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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슈] 채영주 유작시 소동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살아있는 시인의 작품을 유작시로 둔갑ba.info/css.ht
 
두부   기사입력  2002/08/21 [14:59]
소설가 채영주가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를 아는 문인들도 그의 죽음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어느 소설가는 지난 6월 월드컵 거리 응원의 열기를 함께하고 싶어 거리로 뛰쳐나와 응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전화 자동응답기의 음성메시지에서는 채영주의 목소리가 아닌 채영주의 죽음을 듣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고인의 가족들이 그를 해운대에 뿌리고 난 다음에서야 몇몇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기 때문이다.

{IMAGE1_LEFT}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의례적으로 문학계에서도 그의 죽음을 기리는 마당이 마련되었다. 《문학과사회》 가을호는 평소 소설만 써왔던 것으로 알려진 고(故) 채영주가 유일하게 남겼다는 유작시 6편을 게재했다. 이 유작시 6편은 고인의 49재를 지내고 유가족이 전달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유작시는 고(故) 채영주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며칠 후에 밝혀지게 되었다. 이 시들 중 4편은 시인 이수명이 1995년에 낸 첫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세계사)에 수록된 것으로 시인 이수명의 작품이었다. 자신의 시가 한 문인의 유작시가 돼버린 상황에서 시인 이수명이 직접 확인을 했다고 전해졌다. 시인 이수명은 나머지 두편도 고인의 작품이기보다는 그가 평소 애송했던 시일 거라고 덧붙였다. 현역 시인의 작품이 한 문인의 유작시가 된 이 '유작시 소동'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아프다.

◀'고 채영주의 마지막 장편소설 <<무슨 상관이에요>>(2002. 2)

지난 주 몇몇 신문에서는 고인이 평소 시를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그의 유작시 6편이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게재가 되었다고 보도했으며, 그 주에 이 잡지는 발행이 되었다. 나는 이 기사들을 읽으면서, 유독 <그 배는 조난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란 시를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시를 보면서 순간, '이수명'이라는 한 시인을 떠올렸다. 신문에서는 이 시를 읊조리면서 고인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라며 이 시를 죽음의 전조(前兆)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그 시는 고인의 시가 아닌 시인 이수명의 작품이라는 생각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신문 기사에 의탁한 채, 그리고 고인의 유작시라는 타이틀에 이 시는 고인의 유작시라고 못박고 말았다.

그러나 8월 20일 《한국일보》 하종오 기자의 <"채영주 유작시 6편 중 4편은 내 詩">라는 기사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물경(勿驚), 고 채영주의 유작시가 아니었다. 분명 그 시는 시인 이수명의 첫시집에 수록된 이수명의 작품이었다. 아뿔싸! 고인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살아 활동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내가 가늠이라도 할 수 있을까. 나는 고인보다도 이수명 작품에 대해 열렬한 팬임을 고백한다. 먼저 세상을 등진 문인은 자신이 평소 애지중지 아끼며 간직했던 시가 유작시가 되었고,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 문인은 자신의 작품이 유작시가 된 이 상황에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질책해야 하나?

이에 《문학과사회》측은 이미 발간된 잡지에 '바로잡습니다'라는 경위문을 작성해 배포하겠다고 밝혔다. 분명 비난의 화살은 상당 부분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한 《문학과사회》측에 있을 것이다. 이 시들을 확실하게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유가족이 전해준 시를 '유작시'라고 단정짓는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라는 이름으로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년 9월)에서부터 현재 채호기의 《수련》(2002년 6월)에 이르기까지 264권의 시집을 낸 대형 출판사답지 않는 불성실함은 고인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시인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어처구니 없는 처사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 배는 조난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란 시를 죽음에 임박한 고인의 처절하고 외로운 상황으로 읽혀지게 했다는 것이다. 정작 이 작품의 주인인 시인 이수명의 시적 세계관과 가치관과는 별도로 이 시를 엉뚱한 사람에게 대입시켜 다르게 해석한 것은 평소 정과리를 위시한 한국문학의 최고봉들이 산재하다는 문학과지성사 간판 평론가들의 행태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시인 이수명의 첫시집 제목처럼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운 것이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과장된 포즈를 취해본다. 지금까지 문학과지성사 간판 평론가들은 공갈을 쳤나? 이번 채영주 유작시(遺作詩) 소동은 《문학과지성》측의 불성실하고 어리석음이 저지른 일이 분명하다.

한 문인이 세상을 등진 지 100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시인은 앞으로 그의 시적 정열을 불태울 날이 많이 남아 있다. 이번 일로 천국에서, 지상에서 모두 상처를 입지 않았으며 하고 바란다. 그러나, 나는 두 문인을 불현 듯 생각할 때면 가슴이 아플 것 같다. 아래의 시 4편은 고(故) 채영주의 유작시로 그릇되게 전달된 이수명의 시이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빌며, 지상에서 시와 전투할 시인에게 건필을 빈다.

그 배는 조난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

그 배는 조난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해의 길이가 짧아졌다 길어졌다 하고
어깨 너머로 다른 어깨들이 또다른 어깨들을 지웠을 뿐이다.

그 배는 조난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최후의 조난신호였다.
아무도 그 섬에 가고 싶지 않았다.

계 단

차마 타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너는 자꾸 오만해져 간다.
이 분별력, 이 완강함의 사선대열은 늘어나는 치욕 때문에 춥지 않았다.
버릴 수 없는 도정, 버릴 수 없는 육체의 이 오랜 변명
도망가는 길을 노출시키고 너는 자꾸 오만해져 간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안경이 떨어진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안경이 떨어진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웃을 때마다 먼지가 떨어진다. 먼지가 하얗게 웃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때마다 사람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안경이 여기 있다.
떨어진 머리카락이 여기 있다.
떨어진 먼지가 여기 있다.
떨어진 사람들이 여기 이렇게 있다.

나는 한없이 헐거워져 나는 수줍고 나는 한없이 떨어져 내리지 못해 나는 여기 없다.

고개를 들 때마다 해가 떨어진다.

너의 노래

밤마다 너의 노래를 품고 잠든다. 너의 노래는 인적이 끊긴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벌판 한가운데로. 나는 신발이 벗겨지고 나는 날마다 같은 지점에서 길을 잃는다. 기타줄이 모두 끊어졌다. 너의 긴 손가락들도 끊어져 눈처럼 녹아 흘러갔다.
너의 노래는 고아가 되어간다. 밤마다 너의 노래는 노래가 되지 못한다.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 너의 노래를 벽에 건다. 밤마다 나는 치유된다. 밤마다 너의 노래는 벽에서 걸어나와 한 줌의 재가 된다. 밤마다 내가 품고 잠든 것이 마치 비수가 아니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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