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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현상’과 사회운동의 과제
‘문화사회’ 건설과 사회적 공공성 구축ba.info/css.html'>
 
강내희   기사입력  2002/07/20 [03:12]
1. 축제는 끝나고


월드컵이 끝났다. 2002년 6월 한 달을 입장에 따라 경이와 도취, 감동과 충격, 혹은 실망과 분노로 수놓던 ‘한여름 밤의 꿈’은 사라졌다. 운동장을 진동시킨 ‘대~한민국’ 구호와 ‘오~ 필승 코리아’ 노래, 초여름 거리 위를 용암처럼 흐른 수백만 붉은 인파는 이제 더 이상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다. 월드컵 기간 중 자기 나라 대표팀을 응원하러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축구 팬들도 돌아가고 없다. 축제는 끝났다. 하지만 축제의 기억, 축제가 빚어낸 감격과 충격, 혹은 혼동, 아니면 분노, 그리고 이번 월드컵처럼 거대하고 복잡한 현상이면 으레 따르는 평가와 분석의 과제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축제 열풍이 지나고 나니 어떤 불연속성이 느껴진다. 축제에서 일상으로의 전환은 천국에서 지옥으로의 추락일 수도, 불규칙한 비정상적 삶에서 규범화한 정상적 삶으로의 복귀일 수도, 혹은 집단적 광기에서 비판적 반성으로의 좌정일 수도 있다. 들떠서 잠 못 이룬 6월 한 달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인 탓인지 금단현상도 없지 않다.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강팀을 잇달아 격파하며 4강으로 진출한 한국팀 모습에서 짜릿한 쾌감을 느끼다가 일상의 지루함에 직면하며 갖는 거부반응, 혹은 월드컵 열기에 덴 몸과 마음이 새로운 삶의 속도로 전환하면서 겪는 부적응 따위가 그런 현상일 것이다.

이런 ‘부작용’을 없애려는 듯 월드컵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되새기려는 노력이 부산하다. 터키와 치른 3-4위 결정전에서 붉은 악마 응원단 기획자가 내건 “See You at K-League" 구호와 같은 ‘월드컵 이후’ 기획은 참 민첩했다. 월드컵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축구 팬으로 새로 태어나 K리그, 즉 국내축구연맹 사상 최고의 유료 입장 기록을 갱신한 것은 그 덕분이다. 기업은 기업대로 월드컵 4강 ‘신화’의 치적을 브랜드이미지 제고에 활용하거나 히딩크 경영론을 도입하려고 한다. 월드컵의 성과를 이용한 것은 16강 진출 직후 이건희 삼성회장 등 재계 인사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경제 발전을 당부한 김대중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홍2 사건’으로 악화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단행한 개각도 월드컵의 성과를 담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진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 현상의 실상과 의미, 그것이 제기한 사회적 문제와 과제를 둘러싼 해석과 평가, 판단은 그렇게 간단할 것만 같진 않다. 월드컵이 끝난 뒤 신문과 방송의 관심은 히딩크와 대표선수들의 영웅화 아니면 상품화에 국한되고 있고, 언론에 투고한 전문가들의 진단도 “한국인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식의 어설픈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접근은 월드컵 현상의 실상과 그 의미를 둘러싼 해석과 평가, 월드컵의 문제점, 혹은 그것이 제기하는 사회적 과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논란을 오히려 축소한다. 월드컵 현상의 실상은 과연 충분히 파악되었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월드컵 현상’을 둘러싸고 그 동안 태도와 해석의 경합, 평가의 상이함, 정치적 입장 차이가 드러난 점을 생각하면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축제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에도 상반된 해석과 평가가 속출했다. 믿기 어려운 4강 진출과 열정적인 거리 응원을 보고 ‘한민족의 DNA’에 각인된 능력과 신명이 발현했다고 흥분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거꾸로 파시즘과 국가주의의 발흥을 경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에서 너도나도 붉은 티셔츠를 입는 모습에서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이나 ‘6월 항쟁에 나타난 민중적 에너지의 재현’을 읽어내면, 다른 한편에선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또 한편에선 이번 월드컵이 한민족의 쾌거가 아니면 무엇이냐는 반문도 뒤따랐다. 월드컵 기간 동안 넘쳐난 민족주의를 긍정적으로 보는 쪽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보는 쪽도 있었다. '붉은 악마' 현상에는 ‘넘실거리는 국가주의와 맹목적 애국심’, ‘체제에 대한 순응과 정치적 무관심과 인간의 주체성을 죽이는 군중심리’가 작동한다며,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과 ‘민중적 에너지의 재현’ 운운하는 것은 국가와 자본과 언론의 군중 동원 사실을 외면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지식인의 ‘망발’이라는 혹독한 비난이 제출되는가 하면, 이 비난은 또 그것대로 연인원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라는 지적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4강 ‘신화’와 거리 응원의 역동성을 국운융성의 계기로 삼자며 여전히 국민을 동원하려 하는 지배세력의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같은 현상을 놓고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다양한 입장들이 나온 것이다.

2. ‘월드컵 현상’의 복잡성

나는 위에서 이번 월드컵을 ‘축제’라고 불렀다. 이는 해석과 입장이 대립하고 있는 것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점을 염두에 둔 때문이다. ‘축제’는 신명나는 잔치를 가리킨다. 한국인이 이번만큼 오랫동안 기쁨에 들뜬 적이 과연 있었는가 생각하면 이번 월드컵은 분명 잔치였다. 하지만 축제를 신명의 관점에서만 볼 것은 아니다. 축제는 반드시 즐겁고 유쾌한 것만 품지 않는다. 러시아의 문화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에 따르면 축제 혹은 카니발은 산천을 진동시키는 우주적 웃음 현상이다. 여기서 웃음은 어떤 넉넉함이다. 미와 추, 선과 악, 고귀함과 비천함을 나누는 지배적 질서가, 삶과 죽음, 즐거움과 고통, 정의와 불의를 관계짓는 일상의 틀이 이 웃음에 의해 뒤집힌다. 이런 이유로 축제는 곧잘 난장으로 여겨지고, 금욕주의와 경건주의 태도를 지닌 세력이 금기하는 대상이 된다. 이번에도 사람들, 특히 10대 청소년들은 경건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태극기를 마음껏 ‘유린’했다.

