은 여전히 극심한 입시경쟁교육에 시달리고 있다. 1998년의 새학교문화창조계획 실패이후 살벌한 학벌경쟁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지난해 교육부는 고등학교 학생들의 ‘모의고사 금지’조치를 취했다가 또 다시 ‘혼쭐’이나고 후퇴해버렸다. 올해는 아예 교육부가 지원하고 시도교육청이 ‘연합’한 ‘국가단위 모의 수능’을 치루는 지경으로 빠져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정부와 교육부가 하나가 아니고 둘 아닌가 !  보충수업을 금지하고, 쉬운 수능을 밀어붙이는 교육부와, 체벌금지조치를 ‘지침’으로 교육청과 학교에 내려보내고, 체벌허용조치를 또 다시 교육청과 학교에 내려보내는 교육부는 무엇인가. 고등학생들의 모의고사를 금지시키고, 1년만에 국가의 ‘책무성 확인’을 들먹이며 초등3학년 대상의 ‘진단평가’라는 ‘국가고시’를 강행하는 교육부는 하나인가 둘인가 !

우리는 1987년 6월을 뼈아프게 회상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고작 ‘국가시험’을 초중학교까지 확대하는 그런 수준의 정부를 얻었던 것이다. 학연지연혈연의 어느 하나도 떼어놓지 않은 ‘명문가, 명문고, 일류대’ 나아가 ‘지역주의’와 가부장주의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엘리트’ 반열에 있는 한 학벌은 절대 폐지할 수 없음을 알게된 것이다. 비평준화 세대를 거친 엘리트들에게 ‘교육’은 밤늦도록 ‘국영수’ 중심으로 등골이 휘어지게 공부해서 얻어지는 무엇에 불과함을 알아차렸다. ‘경쟁’을 강요해서 얻어지는 ‘학력’과 학벌에 불과함을, 그 오래된 ‘비밀’을 알아차리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진학과 동시에 ‘학벌’이 결정되고 그것으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며, 따라서 ‘고시공부’외의 다른 공부는 안 해도 되는 참담한, 도저히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교육에 밤낮 없이 학생들이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신입사원 서류에 ‘학력란 폐지’하자는 주장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견고한 구조, 바로 그것에 부닥쳐 한국교육은 오늘도 0교시에 신음하며, 이제는 초등학교조차 학업성취도라는 국가고사에 점수경쟁을 강요당하며 온 나라가 0세에서 20세까지 ‘학벌경쟁’에 휩싸이기 직전에 놓여 있는 것이다.
  
5. 교육적 상상력의 열림을 향해

히딩크는 어떤 측면에서 한국인의 ‘학벌, 학력경쟁’에 갇혀있는 빈곤한 교육적 상상력에 시사적이다. 전근대적 학연, 지연을 넘어서 ‘능력주의’를 실현했다고 말하는 순간, 이 생각은 정확히 현 ‘국민의 정부’ 상상력에 머무른다. 보충수업 폐지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정부이니 하나마나한 말이다. 바꿔 말해서 이른 바 ‘신지식인’ 수준의 능력주의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어떤 포지션’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다기능’까지 겹치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교사들에 대해서는 ‘임용’에서부터 ‘경쟁’을 강조하고 복수전공자에게 임용의 우대를 한다는 따위의 정책에 맞아떨어지기에. 이러면서도 5학급 짜리 농어촌 소규모 학교에 ‘교감’을 둔다는 ‘발상’을 하는 것이 현 정부의 교육부이니, 이들의 ‘신지식인’은 사실상 힘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강요’되는 개념에 불과하다. 왜 하릴없는 6학급 짜리 학교의 ‘교감’을 폐지하고 대신에 부족한 ‘교사’를 충원토록 하는 생각은 못할까 ?  초등학교 교사가 부족하다면서 ‘정년환원’을 줄기차게 주장한 한국교총은 어찌하여 5학급 짜리 초등학교에 교사하나를 줄여가면서 ‘교감’직 설치를 ‘교섭’이라고 했을까 ? 이 대목에서 우리는 ‘능력주의’의 함정을 보게 된다.

