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두부독감 9] 로봇이 일으킨 반란이 아니다
인간과 로봇 중 누가 인간인가?ba.info/css.html'>
 
두부   기사입력  2002/07/31 [15:04]
사이보그의 세계

{IMAGE1_RIGHT}14220469103026100151022
31029402150321100141035
30223오늘의교통사고사망10
부상107유괴알몸토막310349
31029403120469103012022
3039560보험금노린3044935
59203발목절단자작극103921
31029403120469103012022
개미투자자음독자살0014103
33엘리베이터안고교생살인극
14220469103026100151022
3102탈북9402150꽃제비204
15392049586910295849320
50203046839204962049560
5302아프리카에서종말론신자
924명집단자살20194056293
01죽음은기계처럼정확하다01
10207310349201940392054
눈물이 나오질 않는다

전자상가에 가서
업그레이드해야겠다
감정 칩을

이원, <사이보그3 - 정비용 데이터B>


인간은 사이보그 세계에 살고 있다. 기계문명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는 현대 자본주의의 극단은 이렇게 감정까지도 '칩'으로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핸드폰이라는, 인터넷이라는, 자동차라는, 엘리베이터라는 기계문명의 소산들은 점점 인간들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기계는 이제는 인간을 필요하게 된 것이다.

기계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없으면 기계들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을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급기야 17세기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인식론을 시인 이원은 "나는 클릭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며 21세기의 인식론을 확립했다.

인간과 로봇 중 누가 인간인가?

{IMAGE2_LEFT}까렐 차뻭은 20세기 초반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그는 희곡 『로봇』에서 사용했다. 희극적인 서막과 3막으로 구성된 집체극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SF문학이라고 일컬어지며, 당시 쁘라하 국립극장에서 연극으로 올려졌고, 이후 공상과학문학을 시발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드는 이 회사의 대표 도민은 인간이 얼굴에 땀을 흘리며 빵을 얻지 않아도 되고, 어떤 고된 임무와 노동, 근심걱정이 없으며 오직 인간은 자아를 실현하고 천지 만물의 주인이 될 거라며 호언장담한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인간이 아닌 로봇이 일을 진행시키며 단지 인간이 이를 감시할 뿐이다.

어느 날 이 회사에 로봇을 해방시키려는 목적으로 인권연맹 회원인 헬레나가 방문한다. 그녀는 신의 창조 행위를 모방한 인간은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될 거라며 도민에게 충고하지만 도민은 자신만만하다. 도민은 로봇은 생명에 집착하지 않으며, 영혼도 본능도 없기 때문에 마당의 잔디보다 로봇은 살려는 의지가 없다며 안심한다.

그러나 도민은 로봇보다 더 로봇'적'이다. 로숨 회사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헬레나에게 말하는 것이나, 정확한 시간에 연연해하며, 헬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기계적인 구애를 하고 회사의 중역들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꽃들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인간들도 더 이상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으니 자식을 낳지 않는 '불임의 역사'가 시작된다. 모든 것들이 로봇의 영역이 되고 그만큼 로봇의 비중이 커질수록 인간의 땅은 '로봇의 땅'이 된다. 만국의 로봇들이 공장을 접수하고 인류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 많은 로봇들은 어디로 갔을까?

수많은 영화에 로봇들이 등장한다. 소위 말해 SF영화에서 로봇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문명을 파괴하고 단절시킨다. 그러나 인간이 더욱더 편리하고 행복하기 위해 만든 로봇은 다름아닌 인간의 탐욕의 소산이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미래 사회를 파괴시키고 단절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미래의 시대를 로봇시대로 꿈꾼다. 그러나 미래의 로봇시대는 행복하기만 할까? 많은 영화에서 로봇들은 태어나지만 다시 존재에서 '무(無)'로 돌아간다. 인간이 상상하는 미래의 로봇시대는 장밋빛이 아니다. 로봇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는 혹은 그럴 가망성이 있는 미래시대을 인간은 장밋빛이 아닌 핏빛으로 만들어가고 가고 있다. 더 이상 로봇은 로봇이 아닌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희곡 『로봇』에서 여자 로봇 헬레나와 로봇 쁘리무스가 성이 구분되고 인간의 감정을 가지게 된 이후 이들은 축복을 받으며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탐욕한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든 로봇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들의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불평등한 관계일 뿐이다. 생산성에 역점을 두는 자본가와 그 자본가의 욕망에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려야만 하는 인간 로봇, 노동자. 인간의 욕망으로 태어난 로봇들은 이제 그만이어야 한다. 그들 모두는 결코 인간의 삶이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 자본가는 로봇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그 또한 로봇처럼 삶을 영위하며 기계문명의 노예로 즐겁게 살아갈 것이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07/31 [15:04]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