이번 축제는 거대한 지진과도 같았다. 수십만, 수백만 붉은 정열의 마그마, 그것은 거대한 힘의 분출이요, 그 자체로 위력적인 에너지의 표현이었다. 혹자는 이 에너지를 한민족의 기질적 역동성으로, 혹자는 6월 항쟁의 민중적 에너지로, 혹자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로, 혹자는 자본과 언론에 의한 대중선동으로, 혹자는 억압받는 10대와 여성의 자기표현으로 이해한다. 월드컵 현상을 둘러싸고 관점, 판단, 주장, 입장이 이처럼 서로 경합하고 분분한 것은 이번에 분출된 용암이 그만큼 거대하고 다면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상반된 주장과 입장들이 각자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파시즘에 대한 우려도, 국가주의에 대한 경고도, 대중의 자발적 참여라는 판단도, 자본과 권력과 언론의 개입에 대한 지적도, 한국인의 신명에 대한 감탄도, 젊은 세대의 자기표현 능력에 대한 경탄도 모두가 일리가 있고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들 반응과 주장은 어느 하나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젊은 세대의 자기표현을 긍정적으로만 보기에는 그들이 외친 ‘대~한민국’은 너무나 국가주의적이다. 하지만 이 ‘기호’에서 국가주의만 읽어내기에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너무 자의적으로 설정된 것 같다.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대한민국’이라는 기표는 그것을 고정시킬 기의와 유리된 채 허공으로 떠도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대중의 동원 여부도 쉬 판단하기 어렵다. 대중이 동원되었다고 하기에는 인터넷을 활용하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모여든 사람들의 주체적 의지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 같고 자발적 참여만을 주장하기에는 월드컵 뉴스로 도배한 미디어의 동원 전략을 애써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인파를 6월 항쟁 당시 ‘독재타도!’를 외치던 민중적 에너지의 재현으로만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1987년의 대중은 사회정의를 요구하며 군부독재에 항거했지만 이번에 시민들은 한국팀의 선전에 감격해하며 사회 ‘발전’의 현실을 즐겼다. 수십만, 수백만 사람들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모습에서 레드 콤플렉스 극복만을 읽어내는 해석도 역시 일면적이다. 붉은 옷을 입은 군중한테서 사회주의 이념의 지지와 용인을 발견하기에는 그들의 탈이데올로기적 경향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붉은 악마 현상은 그렇다면 파시즘의 발흥을 예고한 것일까? 파시즘과 집단적 광기를 공유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번의 군중한테서 파시즘의 특징인 집단적 엄숙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사회주의 증오 등이 강렬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물론 이런 다양하고 복잡한 군집 현상이 일어나는 동안 단병호 민주노총위원장이 구속되어 있었고, 시그네틱스 노조, 병원 노조의 파업이나 외국인노동자의 권리요구 투쟁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길거리 응원을 하러 나선 사람들이 노동탄압을 지지하는 행사에 동원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월드컵 현상은 거대한 마그마 현상이었고, 내부에 무수히 많은 이념적, 정서적, 행동상의 정서적 굴곡과 차이들을 가진 하나의 복잡성이었다.

2002년 6월, 우리가 본 거대한 축제, 마그마를 분출하며 일어난 지진이 단순한 구성이 아니라면 통합적 시각에서 그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하나가 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다름을 품어야만 한다. 한꺼번에 수십만 수백만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감격과 경악, 감동과 우려 어느 한 쪽 반응만 드러내는 것은 그 현상을 단순화하는 일이다. 수백만이 강제로 동원될 수는 없으며, ‘대~한민국’ 구호를 함께 외친다고 단일한 목소리만 내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이 큰 소리로 들린 것은 개인들 각자의 목소리가 합쳐지고, 서로 다른 꿈이 모여든 총합의 결과이다. 물론 개인에 따라 집단적 동질감을 가졌을 수 있고, 이데올로기적 호출을 통해 지배질서에 포섭되어 개인적 특이성을 구현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만 고집하는 것은 개인들이 지닌 다양한 역능을 무시하는 것이며, 이번 축제에서 나타난 ‘하나됨’의 의미를 단순하게만 파악한 결과이다. 거대한 용암으로 모인 사람들은 계급, 직업, 성차, 성애, 세대, 지역 등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고, 따라서 노동자로서, 학생으로서, 여성으로서, 동성애자로서, 10대로서, 지역인으로서 그리고 그것도 서로 다른 처지에서 ‘축제 마당’에 참여했다. 이들의 시선과 관심이 축구경기 장면과 그것을 중계하는 전광판 화면에 쏠렸던 건 사실이다. 이 화면을 축구경기를 통한 국가간 경쟁, 언론이 부추긴 국가주의와 스포츠스타 시스템, 기업의 이미지 제고 전략과 스포츠상업주의가 채운 것도 사실이다. 한국팀이 연승을 거두자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을 경영 전략에 도입하자는 식의 제안이 난무한 것도 사실이고, 8강에 탈락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FIFA와 한국의 결탁 혐의를 제기하자 이를 두둔하는 중국 등지의 언론보다는 그것을 비판하는 언론만을 옳다고 보는 자국 중심적 판단이 판을 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월드컵 행사 과정에서 이런 것들만 보고 들었다면 또한 많은 것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셈이 된다. 좀더 세밀하게 월드컵 기간 동안에, 월드컵 현상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어떤 일들이 포함되어 있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3. 광장에서 벌어진 일들

2002년 6월 한국의 광장들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사실의 실증과 확인은 구체적인 자료들을 수집하여 좀더 면밀하게 분석해야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현재까지 확인한 사실들만으로 이번의 월드컵 현상을 주로 ‘광장’에서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2천만 명이 훨씬 넘는 ‘붉은 인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온갖 방식으로 참여해야 가능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번 인파에는 어린 자녀에게 일생일대의 장관을 체험시키려고 나온 30대 가장, 가사노동을 피해 길거리에서의 스트레스 발산을 위해 나온 주부, 수업을 빼먹고 나온 중고등학생, 페이스페인팅을 하며 자신의 끼를 한껏 발산하는 젊은 여성,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확인하러 나선 보수우익 장년, 월드컵 준비과정에서 철거당했다가 길거리 응원판이 벌어지자 한몫 잡기 위해 뛰어든 노점상 등 온갖 군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다양성이 없었다면 지난 6월 한국의 거리를 휩쓴 거대한 붉은 용암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헬리콥터에 장착된 카메라의 원거리 초점에 따라 보면 서울의 광화문 일대,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진 길거리 응원은 웅장하고 거대한 용암의 흐름, 그것도 단일한 흐름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거리 위 실제 풍경에서는 미시적으로 확인되는 행동과 동기와 의도와 희망의 다양성이 있었다.

