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지역은 중앙정치 패배자들의 봉이 아니다
[진단과 대응] 박원순의 20대 낙향론 역시 중앙패권주의의 변주에 불과
 
숨인씨   기사입력  2009/11/10 [13:21]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해 김해시의원 출마 의사를 슬쩍 비쳤었다고 한다. 요즘 국민참여당의 주요 인사들도 기초의원 출마를 저울질하는 모양이다. 그들의 정치노선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이 경우에는 '하방론'이 바람직하다. (끝내는 이루지 못한 꿈이 되었지만) 대통령이 낙향해 지방정치에 나서는 모습도 신선하고, 집권경험은 있으면서 선출직 경력은 부재하거나 한미한, 상반된 조건을 한몸에 갖춘 이병완 씨 등에게도 기초의원 도전은 썩 어울린다. 그러나 소위 진보개혁세력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하방론은 한심하다.  
 
이런저런 연에 얽매인 사람들은 포부와 신념에 의거한 공동체를 갈구한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어 몸을 깊이 담근지 오래되면 견문이 좁아지고 매너리즘에 빠지며, 혈연과 지연 못지 않은 패거리주의까지 양산한다. 결국 '근거리'에 의존하면서도 다양한 성향이 모여사는 지역공동체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진영에게 지역은 운동가나 운동 참여자들에게 훌륭한 전지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역에게 부여하고 더 나아가 중앙을 도외시하는 발상은 섣부르다고 여긴다. 진보진영에서 지역이 도피처가 되고 알리바이가 될 조짐도 있다. 진보신당의 당원 여럿에게 '기초단체장 출마론'을 들었다. 노회찬, 심상정 전 의원이 서울시장나 경기도지사에 나가는 대신 구청장이나 시장선거에 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이들이 다음 총선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쏙 빠져 있었다. 
 
▲ (자료사진)     ©CBS노컷뉴스

더 의뭉스러운 게 두가지 있다. 두 전직 의원은 의회에서 떨려나오고 지역 속으로 들어간지 1년 반이 되었다. 들어갈 때와 머무르는 동안 기초단체장에 나갈 만한 일꾼 하나 키우지 못했나? 두번째, 지역은 중앙정치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이 숨어들어 파먹는 공간인가? 자녀 등록금을 대려고 논 팔고 소 팔던 옛 어버이들이 떠올랐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뿔뿔이 민주주의
 
일단 '지역'에 관한 과대평가부터 지적하겠다. 지역은 '일터'와도 겹치지 않으며, 일꾼들은 주말이나 휴가철이 되면 형편이 허락하는대로 집과 거주지역을 떠나기 좋아한다. 지역에 머무르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가령 내가 막장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시청하고 있을 때, 옆집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면 달갑지 않기 마련이다. 이런 풍경이 아름답지는 못하지만 TV와 전화기는 기본에 엄청난 속도의 인터넷전산망이 깔린 현실을 감안하면, '지역' 또한 일종의 메트릭스이고, 중앙이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이나 지역도 중앙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작정 진보개혁진영이 지방분권과 지역운동론에 매달려 갈 때 이것을 곧게 인식하였던 지식인은 <레디앙>의 이재영 기획위원 정도다.
 
다들 느끼다시피 이 땅에서 진보는 절망에 부닥쳐 있다. 아마 그래서 어떤 지식인들은 기존에 있던 것들 중 긍정할 것을 열심히 찾고 내세우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민족주의를, 어떤 이는 박정희가 심은 국가주도적 경제발전방식을 꼽는다. 진보운동(정치)의 진로가 난망하든 아니든, 긍정할 것이나 인정하고 활용할 것이 있다면 제시하는 게 옳다. 나는 한국사회의 '중앙집중성'을 든다. 이몽룡이 변학도를 응징하는 방도는 지역투쟁이 아니라 어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었다. 좋든 싫든 한국사회는 유럽이나 일본과 상이한 중세를 겪었고 중앙집중성은 더 강화되어 여지껏 진행 중이다. 이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중앙집중성은 우리가 도전해야 할 대상이다. 특히 인구집중이 그렇다. 그러나 중앙집중성을 궤뚫고 활용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중앙집중성을 덜어내지 못한다. 중앙집중성이 해체되어야 한다고 믿음도 현대국가에서 환상이고 자충수다.
 
