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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프레임의 자기파괴적 속성
[인물과사상의 눈] 극우보수의 함정, 시민사회가 적절하게 대응해야
 
김종대   기사입력  2014/01/13 [00:54]
다시 문제가 된 종북 프레임

국정감사가 한창이던 2012년 말에 육군 교육사령부 고위관계자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 국정감사차 교육사령부를 방문한 여야 의원들이 감사를 마치고 떠나는 순간 교육사의 대령급 정훈장교가 민주당 진성준 의원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퍼부은 사건 때문이었다. 언론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내심 이 사건에 격분한 진 의원은 그 직후 예정된 국방부 종합감사에 교육사령관과 문제의 정훈장교를 증인으로 신청하기로 했다. 그러자 애가 탄 교육사령부가 진 의원에게 뒤늦게 사과한 것으로는 맘이 안 놓였는지 나에게 전화해 “‘증인 신청을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진 의원에게 전달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내막을 짐작하기 어려워 부탁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육군 교육사령부는 반유신·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종북 행위라고 규정한 『나의 조국!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제작하여 육군이 ‘종북 세력 실체 교육’ 교재로 활용하도록 했다. 진 의원이 9월에 이를 문제 삼자 국방부는 뒤늦게 자료를 회수하여 폐기한 바 있었다. 국정감사 시에도 계속 이 문제를 제기하는 진 의원에 대해 교육사령부 관계자가 감정적으로 대응했던 게 나중에 밝혀진 내막이었다.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하고 1년이 지난 지금, 선거가 끝나면 수그러들 것으로 여겨졌던 종북 논란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이제는 선거와 관계없이 ‘종북 프레임’의 문제가 여론의 중심 의제로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이다. 2013년 11월 말에 박근혜 대통령이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신부의 발언을 염두에 두고 “국내외의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행동”이라며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홍원 국무총리는 아예 박 신부의 발언이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적에 동조하는 행위”라며 ‘종북’으로 규정했다. 바야흐로 ‘종북 세력과의 결전’이라는 박근혜식 공안통치가 계속될 것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미 종북 프레임의 여파는 통합진보당, 전교조, 전공노, 종교단체 등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상황이다.

때마침 2013년 12월 초에 출판된 문재인 의원의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는 “지난 대선에서 종북 프레임의 성공이 박근혜 후보의 결정적인 승인이었다고 판단한다”면서 “거꾸로 말하면 그 프레임에 무력했던 것이 저와 민주당의 결정적 패인이었다”고 밝혔다. 이튿날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종북 프레임 때문에 졌다, 종편 때문에 졌다, 안철수 때문에 졌다 등 자기 책임은 없고 남 때문에 졌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면서 “자기 반성과 성찰 없이 남 탓만 하는 것은 대선후보였던 분으로서 뻔뻔하고 스스로에게도 민망한 일”이라고 반격했다.

최근의 논란을 살펴보면 한편으로는 국정원의 대선 개입 수사와 국정원 개혁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사와 개혁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종북 공안몰이가 활용되는 정치·심리적 내전 양상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굳이 도식적으로 단순화한다면 민주적 가치와 안보적 가치라는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다. 민주와 안보는 사회의 중요한 관념적 구성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잠식하는 구도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공방의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의학에서는 ‘자가면역’이라고 한다. 즉, 몸속의 항체가 자기편인 신체 일부를 공격하는 것으로,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곧바로 통증과 함께 식욕 감퇴, 체중 감소,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우리 사회의 종북 프레임 공방이라는 일종의 자가면역은 사회의 지성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극심한 피로감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국가가 인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2012년, 북한 없는 북풍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지금의 종북 프레임 공방이 왜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질문하는 사람이 드물다. 2~3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이런 종북 공안몰이가 기승을 부리고 정치를 좌우하는 문제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2012년 대선에서 북한 문제가 선거의 중심 의제로 등장할 가능성을 예상하거나 기대했던 인사가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에서도 거의 없었다. 대선 때의 ‘NLL 영토 포기 논란’으로 초래된 북풍몰이는 확실히 과거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특징들이 있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여태까지 선거에서의 북풍은 북한이 주체가 된 구체적인 사건을 수반했는데, 2012년 대선에서는 북한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아무런 사건도 없이 북풍이 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1987년 KAL기 폭파 사건·1992년 이선실 간첩 사건·1996년 판문점 북한군 난입 사건·1997년 황장엽 망명과 오익제 월북 사건 등 선거 때마다 우리의 시선이 온통 북한을 향하게 만드는 모종의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런데 2012년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이, 당시 북한의 동향과도 무관한 7년 전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문제가 되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만일 북풍이 기획되었다면 하다못해 대선 3년 전에 벌어진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라도 끄집어냈어야 한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대선 기간 내내 이 두 사건에 대해 거의 언급한 적이 없다. 오직 실체가 모호한 ‘NLL 영토 포기 논란’이라는 전혀 작품이 될 것 같지 않은 의제를 등장시켰고, 더 이상하게도 민주당은 이런 공격을 적시에 차단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말려들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 효과도 의문이었다.