거리 응원의 양상, 광장에서 보인 군중의 행태는 시공간 조건에 따라서 달랐다. 이번에 형성된 광장들은 각기 나름대로 특색이 있었다. 서울의 경우 특히 주목할 곳이 광화문 일대였다. 이 곳은 월드컵이 있기 전부터 ‘붉은 악마들’이 모여들었던 거리 응원의 메카였던 탓에 이번에도 축구 팬들이 주로 모여들었는데, 나중에는 10대가 합류하여 이번 거리 응원의 중요한 한 형태를 보여준 곳이다. 이 곳에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모여드는 열성을 보였고, 운집한 뒤로도 경찰의 저지선 속에 있기는 했지만 동원된 대중의 순응하는 모습만은 아니었다. 이 점은 경기가 끝난 뒤 이 곳이 일종의 카니발 공간으로 전환된 데서 분명히 확인된다. 이탈리아전이 끝난 뒤 시청 앞 광장의 인파가 삽시간에 해산된 데 반해 이 곳은 청소년들이 ’점거‘하여 새벽 두, 세 시까지 난장을 벌였다. 신촌 로터리 일대는 경기가 진행되는 시간 동안 거리 응원은 한산했던 반면 경기가 끝난 이후가, 특히 거리를 점유한 뒤 벌어진 난장(亂場)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편이었다. 이 곳의 인파는 인근 대학 캠퍼스나 일대의 술집 등에서 경기 시청을 한 뒤 경기가 끝나면 거리 장악을 위해 모여들었다.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이겨 한국팀의 16강 진출이 확정된 날 밤 군중이 지나가던 버스를 멈춰 세우고 몇몇이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간 모습이 TV 화면에 전해진 곳도 이 곳이었다. 이런 난장의 모습은 신촌 일대에 대학교가 밀집해 있고, 대학생들의 시위문화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강전에서 독일에 패배한 날 밤에도 이 곳 대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거리를 점유하기도 했다.
물론 권력의 동원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의 경우 반미시위를 두려워하여 미대사관이 있는 광화문 일대보다는 좀더 안전한 시청 앞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이도록 유도한 건 사실이다. 6월 4일 폴란드 대전까지 비어있던 미국과의 경기가 있던 6월 10일에 사람들이 시청 앞 광장에 모인 것은 정부와 서울시가 방송사와 유명가수를 동원하여 이 곳에 ‘열린 음악회’ 형태의 공연을 기획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국 ‘길거리 응원’의 대명사처럼 세계에 알려진 이 곳에서의 응원은 따라서 기획된 측면이 있으며, 이쪽 인파가 주로 30대 이상의 시민, 회사원이나 가족 단위의 참여로 구성되었다는 것 역시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거리 응원이 있기 전부터 SK 텔레콤이 영화배우 한석규를 내세워 ‘짝짝짝 짝짝 대~한민국’ 구호가 나오는 광고를 집중해서 홍보한 결과 사람들이 그 리듬에 익숙해진 것도 ’붉은 악마‘ 회원이 아닌 일반인들이 집단 응원에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이런 기획 동원은 부분적인 현상이었을 뿐, 전체 분위기를 주도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번에 열성적으로 거리를 메운 다수가 그 동안 공적 공간에서 소외당해온 청소년과 여성이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여성들의 경우 어린 청소년에서 중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거리 응원에 대거 참여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두건, 탱크 탑, 망토, 앞치마, 스커트, 바지 등 다양한 용도로 태극기를 사용하고, 태극기 문양으로 페이스페인팅, 손톱 및 발톱 화장을 하는 ‘태극 패션’을 주도한 것은 젊은 여성들이다. 하지만 과감하게 문신과 태극기 치마를 두르고 밤거리를 활보하는 중년 여성도 적지 않았으며, 이들은 김남일 등 새롭게 스타로 등장한 젊은 선수들의 열성 팬이 되는 데도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 “남성의 몸에 대한 공개적인 찬사, 집과 직장으로 이어진 폐쇄된 공간을 거부하고 밤의 시간, 열린 광장, 군중의 형성에서도 여성이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상의 사실로 판단할 때 거리를 메운 인파를 동원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번 월드컵 현상에 대한 일면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사실 하나는 이번 광장 문화의 형성에 ‘노동거부’ 태도도 한몫 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휴가를 내거나 심한 경우에는 축구 응원을 하기 위해 사직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상점 문 걸어 잠그고 길거리로 나선 자영업자도 있었다. 휴업을 하거나 어차피 직원들이 축구 응원에 정신이 팔린 판에 조업을 해도 능률이 오를 리 없다고 판단한 직장에서는 집단 휴업을 감행하기도 했다. 각종 학교나 학생들한테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대학생은 6월 중순에 이미 방학을 한 터라 문제가 없었고, 중고등학생의 경우에는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월드컵 열기로 단축 수업 등이 있었고,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각자 내키는 대로 응원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입시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아는 한 입시생의 경우 새벽까지 트럭을 타고 다니며 기분을 내기도 했다. 수업시간을 빼먹는 일은 노동거부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다양한 이유로, 그리고 다양한 시공간적 조건 속에서 거리로 나섰고, 광장을 점유했다. 이번 광장 문화는 분명 월드컵 축구 경기로 인해 조성된 것이 분명하다. 월드컵이 실질적으로 초국적 자본인 FIFA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국가간 경기를 통한 국가경쟁력의 수사학과 국가주의를 전제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복잡성으로서의 월드컵 현상은 국가주의나 초국가주의, 심지어 축구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즐거워한 것도 어느 한 이유 때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를 잘 풀어갔기 때문에 열광하기도 했지만, 대표팀에 발탁되기 전까지는 무명이던 선수들이 선전한 것 때문에 더 열광했다. 게다가 꼭 축구 때문에만 열광한 것 같지도 않다. 전국 곳곳에 설치된 전광판 앞에 군중이 모인 유일한 목적이 축구에 국한될 리 없다. 축구 시청과 응원이 주된 목적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냥 축제 분위기를 즐긴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 이번만큼 대중이 마음껏 ‘즐긴’ 경우도 드물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즐기는 방식도 복잡하고 다양했다는 점이다. 혹자는 축구가 좋아서, 혹자는 응원 분위기가 좋아서, 혹자는 자기 표현의 기회를 만끽하려고, 혹자는 일탈의 기회를 즐기려고, 혹자는 자동차 없는 거리가 좋아서, 혹자는 대한민국의 ‘위대함’을 확인하기 위해, 혹자는 경찰 저지선 돌파의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광장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쯤 되면 지난 6월의 ‘광장’에는 수많은 다양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4. 축제에 묻힌 것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이번 축제 동안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붉은 악마 현상’ 혹은 ‘월드컵 현상’이 6월 한 달간 세상을 지배하는 동안 세상에는 다른 일들도 많이 발생했다. ‘지나치다’는 말만으론 부족할 정도로 방송과 신문이 월드컵 뉴스로 화면과 지면을 덧칠해했지만 이 엄연한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축제 기간 동안 한국인은 ‘진정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다고 지배집단이 아무리 떠들어도 ‘또 다른’ 한국인이 있었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축제기간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삶을 짓누르는 사회적 모순과 갈등은 작동하고 있었다. 시그네틱스 노조, 병원노조, 외국인 노동자 등이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고, 수많은 노점상도 삶의 터전에서 ‘철거’당했다. 축제의 흥분 속에 이처럼 노동자계급이 탄압을 받고 외면을 받는 사이 대우자동차가 GM에 헐값으로 팔려갔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인권운동사랑방이 제출한 ‘붉은 악마 현상’에 대한 비판은 의의가 있으며, 납득이 간다. 이 단체는 논평에서 응원 열기를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열망이라 규정했다. 나는 위에서 분석한 것을 토대로 이 열기 안에 승리에 대한 열망만 있었던 것으로 보진 않지만 응원열기가 가열되면서 사회정의가 실종되는 측면이 있었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축제의 열기 속에서 우리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들, 뒤돌아봐야 할 점들, 많은 다른 사회 문제들이 무관심의 늪 속에 파묻혔다. 미군이 쳐놓은 고압전선에 감전해 고생하다 사망한 정동록씨 사건,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전차에 깔려 숨진 사건 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월드컵 행사의 열광 속에 FIFA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조직이라는 사실도 완전히 묻혀버렸으며, 축구공을 만들기 위해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 아동들이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 월드컵 기간 동안에는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침해도 예사로 일어났다. 정부가 월드컵 전에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는 불법파업과 집단행동을 엄중 처벌하겠다’며 월드컵 경기장 반경 1km와 선수단 숙소 600m 안쪽을 특별치안구역으로 설정해 집해․시위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경찰은 이에 따라 대우자동차판매노동조합이 최근 전국의 월드컵 경기장과 선수단 숙소 등 67곳에 낸 집회신고에 대해 모두 금지 통고를 했다. 또 현행법상 사전신고대상이 아닌 1인 시위까지 금지해 지난 3일에는 서울 ㅁ호텔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던 대우자판 노조 관계자를 연행했다.”(2002/06/08)