히딩크의 비밀은 다른데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문화적으로 진보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경기장에 ‘애인’을 공개적으로 데리고 다니는 정도는 사실상 ‘문화적 진보성’과도 아무 상관없는 ‘사생활’의 문제에 불과하다. 국가적 ‘대사’이기에, 우리네 한국사람의 의식 속에는 그래서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

그의 강점은 ‘자유분방함’에 있다. 한마디로 그는 ‘열린’ 지도자요 관리자이며 치밀한 기획자이기도 하며, 스스로의 삶을 ‘즐기는’ 사람에 속한다. 대표팀을 훈련시키는 그의 모습 속에는 ‘리더’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학교에 대입해보면 ‘열려있는’ 그러나 엄한 학교장상도 들어 있다. 무엇보다 평교사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모범적인 ‘담임’교사의 이미지가 그에게 들어 있다. 한국의 교육계에서조차 히딩크를 배우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 경우 우리 전교조가 배운다면 교장과 학급담임의 ‘역할’모형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때 가장 큰 포인트는 그가 ‘자유분방’하고 문화적으로 진보적이면서도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은 물론 ‘관리’까지도 ‘민주적으로’ 해냈다는 사실이다. ‘민주적’이라는 말의 대척점에는 ‘관료주의’가 온다. 정말 오랜만에 한국 축구협회는 감독에게 훈련에서부터 선수선발 그리고 전략전술운용가지 일체를 위임했다. ‘관료주의적 간섭’의 본능을 스스로 절제했으니 대견하다고 말할 것인가. 전혀 간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98년 대표팀의 10배정도의 비용을 아낌없이 코치진에 투자했다. 무조건 투자를 많이 한다고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닌데, 히딩크라는 훌륭한 ‘교사’와 ‘동기화’가 아주 잘된 열성적인 ‘학생’들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이를 현재 한국의 학교에 적용해 보면 간단히 답을 구할 수 있다.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은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있다면 ‘입시열풍’이 심각하며 그만큼 단 한번의 명문대 ‘합격’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양3국중 한국에서 가장 심각하다. 이러니 히딩크의 ‘자유분방함’은 한국의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입시열풍과 그것의 뿌리인 학력, 학벌주의의 제거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히딩크를 한국교육에 본받자고 한다면 이는 돼지우리에 진주목걸이를 던져 놓자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무슨 수단을 써서도 보충자율학습은 없애야 하며, 획일적인 국가시험 열풍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야 할 것이다. 정말이지 이 대목에서는 한국의 교육부를 저주하고 싶을 지경이다. 지나친 ‘복지’의 핑계라도 댈 수 있었던 영국과 달리, 한국의 아이들이 ‘줄줄이 자살’하는 사태가 진정된 것은 그나마 김대중 정부 초기의 보충자율학습 폐지조치 이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수능’으로도 부족한지 성취도 평가라는 ‘국가시험’을 다름 아닌 ‘보충수업’을 폐지하고, 대학의 서열화 탈피를 주장했던 한국의 ‘현 교육부’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인다.

히딩크를 본받기 위해서 한국의 학교는 ‘문화적으로 완전히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 고작 원어민 교사 데려다가 ‘영어공부’ 잘시키는 것이 ‘개방’처럼 인식되어 있다. 정말 심각한 것은 학교의 ‘폐쇄성’ 중에서도 으뜸인 ‘문화적 폐쇄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몇 몇 학교에서 ‘노래방’을 설치한 경우가 있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대목에서는 교사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용의복장규정’이라는 것이 여전히 살아있는 현재의 학교에 ‘히딩크’ 리더십이라니, 당치도 않은 생각이다.

사실, 교사들이라 해서 학생들보다 나은 처지에 있지도 않다. 정년단축 강행시기에 사회적으로 각인되어버린 ‘교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교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완전히 실추시켰다. ‘경제원리’에 따라 공교육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확산 전략이 영국이나 미국과 비슷하게 수구언론 중심으로 자행된 결과, 현재 공교육 전반이 불신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들에게 주어져 있는 권리란 고작해야 ‘노동2권’에 불과하다. 학생들이 ‘통제위주’로 ‘관리’되는 까닭은 정말이지 교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제 겨우 ‘노동2권’을 누리는 수준의 ‘교사’들이 있기 때문이며, 이 교사들이 아직도 ‘수업감시’를 자신의 일로 여기는 교장들에게 ‘지휘, 통제’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변화하는 속도보다 오히려 교사들이 변화하는 속도가 느린 것이다. 이는 분명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감당할 몫에 속한다.

다음으로 잘못된 몇 가지 이데올로기를 현실과 견주어 바로잡아야 한다. 가장 먼저, ‘교육’은 국가경쟁력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교육’이 경제를 위한 ‘인력관리’의 수단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본래의 ‘교육’에 충실한 ‘결과’로서 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는 정도의 인식으로 충분하다. 밤낮으로 ‘경쟁력’을 외친 결과, 경제위기로 인한 일자리 상실까지 겹쳐, 한국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극도로 증폭되어 있다. 이런 불안은 10대 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감염되어 있다. 그리고 산업이 포화상태이기에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은 거의 막혀버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전망조차 희미한 상태임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병적인 교육열’로 표출되고 있다.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오늘의 병적인 ‘교육열’은 예전과 달리 거의 대부분 중상류 층에 의해 주도 되고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더 이상 ‘계층상승’의 수단일 수 없다는 사실이 확연해지고 있는 것이다.  

