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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읽기] 채팅언어를 위하여
 
홍창욱   기사입력  2002/05/08 [16:38]
{IMAGE1_LEFT}채팅언어에 대한 '언어파괴'비판이 뜨겁다. 청소년관련단체들은 통신언어와 휴대폰 문자메세지 사용시 언어파괴현상이 가속화됨을 우려하고 있고, 온라인상의 한 청소년모임은 '외계어쓰지말기 운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언어파괴'를 말하면 '통신언어'를 떠올리듯이 이제 이 현상에 대한 비판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요즘 언어파괴에 대한 우려는 예전과 달리 횟수가 잦아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는 모든 현상을 월드컵과 연관시켜 말하는, 월드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지 않는 것이 없는 현재 한국의 또다른 유행에서 기인하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채팅환경에 대한 몰이해와 '원형'을 고집하고 이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습성에 기인한다. 채팅언어의 심각성을 말하는 이들은 국어 습득장애를 이유로 들거나 바른 말을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자신의 주장을 편다.

'바른 말' 사용으로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라.

한국인은 누구나 한국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그가 어디에 살든 몇 살이나 먹었든 누구나 한국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당연한 이야기를 네트상의 언어파괴현상과 연관을 시키는 것일까? '방가(반가워요)'라는 신종언어가 문법과 언어체계를 뒤흔들고,의사소통을 위한 질서, 소통을 위한 기호를 혼란스럽게할 정도인가?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겠지만 신종언어가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먼저, 신종언어는 네트에서 그중에서도 다른이들과의 실시간 의사소통에 쓰이는 채팅언어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이는 컴퓨터가 매개된 의사소통이라는 제약속에서 새롭게 피어난 언어이다. 사실 이 언어가 실생활로 전염되지 않을까라는 불안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본다. 채팅으로 언어를 배우고 이를 통해서만 소통을 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청소년은 없지 않은가? 채팅에 빠져사는 청소년들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어른을 대할 때 '방가'라고 말했다는 보도는 아직 없다.   신종언어는 차라리 새로운 질서에 가깝다. 이는 소통에 대한 장애물이 아닌 좀더 효율적인 소통을 위한 언어이다. 채팅경험이 있는 이들은 왜 '반갑습니다.'라고 쓰지 않는가라는 어른들의 물음이 웃길뿐이다.

일반적으로 채팅언어의 경향은 1) 이성과의 대화시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논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짧게 제시되고 2) 이러한 언어의 단편화 현상에서 느껴지는 딱딱함을 없애기 위해 기존 언어를 적절히 바꾸며 3) 채팅의 주사용자인 젊은이들의 언어를 반영한다. 우리는 여기서 채팅언어와 인터페이스를 더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언어파괴'비판에 대한 적절한 반비판을 늘어놓을수 있다.

언어, 미디어, 인터페이스..

인터페이스란 2개의 다른 세계가 접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면을 가리키는 화학용어로, 일반적으로 인간과 컴퓨터의 서로 다른 정보처리체계를 완화시켜 쉽게 소통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미디어는 인간사이의 소통을 전제로 의미가 전달되는 공간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채팅언어는 PC통신이나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통신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며, 그 과정에서 컴퓨터라는 인터페이스를 마주하며 소통이 이루어진다.  

언어또한 미디어이자 새로운 인터페이스라 할 수 있다. 대뇌에 맴도는 의미를 경험적으로 익혀진 입과 혀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이것이 공기를 통해 상대방에서 전달된다고 할때, 공기와 언어는 각각 전달과 표현의 미디어이고 대뇌와 근육간의 소통체계는 인터페이스이다.

언어는 동일한 의미라하더라도 전달하는 미디어가 어떠한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이는 공간적, 시간적 차에 따른 경험적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직접적 언어사용측면에선 사투리나 나이에 따라 미디어사용측면에선 면대면, 전화, 채팅에 따라 의미해석이 조금씩 다를수 있는 것이다. 채팅언어에 대한 해석또한 경험의 유무에 따라 확연히 다를수 있다. 이 언어는 사투리와 같은 지역언어가 아니라 특정세대가 사용하는 언어, 특정 기술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에 이에 대한 반응또한 확연히 구별된다. 젊은이들은 이 언어에 대해 친근함을 표시하는데 반해 기성세대는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기존의 미디어와 달리 컴퓨터라는 새로운 통신환경, 컴퓨터와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존 미디어에 비해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은 수동적 반응을 넘어서서 능동적 이용과 적극적 의견개진이 가능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컴퓨터의 인터페이스와 익숙해져야만 한다. 채팅언어를 언어파괴라 비판하는 자들은 컴퓨터가 제공하는 인터페이스에 거부감을 갖고 통신환경을 이용하지 못하거나 이용할수 있더라도 하지 않는 자들이 대다수다.