2002년 6월 한국에는 가장 많은 ‘빨갱이’가 거리로 나왔지만 6월 13일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정치집단이 승리를 거두었다. 지방자치 선거는 풀뿌리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면 중요한 정치 절차인데도 민주노동당이 그런 대로 선전한 것을 제외하면 보수우익을 위한 잔치가 되어 버렸다. 대통령 두 아들의 부정과 비리가 유권자들의 실망과 분노를 사고, 선거판 자체가 선택의 폭이 없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이번 선거의 결과 지역주민들은 앞으로 4년 동안 우익집단의 전횡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월드컵 현상이 이런 선택을 부추긴 중요한 한 원인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언론모니터팀이 5월 10일부터 6월 7일까지 방송 3사의 선거보도를 관찰한 데 따르면 "뉴스시간을 포함한 방송시간 대부분을 월드컵 관련 내용이 차지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지자체 선거보도가 축소되고 있다."(한겨레 2002/06/11)

축제가 끝난 지금도 사회적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노동탄압이 여전하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전경련을 위시한 경제5단체장은 월드컵 축제를 빌미로 ‘불법파업행위’가 더 늘었다며, 정부가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고, 이 와중에 단병호 위원장은 7월 11일 서울 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월드컵의 축제가 그 자체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7월11일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실천시민연대, 사회진보연대 등 12개 인권단체가 발전노조 인권실태를 조사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오늘 한국에서 노동운동이 어떤 교묘한 탄압을 당하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이 조사보고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가압류, 손배소송이 신종 노동탄압의 강력한 무기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노동자들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서약서를 징구함으로써 헌법이 보장한 양심의 자유를 유린한 사실도 밝히고 있다.” 이 소식을 전하는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의 말은 계속된다. “민주노조에 대한 불법 규정과 노조 지도자들에 대한 신체적 탄압을 주로 했던 독재시대와 달리, 김대중 정권 아래의 신종 노동탄압은 직권중재제도 등 노동 악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헌법이 보장하는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유명무실화시키고, 가압류와 손배소송을 통하여 일반 조합원들에게까지 물질적, 정신적 압박을 준다는 점에서 훨씬 교활하고 발본색원적이다.”(한겨레 2002/07/15)

월드컵 축제가 야기한 지배효과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은 이상의 이유들 때문이다. 월드컵 기간 동안 우리는 현실과 '화면'이 대체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강남 성모병원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병원노조를 찾은 한 TV 방송은 농성 현장 취재를 실컷 하고 난 뒤 정작 뉴스 시간에는 병원 영안실에서 월드컵 경기를 보며 환호하는 문상객의 모습을 내보냈다. 이런 ‘화면’은 문상객과 상주까지 축구경기 시청에 열중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늘 한국의 현실은 오직 월드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만든다. 비난을 해도 좋으니 농성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보도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병원노조 간부의 희망은 이런 태도 앞에서 여지없이 깨진다. 노동과 자본의 모순, 미군에 의한 한국인 인권의 유린, 빈민에 대한 국가의 탄압, 외국인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에 대한 한국사회의 외면 등 수많은 사회적 의제는 적어도 6월 한 달은 월드컵만 존재하는 것처럼 구는 언론의 화면 및 지면 구성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난다. 축제가 아무리 신명이 나고, 거대한 용암처럼 분출하는 에너지로 작용했다고 해도 축제만으로 삶이 모두 꾸려지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나는 월드컵 현상을 축제로 파악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이 현상은 축제 이외의 삶의 면모 일체를 화면이나 지면에서 배제하는 경향에 지배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상황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월드컵 현상은 축제의 관점만이 아니라 축제가 은폐한 문제들의 관점에서도 파악될 필요가 있다.