0교시로 아침밥 굶는 아이들에 대한 ‘안스러움’이, ‘학벌경쟁 탈락의 불안감’을 넘어서는 ‘건강한 인식’이 정말 필요하다. 자립형 사립고에서 ‘별나고 특별한’ 교육을 엄청난 돈 써가면서 하는 것보다, 집근처의 가까운 공립학교에서 적은 돈 들이는 대신 좀 높은 세금을 감내하는 정도의 사회의식이 절실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등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의 문제이다. 앞에서 말했듯, 대학의 학부제와 고등학교의 ‘다양화’는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인문계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학생의 적성과 관심’에 맞춘 ‘맞춤교육과정’으로 하겠다는 것은 지나치게 엇나간 것이다. 10대 학생들의 문화적 표현욕망의 분출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해 억누르면서, ‘교과목’만큼은 무한대로 선택하도록 한다는 설정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학벌경쟁’을 극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문계 고교 교육의 ‘다양화’는 어불성설이다.  

고등학교 교육 ‘다양화’의 진정한 의미는 이데올로기적인 ‘획일화’를 벗어나고 입시경쟁교과와 실용교과 중심의 ‘편식’을 벗어나서 폭넓은 교양교육으로 나아간다는데 있다. 그 어떤 교과목과 교육과정, 학교체제에서 찾았다는 잘못된 방향설정에 있었다. 한국사람들에게 보통 교양교육에 대한 ‘수요’는 거의 없다. ‘인성교육’으로 요약되는 그와 같은 요구는 ‘입시’라는 절벽에 부닥치는 순간 쉽사리 깨지고 만다. 하지만 ‘창의성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초중고에서의 ‘인성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모순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국영수 중심으로 밤낮없이 ‘시험공부’를 열심히 해 보아야 ‘창의성’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에 선진국의 ‘오전 지식교과교육’, 오후 특기적성활동 방식의 초중고 교육유형이 성립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교육개혁 결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어느 만큼 그와 같은 선진국의 모습으로 ‘열려’있다. 특기적성교육이 정착하고 있고, 지필고사가 폐지되어 이제야 교사들은 ‘자율적인 교육활동’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차리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취도 고사는 그나마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의미있는 변화조차 휩쓸어갈 것이다. 고등학교의 경우는 애초부터 ‘입시기관’으로 상정되기에, ‘교과목 선택’을 통한 교육의 다양화는 입시중심의 더욱 축소된 ‘획일화’로 귀결될 것이다. 설계가 잘못된 것이다.

언제쯤 한국의 어른들은 아이들을 ‘놓아줄 수’ 있을 것인가? 히딩크가 대표팀 훈련시키듯, ‘놀면서’도 중요한 것은 몽땅 가르치며, ‘즐겁게’ 경쟁을 소화하는 교육은 불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0교시 수업과 ‘보충수업’과 ‘학원과외’와 지필평가를 통한 등수 매기기를 도대체 언제쯤 벗어날 수 있는가? 점수경쟁만이 통한 ‘학력향상’의 유일한 길이라는 발상은 대체 언제쯤 완전히 깨어질 것인가? 한국인의 머리와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폐쇄적이고 빈곤한 교육적 상상력을 완전히 분쇄하지 않는 한 모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6. 문화광장, 열린광장, 열림을 향한 교육  

교사로서 우리는 학생들의 ‘에너지 분출’이 두려울 수도 있다. 허나 오랜 세월의 ‘억눌림’을 벗어 던지는 것은 물론, ‘역사적 앙금’으로서의 (민족적) 자괴감까지 깨끗이 벗어 던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굳이 어른들의 짐을 물려받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더군다나 1987년 6월의 거리에 나왔던 현재 30-40대의 ‘공적’을 이해라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2002년 6월, 거리에 진출한 10대 학생들은 보수적인 학교의 ‘폐쇄회로’를 벗어나 ‘광장의 자유’를 체험했다. 무엇보다도 ‘함께’ 함의 소중함을 체험한 것이 크다. 이는 학교교육을 통해 반드시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늦기 전에, 초중고 교육에 대한 ‘재규정’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보수적 어른들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화 하여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키우는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될 경우 고등학교 교육은 끊임없이 ‘동요’하게 될 것이다. 대학은 학부제로 ‘통합교육’의 길로 가면서, 고등학교는 보다 ‘전문성’있는 선택교과 중심으로 세분화한다는 모순은 그러한 ‘동요’에서 필연이다.