10월 초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논란이 처음 제기되자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쓸데없이 북풍 논란만 일으켜 역풍이 부는 것 아니냐”는 소장파들의 언급이 언론에 여과 없이 보도되는가 하면, 박근혜 후보가 이 논란에 뛰어드는 일은 일체 없었다. 민주당은 앞서 말한 문재인 의원의 자서전에도 밝힌 것처럼 정문헌, 서상기 의원의 ‘NLL 영토 포기 의혹’에 소극적으로 반응하거나 상당 부분 무시하기까지 했다.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이 문제가 중심 의제로 떠오른 것은 11월 중순이 지나서였다. 그 이후의 선거는 새누리당 선거 캠프가 완전히 NLL 등 안보 문제에 몰입하면서 종북 프레임이 선거에서 작동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박근혜 후보가 직접 총대를 맨 것도 확연히 달라진 점 중 하나였다.

이렇게 보면 2012년의 북풍몰이는 ‘북한 없는 북풍’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적어도 이 점에서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에게는 민주주의가 성숙화 단계로 진입한 한국 사회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게다가 그 효과도 엄청났다. 2013년 12월 1일 전국 성인 800명을 대상으로 ‘노컷뉴스-포커스컴퍼니’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5퍼센트가 ‘국가기관 선거 개입이 18대 대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답하고 아니라고 대답한 경우는 38.5퍼센트였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이상한 점이 드러난다. 만일 북한의 행동이 선거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은 대선 일주일 전인 12월 13일에 북한의 광명성 3호 발사가 성공한 사건이어야 했다. 적어도 이 사건은 이제까지의 실패와 달리 북한이 최초로 장거리 로켓 발사에 성공했기에, 한반도 판 ‘스푸트니크의 충격’이라고 불릴 만했다. 그런데 이 사건조차도 대선에 활용되지 않았다. 이 점이 과거의 북풍과 극명하게 다른 점이다.

그 연장선에서 최근의 종북 프레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박근혜정부는 출범 이후 지난 1년여 동안 특별히 북한을 자극하거나 적대적인 표현을 구사한 적이 거의 없다. 정부 출범 직전에 북한의 3차 핵실험이 있었고 3월부터는 본격적으로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지만 이에 대해서도 예전에 비해서는 ‘차분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또한 이 시기에 북한이 주체가 되어 우리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과 소위 ‘RO 조직’ 사건도 북한과의 직접적인 연계성은 밝혀진 바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 종북 프레임으로 짜여진 공안통치의 국정 기조는 더욱 강화되었다는 역설이 발생했다. 이것도 역시 이상하지 않는가? 통합진보당, 전교조, 민주노총, 전공노가 북한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었다는 근거도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종북’이라는 개념이 ‘북한을 추종하는 성향이나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북한이라는 주체 또는 주어가 사라진 종북’처럼 보이는 이 이상한 프레임은 어떻게 구성된 것인가?

핵심은 안보 프레임의 내적 논리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던 북풍과 종북 프레임이 더 확산되고 있는 이 이상한 현상에 대해 우리가 미처 성찰하지 못했던 점이 뭘까? 여기에서 우리는 종북 프레임이라는 사회현상이 드러난 결과만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 면밀하게 이 프레임이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내면 논리에 대해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국가기관이 선거에 직접 개입할 만큼의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파괴하는 데는 나름 그들이 구성한 논리와 체계가 있다.