5. 비판-생성의 관점

축제의 열풍이 휩쓸고 간 뒤 그래서 사람들은 묻는다. 2002년 6월 우리가 꾼 꿈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를 휩쓸고 간 그 바람은 어떤 후폭풍을 가져오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좀더 적극적으로 질문을 제기해보자. 월드컵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우리 삶이 나아질 것인가? 이미 언급한 대로 이번 월드컵은 다양한 의미를 지녔지만 여기서는 ‘월드컵 이후’ 시점에서, 그리고 사회운동이란 관점에서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붉은 악마 현상’ 혹은 거리 응원을 포함한 이번 월드컵 현상에 대한 평가에는 상반된 두 입장이 제출되어 있다.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과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이 그것이다. 위에서 이 두 흐름의 사례는 이미 언급한 바 있으므로 이제 이에 대한 평가와 함께 앞으로 진보진영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월드컵 현상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살펴보자. 이 관점에는 상반된 두 태도가 작용한다. 하나는 보수적 입장이고 하나는 진보적 입장이다. 보수적 입장에서 월드컵이 성공이라고 보는 데는 현실 긍정의 입장이 작용한다. 이 입장은 월드컵 행사가 ‘계층간, 지역간 갈등’을 해소하는 국민 대화합의 장을 제공했다고 보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나아가서 기존의 권력구도를 유지한 채 월드컵의 열매를 따먹자는 전략이다. 이들은 한국팀의 선전을 오늘 우리 사회의 지배적 역관계가 반영된 것이라 보고, 히딩크와 같은 외부의 힘을 빌어 그 구도를 연장하려고 한다.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것이 ‘축구 4강을 경제 4강으로!’라는 구호가 말해주듯 ‘경제주의’ 관점이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이래 우리를 지배해온 경제이데올로기로서 한국사회가 잘 되려면 무엇보다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는 입장으로서, 일면적 진실만을 지닌 이데올로기이다. 경제발전이 삼성그룹, 현대그룹과 같은 자본의 축적과 확장을 의미하는 한 그것 자체로 사회발전을 이뤄내진 못한다. 국가의 신인도나 기업의 브랜드 가치가 아무리 올라가도,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 같은 사람이 아무리 많이 나와도 민중의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월드컵의 성과를 국운상승의 기회로 삼아 ‘세계경제 4강’으로 나아가자는 것은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시민, 학생, 지식인, 동성애자 등의 삶은 어찌되었거나 한국 굴지의 자동차 회사, 조선기업, 반도체기업이 생기고, 세계 갑부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회발전 전략의 결과는 ‘20 대 80 사회’이며, ‘경제 발전을 통한 사회 파괴’이다. 이런 식의 월드컵 이용 방식은 이번에 확인된 대중적 에너지를 활용하여 지배의 구도를 계속 연장하자는 태도이다.  

월드컵 현상을 긍정한다고 꼭 보수적 입장을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붉은 악마 현상을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으로 보거나, ‘6월 항쟁에서 확인된 대중적 에너지의 재현’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경우 우리 사회에 만연된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지니고 있고, 1987년 민주화 운동의 물결이 다시 전개될 가능성을 반갑게 맞이한다는 점에서 월드컵 현상의 긍정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세력과는 구분된다. 하지만 열화 같은 길거리 응원을 대중의 자발적 참여 현상으로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태도에 ‘국운융성’을 희구하는 보수세력과 흡사한 점이 전혀 없지는 않다. 이번에 진보적 민족주의 입장을 지닌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중적 열기를 민족적 에너지의 발현으로 보기도 했는데, 이런 태도가 국운융성을 운위하는 보수적 관점과 어떻게 다른지는 분간하기가 어렵다.

긍정적-진보적 입장에는 또 다른 흐름도 있다. 월드컵 현상을 진보적 민족주의와는 다른 대중의 새로운 사회적 요구가 제출된 계기로 이해하는 흐름이 그것이다. 이 경우 보수적 입장과도 진보적 민족주의와도 다른 관점에서 월드컵 현상이 긍정된다. 이번 월드컵 현상은 복잡성을 띠며, 대중의 반응 역시 복합적이었다는 분석을 따를 경우, 거리 응원도 진보적으로 이해하면 대중의 거리 점유로, 새로운 자기 표현을 위한 시도로, 새로운 권리 확장을 위한 사회적 요구의 제출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월드컵 응원 열기를 90년대 이후 신세대를 중심으로 등장한 ‘팬덤현상’과 비슷하게 보는 방식이다. 이번 대중의 상당수는 수동적으로 응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붉은 악마’처럼 선수와 진배없는 열의와 전문성을 가지고 축구 경기에 임하고, 또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 응원에 참여케 하여 월드컵 현상을 만드는 주체적인 구성 인자가 되었다. 하지만 대중의 이런 점만 강조할 경우 월드컵 현상이 배제한 사회정의 억압의 문제들은 계속 관심 밖으로 내쳐질 우려가 크다. 젊은 사람들의 열정적인 응원을 찬양하다 보면 고난에 처한 민중의 삶이 외면되기도 쉽다. 또 대중의 자발성만 강조할 경우 국가주의, 파시즘에 대한 정당한 우려, 그리고 노동탄압, 미군횡포 등에 대한 비판도 무시될 가능성이 있다.

끝으로 이번 월드컵을 국가주의나 파시즘을 불러일으킬 문제현상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지만 이번에 나타난 일련의 현상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는 월드컵 기간 동안 소수자, 약자, 피지배자의 소외를 돌아보고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옹호하려는 올바른 태도가 들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권운동사랑방이 이런 관점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태도가 과연 얼마나 대중적 설득력을 가질지는 불분명하다. ‘붉은 악마 현상’을 부추기지 말라는 논평을 낸 뒤 이 단체의 홈페이지가 네티즌의 대대적인 온라인 시위에 시달린 것은 단순히 무시할 사안이 아니다. 네티즌의 항의 때문인지 인권운동사랑방은 첫 번째 논평을 내고 얼마 뒤 자신들이 월드컵 기간 삶을 즐기는 대중을 주된 비판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라고 발명한 바 있다. 대중과 국가/자본/언론을 분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지만, 좀더 나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월드컵 현상을 비판적으로만 바라봐서는 진보적 실천의 길이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해석 가운데 첫 번째 해석을 비판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월드컵 축제를 승화시켜 국운상승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자본, 국가, 언론의 입장은 국민동원 전략인 만큼 수용해선 안 된다. 두 번째 해석은 어떨까? 진보적 민족주의 관점이든 대중의 다양성과 자발성을 강조하는 경우이든 월드컵 현상을 긍정적으로 전화하려는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은 생산적인 태도이지만 이미 지적한 대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강조하는 것은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축구 승리나 대중적 신명에 도취되어 국운융성의 지배 전략에 놀아나거나 아니면 사회정의 외면으로 이끌릴 우려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 번째 해석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이미 언급한 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둘째 입장과 셋째 입장의 정확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본다. 국가와 자본과 언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더 나아가서 월드컵 현상에서 가능한 한 많은 진보적인 사회적 요구들을 끌어내는 생성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진보세력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본, 국가, 언론이 장악한 대세를 역전시키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다. 국가와 자본과 언론의 지배구도는 ‘월드컵 4강을 경제 4강으로’ 전환시키자며 새로운 대중동원을 꾀할 것이다. 대중이 이 동원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보세력은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킬 대안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 대안은 지배전략에 대한 비판을 포함해야 하겠지만 더 나아가서 대중을 설득할 만큼 내실 있고, 실현 가능하며, 꿈꾸고 싶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대중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욕구와 욕망과 요구를 진보적으로 해석해내어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켜 사회변혁을 이루는 일이다. 이렇게 하려면 대중을 동원 대상으로 삼으려는 세력과 대중을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6. 새로운 대중의 등장