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물리적 인터페이스와 통신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채팅과 미팅을 비교해볼 때 채팅은 상대방을 알수 없고 의미해석은 글자에만 국한된다. 미팅에선 말없이 상대방의 표정만으로도 마음을 읽을수 있다. 신체의 여러기관이 여러 가지 상황들을 충분히 읽어낼수 있는 것이다. 반면, 채팅은 문자를 통한 의미해석에 국한되고 문자또한 하나하나 쳐야하기 때문에 메시지를 주고 받는데 시간의 간격이 길다. 채팅상황의 물리적 인터페이스는 키보드이고 이를 작동하는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또한, 통신환경은 모니터라는 인터페이스에 단어가 순차적으로 배열되고, 여러사람이 끼어들어 주제가 급변하기 때문에 한마디라도 내뱉기 위해선 말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상황에서 말이 짧거나 반말을 하면 무례하다고 하지만 채팅상에서 완결된 문장을 쓸려고 하다간 벙어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휴대폰 메시지교환을 통해 더 강화된다. 휴대폰 메시지 교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에 진행되는 것이기에 의미의 해석이 빠르지만, 물리적 인터페이스는 더욱 제한되어 있다. 키보드는 적어도 20개가 넘는 자판이 있지만, 휴대폰은 10개가 간신히 넘는 자판이 있다. 또한, 메시지 전달량또한 한번에 몇자 이내로 제한된다.

따라서 문자의 간략화와 이를 좀더 인간적으로 표현할려는 상황은 증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늦을거 같은데 어쩌지 미안..내가 요즘 바빠서'라는 말은 '미안'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될수있지만 이는 효율적 단어전달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에 '^^;'라는 부호를 덧붙여 잉여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에 대한 불안

{IMAGE2_RIGHT} 채팅언어를 어른들이 예의주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통신공간의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도 있겠지만, 단지 통신공간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치부하기엔 무언가가 더 남아있는 듯하다.
왜 청소년들의 언어습관에 이토록 집착을 보이는걸까? 나는 이러한 집착이 다른 것을 용인하지 못하고 동일한 것만을 강요하는 폭력의 연장이라 생각한다. 사실 언어의 동일성을 강요하는 폭력은 이미 존재해왔다. '서울의 중산층이상이 쓰는 현대 언어'를 지칭하는 표준어라는 개념도 그러하거니와 공익을 자임하는 방송언어 중 지방언어가 없다는 사실은 상징적 폭력이 아닐수 없다. 공공의 이익에서 지방의 몫은 없으며 표준어와 비표준어의 분리에서 지방사람은 소외감을 느낄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일언어에 대한 집착은 동일한 방식의 삶, 동일한 문화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 특히, 요즘 이러한 동일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세계화(최근의 월드컵)라는 화두에 의해서다. 세계화를 위해서 진정한 우리를 찾자, 이미 변질되어가고 있는 삶속에서 원형을 회복하자는 주장들은 원형을 회복하기는커녕 원래의 형태를 통합하고, 축소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우리를 보여주기위해선 먼저 우리안에 묻혀있는 나와 너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채팅언어와 지방언어를 단순비교할 수는 없지만 채팅언어또한 엄연한 삶의 단편이며 이를 무시할수 없다. 이는 변질되고 감염된 언어가 아니라 다양성을 증가시킬 언어이며 특정한 계층을 표현하는 언어이다. 언어의 원형질을 찾자, 바른 언어를 사용하자는 것은 결국 언어에 묻어난 자연스런 체취를 제거할려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언어에는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계층, 지역, 나이에 따른 잉여의미가 배여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채팅언어는 또한 유구한 존재가 아니며 새로운 환경의 산물인만큼 새로운 미디어와 인터페이스의 발전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숫자로만 표현이 가능했던 삐삐세대의 언어인 "337337(격려)", "1052(사랑)"가 사용되고 있지 않은것처럼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통해 진화해 갈 것이다.

* 필자는 현재 평화인권연대 대안문화미디어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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