첫째, 극단화된 비관적 국가관이다. 종북 논리를 주로 생산하는 주체인 군 당국이 국가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태도는 “국가는 안보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가정을 신봉한다는 점이다. 앞서 소개한 교육사령부의 교재에도 “월남과 중국은 극소수의 이적세력에 의해 공산화가 되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즉 아주 미묘하고 사소한 사건, 또는 극소수의 세력에 의해 국가 안보가 실패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교육사령부가 교재에서 “핵심 종북세력 5만 명, 추종세력 300만 명”이라고 주장한 것은 국가 자체를 치명적으로 붕괴시키는 데 충분한 숫자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다. 물론 여기에도 숫자가 산출된 근거는 모호하다. 이러한 가정은 국가에 대한 불안 심리의 반영이다.

둘째, 민주주의 체제는 전체주의와의 대결에서 불리하다는 가정이다. 물론 이 가정은 교육사령부 교재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논리와 모순된다. 그러나 교재에서도 지적하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전체주의에 비해 ‘우월’한 것이지 ‘유리’한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는 잘 단결되어 있는 반면에 민주주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모든 우익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갖는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의 창시자인 조지 케넌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따금 저는……민주주의가 이 강의실만큼 커다란 몸집에 바늘만 한 크기의 뇌를 가진 선사시대 괴물과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궁금증이 일곤 합니다.”

여기에서 케넌이 강조한 자유민주주의의 문제는 어리석은 대외 정책을 채택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약점’에 대한 인식이 수입되면서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양상으로 변질된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수시로 말한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발언의 요지도 민주주의는 더없이 나약하고 관대하고 혼란스러운 제도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체주의에 비해 불리한 점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약점을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것이 바로 군대라는 집단적 힘이 적인 종북 세력을 상대로 진행되는 ‘사상전’을 전개하는 이유가 되며, 민주주의와 안보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배치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안은 남북한의 평화통일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이 점은 정신 교육을 경험한 장병들의 증언으로도 확인되는데, 그 주된 논리는 만일 남북한이 합의에 의해 통일이 된다면 북한은 유일당이고 남한은 다당제이기 때문에 선거를 하면 북한 노동당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법률주의와 도덕주의의 결합이다. 이것도 역시 미국에서 수입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체주의 체제의 완전 종식과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하는 대량전을 수행했다. 전쟁의 목표는 나의 법률과 도덕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것이고, 이것이 상대방 체제의 완전 붕괴와 국가의 파멸, 다수의 민간인 피해를 정당화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어쩌면 종족 말살까지도 불사해야 했기 때문에 이후 미국 내에서도 ‘과도한 대외문제 개입’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했고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국가는 정치체제를 불문하고 생존과 안보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현실주의 사상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하면서, 이러한 법률주의와 도덕주의의 결합은 대외문제 해결에서 위험한 사상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우리는 유독 북한에 대해 강한 법률적·도덕적 접근법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가부장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과도한 도덕적 의무까지 진다. 여기서 비로소 안보 세력은 북한에 대한 우월감과 함께 사회 내부의 북한 우호 세력에 대해서까지 도덕적인 교화와 교정, 체벌의 의무까지 지는 것이다. 물론 그 누구도 그들에게 이러한 도덕적 재판관이라는 특권을 부여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도덕관념에 의해 자신의 의무를 확대한다. 이 상황에서 종북이란 단순히 북한의 정책에 ‘동의’하는 수준만이 아니라 북한의 정책을 ‘이해’하려는 태도까지 포함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특징이 현대 민주주의로 성숙화되는 한국 사회에는 강력히 결합하지 못했다가 최근에 와서 더욱 강하게 결속되어 종북 프레임의 내적 원리로 작동한다. 이 원리가 살아서 움직인다면 구태여 사건은 필요가 없다. 이미 심리적·도덕적·법률적 요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굳이 북한의 구체적인 개입이 없더라도 우리 자체의 원리로 종북과의 사상전이 수행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사회적 동원’에 의한 우익 운동