그러나 과연 이 대중은 누구인가? 이 대중은 어떤 사회적 요구를 제출하는 것일까? 과연 새롭게 볼 대중이 있기나 한 것일까? 조심스럽게 말할 부분이지만 이번 월드컵 기간 동안 새로운 대중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새로운 대중 주체는 1987년을 정점으로 등장한 386 세대와는 다른 것 같다.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은 그 연배가 30대 후반, 40대 초반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듯 이미 기성 세대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요구를 제출한 이 세대를 대체한 세대는 누구이며, 이들은 과연 어떤 사회적 요구를 제출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나타난 세대의 주축은 이제 겨우 20대 초반이 아니면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10대이다. 이들 세대는 아직까지 자신의 사회적 요구와 의제를 명확하게 제출한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이들이 공식 담론의 형태로 자신을 표현할 만큼 성숙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기존 세대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기호의 세 차원인 상징(symbol), 도상(icon), 지표(index)의 관점에서 생각해봤을 때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상징보다는 도상과 지표 쪽이다. 이것은 이 세대가 인터넷의 광범위한 확산과 함께 성장한 세대로서 상징적 질서 체계인 문자만이 아니라 비디오게임, 컴퓨터게임 등 문자 이외의 시각문화의 확산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새로운 세대는 상징적 소통과는 다른 유형의 의사소통 방식에 익숙하다. 그들의 리터러시 혹은 문화적 표현 능력은 문자언어만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근대 민족언어의 문자 체계가 아직 지배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들 세대에겐 지배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아니다. 문자매체의 위치는 20세기 내내 사진, 영화, TV, 애니메이션, 비디오, 컴퓨터 등 무수히 많은 매체들이 출현하면서 계속 흔들려왔지만 인터넷이 주된 매체로 등장한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인터넷은 ‘붉은 악마’ 회원 확보에서나 이번 거리 응원 참가 과정에서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대중의 열기를 확산시킨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여론 조작이나 대중 동원의 수단이기보다는 자발적 참여와 사실 확인 등에 사용되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일부 구세대가 인터넷을 마치 인간성을 마비시키는 매체인양 호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은 이미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필수 조건이다.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매체환경, 그와 연루된 소통방식과 더불어 새로운 감수성, 삶의 스타일, 표현방식이 만들어졌다. 10대 청소년과 여성이 태극기와 태극문양을 사용한 새로운 패션을 선보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신체를 존엄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은 특정 집단이 아니면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태극기 역시 근대역사의 굴곡진 상처로 인해 보호와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이번에 사람들은 거리에서 이 태극기를 머리에 쓰는 두건으로, 어깨 너머로 걸치는 망토로, 젖가슴 가리개로, 치마로, 바지로 다양하게 활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새 세대가 문화적 기호들을 새로운 감성으로 해석하는 것을 목격한다.

또 하나 지적할 점이 있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세대 역시 신체를 가지고, 몸을 기반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흔히 온라인 문화의 특징은 ‘신체의 생략’이라 간주된다. 디지털기술의 특징은 아날로그적 과정을 생략한다는 것, 즉 물리․화학․생물학적 물질적 과정을 생략한다는 데 있다. 2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길거리 응원에 나서 목이 터져라 외친 사건이 주는 교훈의 하나는 디지털혁명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신체를 여전히 소중하게 다뤄야 하며, 이 신체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뙤약볕 아래 몇 시간씩 앉아 경기 흐름에 따라 파도타기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울고 웃는 것은 모두 신체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길거리 응원은 일시적이나마 자동차의 흐름을 막고, 자동차 대신 사람이 거리를 점유할 수 있게 했다. 오늘 한국의 도시거리를 지배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이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자동차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고통스럽게 들이쉬며 다녀야 한다. 월드컵 열기 속에서 군중이 거리를 점유한 사건은 거리가 자동차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함을 인식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 길거리에 나선 대중은 광장을 점유한 소중한 경험을 가졌으며, 특히 신세대의 경우, 1987년 6월 항쟁과 1991년 강경대 정국시기의 가두투쟁과는 다른 거리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관점에서 볼 때 이번 월드컵 현상은 진보세력에게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는 것 같다. 진보세력의 포스트월드컵 과제 하나는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는 일이다. 새로운 세대의 이름은 무엇이라도 좋다. 월드컵을 따서 'W세대‘라 부르든, ’붉은 악마‘를 따서 ’R세대‘라 부르든, 아니면 광장을 점거했다하여 ’광장세대‘라 부르든 상관없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들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들이 자기를 표현하고 조직할 수 있는 조건, 참여할 수 있는 공간, 마음껏 쉬고 노는 여유를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방식, 우리가 ‘주체’가 되는 방식이 바뀔 필요가 있다. 예컨대 오늘 우리 삶을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의 조직 방식, 우리 행위의 관행, 표현의 방식 등을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여기에 성인과 남성 중심의 사회적 구조들을 뜯어고치는 일이 포함됨은 물론이다.

