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나는 서울특별시민들이 싫어요
[정문순 칼럼] 서울이 바뀌면 대한민국 변화, 대선에서 양식 회복해야
 
정문순   기사입력  2012/10/11 [21:28]
4년 전 전소된 숭례문이 대선을 즈음하여 복구를 마칠 것이라고 한다. 화재 당시 잿더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쳤으니 돌아온 국보를 맞는 행사는 얼마나 요란하게 치를지 모르겠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은 국보 1호를 대하는 마음이 모두 자신과 같지는 않음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망한 왕조의 유물을 떠받드는 건 그들 사정이지만, 봉건왕조 시대 서울의 관문을 국보 1호로 삼거나 광화문을 복원하는 사업의 떠들썩함은 나 같은 지방민에게는 어리둥절함이 앞선다. 그것이 서울 패권주의의 상징으로밖에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서울 사람들이 싫다. 첫째는 무식이 넘친다는 것. 내가 창원에 산다고 말하면 충북 청원으로 알아듣는 서울 ‘촌놈’들도 있다. 구파발이니 방배역이니 서울의 평범한 동네나 지하철 역 이름을 전 국민이 아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말이다. 세계 굴지의 도시에서 숨을 쉰다는 것과 지적인 역량은 서로 무관함을 서울 시민들이 제대로 확인해 주어서 기쁘다. 도대체 서울 시티즌들이 지방을 얕잡아 볼 주제나 되는지 묻고 싶다. 서울의 발전이 자신들 능력에서 나왔던가.

서울이 특별시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자원을 독차지하고 40년 넘게 독점 성장한 덕분에 지방은 자생력을 상실하고 퇴락을 면치 못하여 선거 때마다 환경 파괴를 무릅쓴 개발 공약에 목말라하는 처지가 된지 오래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뽑는 데도 중앙 정부의 예산을 얼마나 많이 끌어와 지역구에 공사판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인지가 잣대가 돼버렸다. 명색이 제2의 도시가 동남권 신공항 유치에 젖 먹던 힘을 짜내어 매달리는 초라함을 보라.

내가 서울 사람들을 싫어하는 데는 특유의 경박한 사투리도 한몫을 한다. 특히 젊은 여자들이 말 뒤끝을 한 옥타브 이상 요란하게 끌어올릴 때는 그 방정맞은 입을 닫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흔히 경상도 말의 억양이 억세고 거칠다고 하지만 그건 세종 임금 당시에도 썼던 성조의 자취로서 유구한 역사성을 갖춘 것이니 서울 사투리에 견줄 바가 못된다. 1960년대 영화를 보면 서울 말은 지금의 평양 말투와 비슷하게 들린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 품위 없는 사투리가 연유한 걸까. 그러나 족보에도 없고 표준어 규칙에도 없는 서울 말의 억양을 서울 사투리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뭘 하든 관습헌법이 총애해 마지않는 수도의 인간들이 하면 엉터리라도 표준이요 준거가 되니, 거꾸로 자기 비하에 빠지는 지방 사람도 나오게 됐다.

작가의 고향이 통영이고 작품의 주요 무대도 경상도인 소설 <토지>는, 경상도 말을 쓰는 환경에서 자란 인물이라도 신분이나 직위, 성품, 배역의 중요도에 따라 쓰는 말이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주인공 최서희를 비롯하여 양반 출신이거나 점잖은 인물의 입에서는, 서민이나 무식한 인물이 경상도 말을 쓰는 것과는 다르게 무조건 서울 말이 나온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종종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의 배필이 되는 하인 출신 김길상은, 어릴 때 천대 받을 때와 성장 후 대접 받는 처지가 될 때 쓰는 언어가 다르다.  젊을 때 개차반 행각을 벌이다 나이를 먹은 후 개과천선하는 이홍이라는 인물의 언어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가 서울 사람들을 미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MB정권이라는 괴물을 낳은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MB가 3기 민선 서울시장으로 뽑히지 않았다면 전과 누범 출신의 그가 언감생심 대통령 꿈을 꾸는 일은 없었을 테다. 서울 유권자들은 4대강 사업의 시범작인 청계천 콘크리트 어항을 시장 재임 시의 빛나는 치적이랍시고 그의 청와대 행을 열렬히 밀어주었다.

도박이나 사기 아니면 사이비 교주의 주술이나 다름없는 개발도상국 수준의 연 7% 경제성장률 약속이 나올 때는 복음을 받은 것인 양 넋이 나갔다. BBK 의혹도, 김경준도, 마포국밥집도 “그러려니”였다.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전국 평균 득표율은 과반을 밑돌았지만 서울은 훌쩍 넘었다. 이듬 해 총선 때는 서울에 몽땅 새집을 지어주겠다는 당시 한나라당의 뉴타운 공약에 이성을 잃고 몰표를 주어 정권을 견제할 야당의 힘마저 빼버렸다.

서울 정치가 대통령 배출의 힘을 본격적으로 갖춘 것은 민선 자치단체장 시대 이후다. 서울 시장 자리는 곧 대선 후보 직행 코스로 인식됐고, 실제로 역대 민선 시장들 중 스스로 나가떨어져서 기회가 사라진 오모 전 시장을 제외하고는 죄다 대선을 넘봤다. 지방자치제도가 지역의 균등 발전이 아니라 서울 지자체 기관장을 유력한 대선 후보로 만들어주는 결과가 된 것은 울적한 역설이다.

싫든 좋든 서울이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 이번 대선에서 서울 시민들이, 탱크를 몰아 한강을 넘은 것을 필두로 집권 내내 툭 하면 시내에 탱크를 풀고 남산에 정보사찰기관을 세워 유서 깊은 수도를 유린한 정권을 그리워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알 수 없다. 18년 독재정권은 지방의 자원을 빼앗아 서울을 통통 살찌운 초석을 다진 시기이기도 했다. 이번 대선만큼은 특별시민들이 자존심과 양식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빈다.

* 10.11일 경남도민일보 칼럼을 손본 글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2/10/11 [21:28]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