국가에 대한 불안 심리와 그 연장선에서 나타난 우파 운동이 이제 와서 일정한 사건을 수반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 정부가 주도하는 각종 공안통치와 달리 현대의 정치 운동은 시민이 직접 참여해 자체적으로 그 운동성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허재영과 김용호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적용: 주요 선거에서 북한 변수」(『한국과 국제정치』, 2012년 겨울)에 따르면 여기에는 크게 네 가지 단계가 있다. 1단계 문제제기(problematization), 2단계 관심끌기(interessement), 3단계 등록하기(enrollment), 4단계 동원하기(mobilization)로 이루어지는데, 과거에는 정부가 이 모든 과정에 직접 개입하고 관리했다. 그러나 네트워크로 구성된 현대 사회에서 이 과정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선 동원되는 자원이 과거와 달리 다양하기 때문이다. 2012년의 대선은 바로 동원하기의 성공에서 북풍몰이가 성공했던 사례라고 할 수 있고, 지금도 역시 그 기제는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국가기관들이 말했던 사상전의 핵심은 바로 ‘동원하기’에 맞춰져 있다.

사상전이 전면적으로 강화되면 북한의 주장에 대한 ‘동조’라는 협의의 종북 개념을 넘어 북한 주장에 대한 ‘이해’도 종북에 해당된다는 확장된 개념이 등장하면서 북한에 대한 추종 유무와 관계없이 북한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도 불온시된다. 북한에 대한 ‘동시화된 편견(synchronized bias)’이 강요되며, 북한과 야당의 이미지를 일체화하는 국내 정치적 과정이 전개된다. 더 많은 동원을 위해 북한에 대한 확실한 태도를 요구하는 윽박지르기와 대답 강요하기가 자행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북한과 동일시해버리는 일종의 마녀사냥이 준비된다. 이것이 사회적 처벌·배제·추방의 기제가 된다.

한편으로 종북 프레임은 국가주의 우파의 우월한 위치를 지속하기 위한 핵심 요소이며, 충성해야 할 절대적 가치라서 국가와 건국·안보 세력의 영웅화, 신성화를 조작한다. 또한 안보 세력(군·경찰·정보기관)의 성직자화를 도모하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 주요 안보 사건을 조작해 영웅을 만든다. 그러면서 위기와 불안 상황을 조성해 “국가는 불안하다”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우리는 “북한에 비해 불리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킨다. 또한 이러한 프레임을 저장하는 집단기억으로 역사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러면 국가주의 우파의 이러한 우월주의 사상, 거기서 유래한 종북 프레임은 과연 성공할 것인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 지난 대선 때 야당이 보여주었던 두려움(종북좌파 이념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몸 사리기), 책임 회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도 방치하거나 무시), 배타성(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집단의식)은 종북 프레임에 대한 적절한 진단과 대응에 실패하도록 했던 정서적 배경이 되며, 역설적으로 지금 정부가 공안통치에 더 경도되도록 한 이유를 제공했다. 사실 종북 프레임은 그 자체적으로 상당한 실패 요인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과도한 역사 왜곡이다. 우월감을 관념화하기 위한 역사 왜곡은 보수 정권의 최대 ‘정치적 급소’로, 과거 친일문제·한국전쟁의 왜곡된 신화, 군사 쿠데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적어도 역사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이를 자신의 약점으로 인식하고 필사적으로 왜곡한다. 둘째, ‘결과’적으로 안보 실패다. 안보를 강조하면 할수록 정작 보수가 안보에 무능한 지점이 더 많이 발견된다. 이럴 경우에 안보 실패를 종북 세력에 전가하는 장치가 절박하게 필요하다. 셋째는 민주적 절차 위반이다.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과 군의 정치적 중립에 위배되는 불법·탈법이 지속될수록 사회 공동체의 존립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게 된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당연히 보수의 정치적 급소를 적절하게 공략하되, 이 프레임이 갖는 내적 논리를 정확히 관찰하고, 안보 본연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제시해 합리적 보수층 일부까지 아우를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종북 프레임이라 하더라도 그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시민사회가 적절하게 대응하면 그 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입니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13년 11월 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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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1/13 [00:5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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