7. ‘문화사회’의 건설

월드컵 현상에서 드러난 대중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실천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며, 특히 사회운동 진영의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운동 진영은 금욕주의, 엄숙주의를 탈피하고 ‘즐거운 혁명’을 실천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즐거운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운동에서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접근이 필요하다고 해서 정치경제적 접근은 불필요하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정치경제적 실천이 사회변혁을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생각한다면, 문화적 실천만으로 세상을 바꿀 것이라 믿는 것만큼 큰 착각이다. 문화적 층위를 배제한 채 사회 구성이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사회의 문화적 실천 측면을 무시하거나 문화적 의제를 외면하는 사회운동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운동의 문화적 접근 혹은 즐거운 혁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일단 ‘놀이’의 시공간을 확대하는 노력, 운동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노는 것은 일하는 것, 노동하는 것과 구분된다. 알다시피 이 구분은 근대적이다. 과거에는 일과 놀이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는 시각에 따르면 말이다. 우리말 ‘놀다’의 뜻을 풀이하면 꽉 맞지 않는다, 얽매여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서로 맞물리는 물건들이 아귀가 맞지 않을 때도 ‘논다’는 표현을 쓴다. 이런 의미의 ‘놀이’는 임금노동의 쳇바퀴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사회에서는 노동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활동이나 실천을 가리킬 수 있다. 근대적 노동의 배치에서는 놀이가 노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노동이 중심이 되었던 만큼 놀이는 사회적 활동 형태로서는 억압 대상이 되었다. 사회운동에서 문화적 접근은 이런 놀이 활동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노력이다. 이 노력은 이번 월드컵 축제에서 드러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이 노력을 문화사회 구성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문화사회’는 일단 임금노동이 인간활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가치 있는 활동으로 간주되는 ‘노동사회’와 구분된다. 노동사회에서 인간의 활동은 노동 활동의 주된 형태인 상품의 생산과 소비, 유통과 관리, 그리고 노동 주체를 양성하기 위한 노동력 형성 혹은 주체화 과정 등으로 환원된다. 인간을 상품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활동만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노동사회인 것이다. 여기서 ‘문화사회’는 이런 노동사회가 지닌 인간적 삶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설정한 개념으로서 임금노동의 강제성을 띠지 않는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이 충분히 가능한 사회를 가리킨다. 이 사회에서 인간의 활동은 상품 생산을 위한 노동에 국한되지 않고 개인과 집단의 자기 계발, 자율적 활동, 환경 및 생태 보호, 호혜적 삶의 영위로 확장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문화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자유시간이다. 자유시간이 없는 사람은 자기 반성이나 성찰, 자기 계발과 교육, 이웃과의 연대, 공동체를 위한 자원봉사 등을 할 여유가 없다. 알다시피 지금 한국인은 OECD 수준은 물론이고 세계적 수준에서도 최장의 노동시간에 시달리고 있다. 문화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시간에만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시간이 일상공간에 침윤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번에 한국인이 경험한 월드컵 축제와 유사한 시간 범주가 일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축제는 생산과 소비의 순환 구조로부터 벗어난 이차원(異次元)의 성격을 갖는다. 이런 축제를 일상화하자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축제가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불규칙적이라면 우리의 일상은 노동이 강요하는 삶의 중압감에 대한 혐오로 너무 괴로울 것이다. 축제를 정례화하여 체계적으로 삶이 활기를 찾도록 하는 해방의 시간을 구조화할 필요가 있다.

문화사회를 구축하는 데에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문화사회가 성립된다고 해서 생산과 소비의 순환이나 노동의 필요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무에서 창조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자유의 세계는 사회적 필요노동이라는 필연의 세계를 전제한다. 베짱이의 놀이는 개미의 노동 없이는 지탱할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문화사회는 노동 없는 사회가 아니다. 맑스의 말대로 자유의 영역은 필연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자유의 공간인 문화사회는 따라서 노동사회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자연을 소재로 한 생산과 소비의 순환이 인류 생존에 필요한 필연성의 세계를 구축한다면, 자유의 영역 즉 문화사회가 구축되는 공간의 조건은 이 세계를 구축하는 노동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사회를 건설하는 노력은 노동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별도로 진행될 수 없다. 노동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계급과 성차, 세대, 지역, 종족이나 민족 혹은 인종 등의 사회적 분할 선분에 의해 돌아가는 갈등과 적대와 모순이다. 이런 모순을 외면한 채 자유시간을 확보할 수는 없으며 문화사회를 구성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이후 ‘문화사회’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동안 우리사회는 노동사회 성격을 너무 오래 유지해온 나머지 노동사회만이 유일한 사회형태로 여기고 노동사회가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들을 마치 자연스러운 문제인양 착각하여 이 문제들을 노동사회 구도 안에서만 극복하려 해왔다. 하지만 월드컵 기간 동안 분출된 여러 사회적 힘들 가운데 주목할 것은 10대와 여성들이 보여준 것처럼 축제 분위기에 대한 심취, 강렬한 자기 표현, 노동거부 등의 현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사회가 생략해온 자유로운 놀이의 시간을 대중이 염원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화사회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운동이 이제 대중의 이런 염원에 부응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8. 사회적 공공성의 구축