고등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며 보통교양교육으로 정립해야 한다. 이렇게 할 경우, 자립형 사립고나 과학고, 외국어고처럼 ‘학교의 다양화’를 이룩할 까닭이 사라진다. 대부분 ‘의과대’에 진학하는 과학고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모두 폐지하고 차라리 대학의 학부제를 ‘특성화, 다양화’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초중고 교육은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사람의 ‘오래된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초중고교에서는 넉넉하게 공부하고 대학에서 ‘치열하게’ 공부하는 것이 그것이다. 0교시가 그토록 안쓰럽다면, 아침 9시에 학교에 등교하면 된다. 사실, 0교시는 ‘대학’에서 해야 한다. 물론 ‘자발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뜻이다. 초중고교는 선진국의 오랜 역사적 체험에서 하듯, 지식과 활동, 몸과 마음을 균형있게 키우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럴 경우, 초중고교는 학생들의 각종 다양한 학습과 활동으로 ‘살아 숨쉬는’ 곳으로 거듭나야 한다. 오전은 지식중심의 학습을, 오후는 특기와 적성을 키우는 활동중심의 학교교육과정 운영은 불가능하지 않다. 경제규모 세계12위에 걸맞는 체제를 이제는 갖추어야 할 때이다. 주5일제 실시까지 생각하면 더 답답해진다. 점점 남는 시간은 많아져 가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학벌경쟁에 내몰려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못 배우고 있으며, 게다가 예체능교과목은 축소되고 국영수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으니,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꼴이다. 사실, ‘교과’로서의 음악이나 미술, 체육을 가르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새 교육과정 개념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초등학교에서의 교육과정은 완전히 ‘재편’되어야 한다 7차교육과정으로 인해 오히려 ‘컴퓨터’ 교과와 같이 지식교과가 늘어나 버렸다. 영어까지 생각하면 정말이지 숨이 콱 막혀온다. 아직 안 늦었으니 초등학생들은 ‘놀면서’ 공부할 수 있게 교육과정을 대대적으로 재편성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광적인 교육열은 태어나자 3개월부터 한글을 가르치고, 3년이면 영어와 외국어를 가르치는 ‘조기교육’으로 표출된다. 지금은 소아 정신과 의사나 뇌신경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그와 같은 조기교육의 ‘무리’가 잘 밝혀져 있다. 특히 이른 바 ‘창의성’ 함양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나이가 어릴수록, 놀면서 공부하는 것은 상식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의무교육’이기에 아이들이 넉넉하고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갈수록 모든 교과목을 ‘문화예술교육’의 개념에 이해 통합적으로 재편성하는 것은 ‘프랑스’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갑갑한 학교를 완전히 벗어나는 ‘새로운 상’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대안학교’조차 이미 낡은데다가, 모든 10대학생들을 위한 ‘대안’은 될 수 없다. 모든 이를 위한 교육은 누구를 위한 교육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부 어른들이 있지만, 이들의 말은 흘려버리도록 하자. 꿈은 이루어진다. 교육과정을 재편하여 학교 안에서 문화적 감수성을 키우는 문화예술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학교밖에도 아이들을 위한 각종 공간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 회관이나 도서관은 기본 시설물에 불과하다. 현재 닫혀 있는 ‘교육’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 ‘교육적 상상력’의 열림을 향해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문화연대’의 제안처럼, 세종로를 ‘문화광장’으로 만드는 것은 아이들을 위해서도 대단한 ‘꿈’이다. 세종로 주변의 온갖 위압적인 ‘권력기관’이 박물관이나 미술관, 과학관 등으로 대체되고, ‘녹색지대’로서의 ‘공원’으로 주변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정녕 어려운 일일까. 그곳을 10대 학생들이 지식과 활동을 아우르며 ‘감수성’을 키우고 휴식까지 겸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해 주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문화광장’인 세종로에서 10대들의 ‘축제’를 여는 것은 ‘열린 음악회’를 여는 것보다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2002년 6월의 거리에 나선 10대 학생들은 한국인의 ‘목마름’을 대변했다. 세계 12위의 경제규모에 걸맞는 ‘삶의 질’에 대한 목마름이다. 이제는 양적인 경제성장보다 삶의 질의 향상에 대하여 눈을 돌릴 때가 되었음을 그들이 보여준 것이다.  그들이 2002년 6월에 겪은 열린광장에서의 공동체 체험은 교육적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놀러 나갔다가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 어른들이 물려준 우리 역사에 대한 열패감 같은 것들까지 싹 날려버릴 수 있었다면 더욱 ‘교육적 승화’의 방책을 찾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질’ 향상을 중심에 놓는 문화에서의 민주주의가 학교의 안팎에서 확대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 필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정책기획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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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7/20 [03:2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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