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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대자보’ 3년에 띄우는 글
또다른 변화와 혁신을 기대하며
 
민경배   기사입력  2002/01/30 [20:28]
한국 사회는 인터넷 대안 매체가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기성 보수 언론들의 폐단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계속 누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엄숙함을 미덕으로 삼는 유교주의의 뿌리깊은 전통과 오랜 기간 이어진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로 인해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자유로운 소통에 많은 제약이 따랐던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때마침 폭발적으로 불어닥친 국내의 인터넷 열풍과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정보통신 인프라는 지금까지 굳게 닫혀있던 소통의 통로를 활짝 열어주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맘껏 풀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인터넷 공간을 통해 말하고자 적극 나섰고, 이는 인터넷 대안 매체가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자양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IMAGE1_LEFT}실제로 국내에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즈음, 웹진은 새로운 매체 형식으로서 꽤나 많은 주목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서구의 인터넷 문화가 유즈넷 뉴스그룹을 매개로 한 지식인들의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면, 우리의 인터넷 초창기 문화는 웹진을 근간으로 개척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신선하고 독창적인 실험들이 웹진을 통해 끊임없이 출현했고, 사회적 비주류와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웹진을 타고 폭넓게 전파되고는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웹진에게 ‘대안 매체’ 혹은 ‘독립 언론’이란 호칭을 붙여 주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독립 웹진들의 전성 시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인터넷 공간은 자극적인 컨텐츠가 흘러 넘치는 놀이터이거나 혹은 거래와 투기가 오가는 시장판으로 점점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의 삶과 이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모색하던 독립 웹진들은 하나둘씩 쓸쓸히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인터넷 대안 언론의 맥은 초창기의 그것에 비해 보다 진일보한 모습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비즈니스적 마인드에 입각한 전업형 언론사들이 초창기 독립 웹진들이 퇴장한 공백기를 빠른 속도로 채워 나가면서 대안 언론의 흐름을 주도해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자보>야말로 초창기 독립 웹진의 전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요즘처럼 감각적이고 세련된 언어들이 난무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대자보>란 제호는 사뭇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어딘가 촌스럽고 구닥다리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할까? 그것은 아마도 대자보란 단어가 흔히 386세대라고 지칭되는 이들에게 몇 가지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하얀 2절지에 매직펜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문장들, 그리고 속에 담겨진 선전과 선동, 주장과 반론 같은 것들 말이다. 이렇듯 격렬했던 80년대의 향수가 듬뿍 배어진 대자보란 단어는 왠지 21세기의 디지털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철지난 유행가처럼 다가온다. 더욱이 <대자보>는 진보적 대안 웹진을 표방하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상업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버린지 이미 오래이건만 아직도 ‘진보’와 ‘대안’을 부르짖으며 ‘웹진’이란 돈 안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대자보>의 우직스러운 행보는 발빠르게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고 있는 이른바 ‘신지식인’류의 사람들 시각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이런 <대자보>가 어언 창간 3주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1년은 오프라인 세계에서의 10년과 같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사이버스페이스는 변화의 폭과 속도가 크고 빠른 역동적 공간이란 뜻이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따르자면 <대자보>의 3년은 오프라인에서의 30년에 맞먹는 시간인 셈이다. 묵직한 공론의 장이 쉽게 뿌리 내리기 힘들 정도로 척박한 우리네 인터넷 풍토에서 <대자보>의 존재는 실로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슷한 시기에 우후죽순격으로 만들어져서 한때 독립 웹진의 백가쟁명기를 구가하던 여타 웹진들이 오래지 않아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렸던 현실을 감안한다면 본연의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3년이란 세월을 버티면서 71호씩이나 꾸준히 발행을 이어온 <대자보>의 저력은 분명 높이 살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 웹진은 결코 새로운 매체가 아니다. 그리고 몇몇 소수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비록 현상유지를 가능케 할지는 몰라도 그 이상의 발전을 꾀하기에 분명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뚝심있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대자보>의 모습은 독립 웹진의 맏형답게 믿음직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대자보>가 단지 초창기 독립 웹진의 전형을 간직한 박물관 속의 유물로만 남아 있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 혼돈스럽다고 해도 선명하게 진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뿌리깊은 매체 하나쯤은 우리 곁에 가지고 있어야 하겠기에 하는 말이다. 진정한 진보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 뿐 아니라 변화에 대해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나아가 미래의 비전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오프라인 시간 기준으로 ‘격동 30년’을 넘어선 <대자보>에게 또 다른 변화와 혁신을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관련기사] 정지환, <대자보>에 바란다 <라스트 뉴스>와 <세계를 뒤흔든 10일>, 대자보 53호(2주년 특집호) http://www.jabo.co.kr/53th/53-sp-ju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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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1/30 [20:2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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