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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이런 헝그리 저런 헝그리
한 남자의 고독에 관한 보고서
 
공희준 Cinema Jockey   기사입력  2002/07/09 [22:34]
{IMAGE1_LEFT}내가 살았던 동네에는 세계 챔피언이었던 유제두가 운영하던 '유덕체육관'이란 권투도장이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네 형들이 이소룡의 쌍절곤을 휘두르는 저녁 시간, 공장을 다니는 다른 형들은 마포 배수펌프장 바로 곁에 있던 그 체육관에 가서 세계챔피언의 꿈을 키우며 샌드백을 두드렸다. 지금은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조차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TV중계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쇠락한 프로복싱이지만, 전성기 김득구가 복서로 활동했던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권투는 고교야구와 더불어 양대 인기스포츠로 군림했다.

나이 어린 안내양이 피곤에 겨워 졸고 있는 콩나물시루 같은 시내버스를 타고 일터에 나가, 점심에는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저녁에는 아끼고 아껴 남겨둔 계란 한 알을 풀어 삼양라면을 끓여먹는 김득구의 하루는 전태일의 분신과 더불어 시작된 70년대를 관통하는 가난한 한국청년의 자화상이었다.

챔피언은 우리에게 고독과 배고픔이란 두 가지 화두를 던진다. 나는 애당초 흔히 헝그리라 통칭되는 배고픔의 함의와 한판 스파링을 하고자 극장에 갔었다. 105평 빌라를 세 채나 빌려 유복하게 살았던 명문가 출신의 대통령 후보조차 헝그리 인생역정을 자처할 만큼 배고픔은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는 추억(혹은 현재진행형)의 코드이기 때문이다. 오프닝 화면이 올라가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애초의 결심은 한 남자의 고독에 관한 천착으로 급작스럽게 방향을 선회했다.

나는 권투와 축구를 떠올린다. 두 종목 모두 헝그리 스포츠의 대명사다. 특별한 도구와 장비의 도움 없이 전자는 글러브 두 개에 의지해 승부를 가르고 후자는 공 하나로 승패를 나눈다. 11명이 팀을 이뤄 다투는 축구보다 좁은 링에서 홀로 대적하는 권투가 조금은 더 고독해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축구도 권투만큼 고독해질 수 있음을 나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알았다. 페널티킥을 차기 위해 11미터 거리를 사이에 두고 골키퍼와 맞선 이을용과 안정환의 고독함은 다운당한 복서의 그것만큼이나 몽롱함과 멍멍함이 뒤섞인 것이었으리라.

모든 배고픈 인간은 고독하다. 그렇다고 모든 고독한 인간이 배고픈 것은 아니다. 고독과 배고픔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쌍을 이뤄 인간에게 다가온다. 김득구는 배고픈 동시에 외로운 인간이었다. 매혈을 해서 풀빵을 사먹고 돈을 갈취한 건달을 쫓아가 똥물을 끼얹는 김득구에게는 생존의 처절한 배고픔이 배어 있다. 부침하는 불행한 가정사에 따라 백씨에서 이씨로 다시 이씨에서 김씨로 성을 바꾸며, 복서와의 교제를 반대하는 애인 아버지와 교회에서 마주친 김득구의 형형한 눈빛에는 실존의 아득한 고독함이 묻어 난다.

절대고독의 상태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사각에 선 복서의 고독이야말로 그것에 가장 근접해 있을 것이다. 링사이드에서 끊임없이 주문을 외쳐하는 코치도 복서의 고독을 덜어줄 수는 없다. 복서가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아니면 상대에게 얻어맞아 캔버스에 벌렁 드러눕는 길뿐이다.