하지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노력이 단지 세대와 성차에 대한 배려로 그칠 일은 아니다. 월드컵 현상에서 드러난 10대와 여성의 요구에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하겠지만 ‘광장 세대’가 세대 문제와 성차 문제만 제기했다고 할 수는 없다. 10대와 여성 안에는 세대나 성차와는 다른 사회적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90년대에 출현한 신세대에 ’오렌지족‘, ’탱자족‘의 구분이 있었듯이 지금도 10대 속에는 계급적 분할에 따른 차이와 적대와 모순이 존재한다. 한국팀 승리를 축하하는 뒤풀이 과정에서도 그런 사회적 현상이 확인되었다. 광화문이나 신촌 등에서는 거리를 점유하더라도 기차놀이 등 신체적 접촉을 하는 난장놀이가 많았고 자동차를 타더라도 트럭과 같은 ’서민‘ 운송 이용한 경우가 자주 눈에 띄었다면, 압구정동 등 강남에서는 처음부터 개인 승용차를 타고 나와서 노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분명 강북 쪽 청소년과 강남 쪽 청소년의 소득 수준의 차이와 관련된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세대‘를 꼭 연령 기준에 맞춰 이해하는 것은 잘못인지도 모른다. 사실 연령에 준하여 새로운 세대를 보는 것은 그것대로 수백만 대중의 다양성을 단순화하는 일이다. 신세대의 감수성, 그들의 새로운 감성적 실천, 그리고 여성의 요구도 중요하지만 그 밖의 사회적 대중이 드러낸 특징적 행동, 자기 표현 등도 중요하다. 이는 대중의 요구가 다면적임을 인정하고, 그 요구를 수용하는 통합적 관점을 취하자는 말이다. 나는 이 통합적 접근의 가장 좋은 방식이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공공성의 강화는 성과 세대의 분할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 해소만이 아니라 계급 차별로 인한 불평등까지 해소하려는 사회적 노력의 방향이다. 이를 위해서 월드컵 기간 중에 분출된 에너지, 역동성을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는 힘으로, 사회적 세력관계의 민주적 전화를 요구하는 힘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구체적인 프로젝트 꼴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최근 문화개혁을위한시민연대가 제출한 ‘포스트월드컵 문화사회 만들기’ 캠페인 내용과 동일하다. 우리의 시공간 조직을 바꾸자는 제안이 그것이다. 이 제안은 언뜻 보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어떻게 계획하느냐에 따라서 구체적인 형태를 띤다. 지금 노동운동진영에서 제출해놓은 ‘노동시간 단축’ 요구를 생산과 소비의 일상과는 구분되는 자유시간으로서의 축제 기획과 관련짓는 것이 한 예이다. 노동시간 단축도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투쟁 과제이겠지만 이 운동을 강력한 사회적 요구로 제출하려면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자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나아가서 자유시간을 구성하는 것, 그 작업을 축제 기획으로 제출하는 데에도 구체적인 기획과 계획과 실행이 필요하다. 공간 재조직의 구체적인 형태로는 서울이나 부산, 광주나 대구 등에서 자동차에 지배되고 있는 도시 거리를 사람을 위한 광장으로 전환하는 운동을 생각할 수 있다. 문화연대는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서울의 세종로 거리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들고 주변의 정부종합청사, 문화관광부, 미국대사관, 정보통신부 등 공공건물들을 국립중앙도서관이나 현대미술관 혹은 박물관 등으로 기능을 전환시켜 서울시민을 위한 문화광장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은 바 있다. 이 제안은 건물과 도로가 있는 장소와 그 곳의 환경을 바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발상이나 기획에서 실행계획, 나아가 실제 공사에 이르기까지 실물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땅 위에 건물을 세우고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하게 하는 일은 탁상공론으로 되지 않고 또 여러 상반된 이해관계를 조절해야 한다는 점에서 복잡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이 제안은 구체적이다.

이런 제안은 어떤 면에서 사회적 공공성을 강화하는 노력인가? 우선, 세종로 거리를 문화광장으로 만들자는 것은 이 곳을 공중을 위한 광장으로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로 일대는 전근대에는 왕권이, 식민지 시대에는 제국주의 권력이,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군사독재권력이 지배해온 곳이다. 이런 권력의 공간을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사회적 공공성을 강화하는 일이다. 하지만 세종로를 문화광장으로 만드는 것 자체로 사회적 공공성이 충분히 강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럴듯한 광장을 만들어놓아도 일부 시민만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다면 사회적 공공성을 운위할 수는 없다. 문화광장이 진정 공공공간이 되려면 전문직 종사자, 화이트컬러 회사원만이 아니라, 주부와 10대 청소년, 나아가서 블루컬러․비정규직․외국인 노동자, 동성애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광장의 조성이 우리 사회의 좀더 근본적인 변혁을 전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 세계 최장에 속하는 노동시간을 대폭 축소하고, 이로 인해 생겨난 자유시간에 삶의 여유를 추구할 수 있으려면 민중 일반의 소득이 일정한 수준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비정규직노동자도 ‘자유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사회복지가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광장 조성을 시민운동 차원을 넘어서 민중운동의 견지에서 사고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아가서 민중이 자기 표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문화적 역량을 획득할 필요도 있다. 노동시간과 분리된 축제의 시간과 새롭게 조성된 문화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사람들은 새로운 자기교육이 필요하다. 이 교육은 지금 입시를 위해 구성해놓은 교육내용과는 전적으로 다른 내용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문화연대는 이런 관점에서 얼마 전부터 공교육에 문화교육을 도입할 것을 주장해왔다. 우리 사회의 사회적 공공성을 구축하는 일이 여기서 제안한 것들에 국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내가 언급한 것들은 사회운동의 문화적 측면에서, 그리고 문화연대가 처한 조건에서 준비한 구상의 일면을 말한 데 불과하다.

사회적 공공성을 구축하는 일은 문화사회를 건설하는 기초를 닦는 일이지만 동시에 노동사회를 제대로 건설하는 일이기도 하다. 노동사회를 제대로 건설하는 것은 계급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자본이 지배하는 상황, 국가가 자본의 시장 및 사회 지배를 위한 하수인이 되고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노동사회를 제대로 세워야 하는 것이다. 노동사회를 바로 세우는 일, 그것은 인류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적 삶을 구축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생존 필수적 활동이지만 노동자계급에게 불평등하게 강제되고 있는 노동을 민주화하는 일이다. 이 민주화의 길에 공공영역 구축의 과제가 있다고 본다. 한국은 알다시피 경제성장에 비해 사회적 공공영역이 너무나 열악하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2권에 들지만 사회복지는 OECD 수준으로 최하위 속하고 삶의 질은 더 열악하다. 노동, 교육, 의료, 주택, 환경 부문도 사정이 마찬가지이다. 어느 곳 하나 사회적 불평등이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는 현재 상황을 고치려면 오늘날 경제만을 위한 사회 파괴의 주요 요인인 신자유주의 흐름을 저지하여, 사회적 공공성을 강화하고 삶의 구석구석에 공공영역을 구축해야 한다. 물론 이 노력이 노동사회 혹은 필연성의 세계만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영역은 문화사회, 즉 자유의 공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한 사회의 공공영역은 거기 속한 개인과 집단이 각기 특이성을 발휘하기 위해 공유할 삶의 터전이다. 개인의 자유, 개인적 삶의 특이성은 공공영역 위에서만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이다. 이 공공영역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할 때 사회는 분열하고, 인간의 인간에 의한 비인간적 착취, 소수인간의 다수 인간 지배를 위한 자연의 착취가 계속된다.

9. 결어

2002년 6월의 월드컵 축제 끝났다. 하지만 축제가 일으킨 파장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과제가 떠올랐다. 지배세력은 이 과제를 여전히 자본을 위한 경제 중심으로 해석하려 한다.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필수적이다.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대중 동원 전략은 거부해야 한다. 동시에 진보세력은 또 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대중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면서 대중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이때 진보세력은 대중과 함께 꿈을 나누는 것이며, 대중은 사회변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된다. 어깨동무로 세상을 바꾸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난과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 있다. 그래서 즐거운 혁명이다. 이 혁명으로 새롭게 태어날 세상을 나는 ‘문화사회’라고 불렀다. 가자, 문화사회로!

* 필자는 문화연대 정책기획위원장, 중앙대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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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7/20 [03:1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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