어떤 지역이 주민 다수의 의사와 지역 유력인사들의 권력에 의거해 폭주하는 길을 용인하는 걸 분권이라고 착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적정량의 신경과 인력을 중앙에 투입해야 한다. 중앙정치에서 승부를 내지 못하면 지역에서도 각개격파당해 필패한다. 호남, 영남, 충청 다 내주고, 울산 창원 등 일부 공업도시와 서울 마포 같은 곳에서 조금 버티다 끝내 말라죽는다. 설령 지역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더라도 그것은 중앙정치나 광역차원의 돌풍 한방에 다 날아가고 만다.
 
2006년 가을 강의실에서 내한한 일본공산당 관계자들을 만났다. 당 기관지 <적기>의 높은 판매고와 많다는 지방의원 수를 자랑하며 그들은 환하게 웃었다. 그때 내 눈에는 천황제 폐지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이빨빠진 좌파정당이 보였다. 일본 국민의 절반이 평화헌법의 수호를 지지하지만 그 반의 반을 챙기기에도 힘겨운 그들에게, '풀뿌리 민주주의'는 '뿔뿔이 민주주의'였다. 최근 한국 진보진영을 적셔가는 하방론은 '잘해야 일본 공산당'으로 귀결될 것이다.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 밟으며 지방에 "내려가"?
 
"지역에 내려가야 한다". '내려간다'는 표현에 이미 담겨져 있지만, 작금의 하방론들에는 지역적 논리와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 기초의원선거에서의 정당공천론을 고집하는 사람들 대부분도 그러하다. 단순히 찬성이 그르고 반대만이 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현실 직시가 없다는 것이다. 학부모모임, 통반장, 아파트 동대표에 정당공천을 하지는 않는다. 기초의원쯤이라면 이와 크게 다르다고 보기도 어렵다. 각종 지역공동체가 보수적이라고 한들 그것이 정당공천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한국의 정당은 중앙에서 생겨 밑으로 뻗어내리는 조직인 데다가 대중정당 모델을 갖추지도 못했다. 아담하고 일상적인 생활단위일수록 당파의 표식은 낙인이 된다. 보수정당에 속한 지방의원은 자그마한 민생법안도 당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심지어 지역 국회의원이나 단체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자연히 소수파 진보의원의 아이디어는 그 장벽을 뚫지 못한다. 
 
▲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지난달 28일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10만인클럽 여섯 번째 특강에서 "요즘 젊은이들을 만나면 고향에 내려가 시장이나 군수가 되라고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CBS노컷뉴스 (자료사진)

정당공천제를 찬성하는 이들은 노선이 뚜렷한 책임정치를 명분으로 들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노선과 책임소재는 후보자 개인, 그를 떠받치고 컨트롤하는 주변의 단체들, 지역에 맞춤해 새로 결성된 정치모임(정당공천 찬반 양론의 틈에서 지역풀뿌리정당 모델을 고민해봄직하다)이 보장할 수도 있다. 진보정당에서 가장 오래 공직을 수행한 조승수 의원도 정당공천제도가 없던 시절 노조와 시민사회의 후원을 입고 지방의회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진보정당측에서는 공천제도를 철회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철회만이 답은 아니다. 그렇지만 직시와 고민 없는 답에 가치가 있을까.
 
시민단체쪽에서도 근래 지방을 '봉'으로 보는 인식 수준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박원순 씨의 "20대여, 고향에 가서 시장이 되고 군수가 되라"는 주문. 실현가능성은 차치하자. 그의 충고는 한마디로 서울에 올라와 쌓은 상징자본으로 지방에서 승부하라는 데 머문다. 도움을 주려거든 고향에서 꾸준히 살던 젊은이가 대상이 되어야 할 일이다. 중앙패권주의의 변주와 교묘한 학벌주의로는, 박원순급되는 인물도 고향에서 선거에서든 의정활동에서든 고전할 것이 틀림없다. 
 
2004년 총선 이후 한국사회는 우경화에 들어섰고 그후 진보개혁세력은 시대를 돌파한 패러다임을 마련하는 대신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라는 슬로건 하에 전문가주의에 빠져들어갔다. 결과는 CEO 출신 이명박의 승리였다. 그뒤로는 반MB연합, 진보대연합이라는 자기최면이 유행하여 민주당은 쇄신이 없고 진보정당은 발전이 없다. 이제는 하방론인가. 중앙은 중앙대로 지리(支離), 지역은 지역대로 멸렬(滅裂).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았다.
* 글쓴이는 경북 구미시 시의회 의원(무소속)입니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영남지역 최연소(27세) 기초의원에 당선돼 현재 시의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2002년 <대자보> 필진으로 참여한 이래 다년간 정치칼럼 등을 연재해 왔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대자보> 독자들과 만납니다.
기초의원으로서 풀뿌리 정치 현장에서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kimsoomin.tistory.com/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9/11/10 [13:21]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