스무 몇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김득구의 빠른 죽음보다 레이 맨시니와의 경기에서 쓰러질 때까지 끝내 그를 떠나지 않았을 긴 고독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저려오게 한다. 거울에 자신의 전신을 비추는 김득구에게 김현치 관장이 했던 말처럼 그는 굳이 복서가 되지 않았더라도 죽는 날까지 자기와의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인물이었다. 그 싸움에서 김득구가 이겼는지 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전부가 삶의 마지막 지점까지 잠시도 자기와의 싸움을 멈출 수 없다는 냉혹한 사실이 비정한 링의 세계처럼 우리가 숨쉬는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IMAGE2_RIGHT}링의 세계는 그 비정함 이상으로 공정하다. 링에 올라가는 모든 이는 두 팔만을 이용해 싸워야 한다. 복싱은 정직하다. 매를 맞으면 체급이 어떻든 궁극적으로 너도 나도 틀림없이 그로기 상태에 빠진다. 현실의 세계는 권투처럼 공정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 소록도로 간 세도가의 아들은 알량한 봉사활동으로 언론의 화려한 조명에 휘감기는 반면, 연평도 바다의 군대간 범부의 자제는 살떨리는 적함의 십자포화에 사정없이 노출되어야 한다.

레퍼리는 쓰러진 복서에게 평등하게 열을 센다. 열을 셀 동안에 일어나지 못하면 패배자로 기록된다. 링 밖 한국사회의 주류로 행세하는 권문세족과 문벌귀족들이 여론의 혹독한 뭇매와 시민사회의 사나운 몰매를 맞고 쓰러지고 엎어져도 심판관을 자칭하는 거대신문회사들은 결코 카운트를 하지 않는다. 외려 문벌귀족과 권문세족의 세컨드 노릇을 기꺼이 자임하며 맷집을 불리는데 일조하는 것이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다. 귀족이 북치고 신문이 장구치는 사회에서 가난한 청년들에게 부여되는 숙명은 대개가 인생의 링에서 무력하게 KO패한 무능한 낙오자란 손가락질이다.

파란 동해바닷가의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외로운 소년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고급호텔에 마련된 특설링 위에 와서야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맨시니의 매서운 펀치를 감당한 김득구의 안면은 식별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부어 올랐다. 얼굴의 부어오름을 기름기 없는 홀쭉해진 배에 포만감을 안겨줄 마지막 탈출구로 삼은 김득구의 고독한 선택에 견주면 위대한 정치가와 야심만만한 군인의 역사적 결단은 저절로 다리의 힘이 풀린다.

가난과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링에 올랐던 젊은이들이 이후에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려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싸구려 튀김 장사 하나에 생계를 걸었던 우리집 외상값을 떼먹고 유덕체육관에 등록했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공원(公員)의 후일담을 나는 모른다. 숨이 콱콱 막히는 비좁은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두들기던 빈곤한 청년들은 챔피언의 희망을 접고 전국 각지로 모래알처럼 흩어져갔을 것이다.

나는 가끔씩 복서와 검객과 논객이 비슷한 존재론에 발 딛고 서있음을 상상한다. 상대를 공격하려면 부득불 나를 보호하던 가드를 내려야 한다. 나의 공세는 곧 내 스스로 나의 허를 상대에 내보임이다. 적의 약점을 공격하기 위해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내 약점을 드러내야 한다. 내가 날린 칼날과 주먹과 논리가 허공을 가르고 빗나가는 순간 어느 틈에 적수의 날카로운 카운터 어택은 훤하게 열려진 내 몸통과 안면에 적중한다. 그토록 두렵던 상대의 가격을 막상 몸으로 접할 때 고통은 되려 실감나지 않는다. 거꾸러지는 나의 아픔에 관중들은 환호하고, 무심한 심판관들은 나의 고통의 늘어남과 생명의 줄어듦을 차가운 채점표에 싸늘한 수치로 기록할 따름이다.

불멸의 신조차 나의 비틀거림을 부여잡지 못한다. 어제의 내가 상대를 쓰러뜨림은 내일의 또 다른 내가 타자에 의해 허물어짐을 예비한다. 그럼에도 복서와 검객과 논객은 싸움을 멈출 수 없다.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싸우는 복서와 검객과 논객은 만화와 신화와 영화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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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7/09 [22: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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