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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전라도와 김대중을 모욕하는가
강준만교수에게, '5ㆍ18', 유시민과 미스코리아
 
미둥   기사입력  2003/06/21 [13:27]

강준만의 <유시민의 신당창당 어떻게 볼것인가?>라는 글을 열면서 ‘제발’ 하는 심정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시작은 ‘5ㆍ18’이었다. 아닌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강준만이 인용한 서남대 교수 김욱이 {오마이뉴스}에 쓴 5월 20일자의 글처럼 그 ‘광주학살’이 지금의 지역주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니, 어떻게 ‘5ㆍ18’을 거론하지 않고 지역주의를 논하겠는가? 나도 이런 ‘5ㆍ18’의 중요성에 대해 십분 공감한다.

[관련기사] 강준만, 유시민의 신당창당 어떻게 볼것인가?, 대자보

 ©시대소리 홈페이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준만이 매년 5ㆍ18을 맞이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것처럼, 지역주의를 논하면서 5ㆍ18로 시작되는 문장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5ㆍ18’로 시작되는 것이 뭐 잘못된 일이냐고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너도 공감하면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올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누군가 ‘5ㆍ18’을 거론하는 순간, 그것은 옳고 그름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위성을 거론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그 ‘숭고함’에 모든 논쟁은 중단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유는 5ㆍ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타자(제3자)는 말할 자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5ㆍ18에 대한 미화(美化)는 물론 거창한 가치 부여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글은 ‘5ㆍ18’을 거론함으로서 이미 그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5ㆍ18’에 대해 그와 관련된 사람과 전라도 이외에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다시 말해 강준만이 ‘5ㆍ18’을 거론하는 순간 ‘경상도 사람인 유시민’은 바로 수세로 몰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유시민에게 나올 말은 구차한 ‘변명’밖에 없다.

인터넷에서 지역주의를 논쟁하다가 제법 자주 듣는 소리가 ‘타지역 사람은 전라도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이 맞는 말이라면 바로 이 순간 모든 논쟁은 중단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인데, 무슨 논쟁이 되고, 논의가 오갈 수 있겠는가. 일부 여성이 ‘넌 여자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남자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여성을 이해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면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니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서남대 교수 김욱의 발언을 음미해보자.

"유 의원은 전국적인 득표가 가능한 정당만 만들어지면 지역주의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가치판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유 의원이야 지역주의의 원인이 양김이고 모든 것을 단절시킨 채 새출발(?)만 하면 지역주의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최근사의 지역주의의 핵심은 518이고 우리들 마음속에서 이 518에 대한 평가가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는 한 지역주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전국민이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자는 말이 아닌가? 매년 ‘5월 그날’이 오지만, 5ㆍ18은 아직도 전국민적으로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광주만의 5ㆍ18’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너는 내 아픔 몰라!’라는 반응은 공감대 형성이 애당초 불가능함을 직시하는 것이다. 어차피 타자는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5ㆍ18’은 그들만의 ‘아픔’이 되고, 결국 타지역 사람은 모두 침묵해야만 한다.

이런 한탄도 한두 번이다. 논의를 하다가 결국 듣는 말이 ‘너는 내 아픔 몰라!’라면 결국 ‘이해심이 좀 있다는 사람들조차 나중엔 지겹다고 짜증을 내지 않았던가.’ 이제는 왜 유시민 같은 이들도 짜증을 내는지 고민할 때고 되었다는 말이다.(유시민이 짜증냈다는 말이 아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5ㆍ18’에 묶이고, ‘아픔’에만 묶여 있어야 하겠는가?

더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그 아픔을 느끼게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타지역 사람은 전라도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절대 내뱉어서는 안될 말이다. 이 말 대신 이러 이러한 고통이 있었다고 설명해야 한다. 그렇게 상대를 이해시켜야 공감대가 형성될 것 아닌가 말이다.

지난 5ㆍ18때 일이다. 미스코리아가 망월동을 참배하겠다고 하자. 참배 자체를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당시 상황을 <일간 스포츠>는 이렇게 전한다.

“이들(미스코리아)의 망월동 참배를 망월동 현장에서 반대한 분들이 있었다. 광주 전남 지역 시민 단체 회원 10명 가량이‘5월 정신 왜곡하는 망월 묘지 참배 반대’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일간 스포츠, 데이리 포커스, 2003.5.19)”

물론 이런 망월동 방문은 안티 미스코리아 등의 반대 여론이 높아지니, 이런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한 언론 플레이 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미스코리아가 망월동을 참배하고, 정신대 할머니를 방문하는 것은 잘하는 일 아닌가 말이다.

미스코리아의 참배가 안된다면 어떤 사람만 5ㆍ18에 참배할 자격이 있단 말인지 되묻고 싶다. 과연 미스코리아가 김구 선생의 묘지를 참배한다고 했다면 반대했을까? 국민적 공감대라면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모두 같이 느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규명된 것처럼 제주 43사태도 다시 조명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43항쟁의 원혼들도 광주의 희생자처럼 그 넋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윤수정 양?19?제주 진)(일간 코리아 망월동에서 쓰는 편지 2003.5.15) 채 20살도 안된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말이다. 이것이 언론 플레이더라도 바람직한 것 아닌가 말이다.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연결짓는 이런 노력이 생활에 젖어든다면, ‘5ㆍ18’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5ㆍ18은 아직도 제3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미스코리아나 유시민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 제3자 이기는 마찬가지다. 전라도 사람이 광주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유시민도 입을 다물어야 하기는 마찬가지란 말이다. 이런 엄숙주의 앞에서 누군가 관심 갖기도 힘들고, 제 3자인 누군가 그 아픔을 안다고 함부로 떠들 수 있겠는가 말이다. 어차피 제 3자인데 말이다. 5ㆍ18이 지금도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 못하는 이유는 영남과 타지역의 무관심에도 문제가 있지만, 호남의 ‘독점’에도 일부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재검토 해봐야 할 것이다.

강준만의 전라도만을 위한 글쓰기

강준만이 예전에 <김대중 죽이기>를 쓴 이유는 김대중이란 화두를 통해 전라도에 대한 편견을 없애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강준만의 그렇게 노력해온 수많은 글쓰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자연스럽게 모든 국민이었을 것이다. 결국 지역주의를 없애자는 말은 민주당 지지자, 한나라당 지지자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 된다. 또 그래야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강준만의 유시민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가장 깊게 든 생각이 과연 누가 읽으라고 쓴 글인가 하는 점이었다. 지역주의와 ‘5ㆍ18’을 거론하며 전라도의 아픔을 이야기한 이 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유추해보면, 그가 말하고자하는 요지에 좀 더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유시민에게 글을 쓰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글 안에서 몇 번이고 지역주의와 싸워 온 유시민을 높게 평가한다. 유시민에게 쏟아질 비난을 미리 막아보자는 그의 조심스러움을 내다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조심스러움과 함께 그는 줄타기를 계속하는데, 그것은 ‘구주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호남 민심을 거스리지 않겠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강준만은 평소와 달리 호남의 민심만 전달 할 뿐, 그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바로 질타도 없고, 찬성도 하지 않는 애매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평소 강준만의 딱 부러지는 판단은 찾아보기 힘들다. 유시민의 고민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전라도의 반발도 몸소 느낄 수 있으니 이런 줄타기로 들어 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전국적인 명분과 호남의 민심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구주류’를 내세워 지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호남 민심을 아는 그가 ‘구주류’를 대놓고 욕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시민이 분류했다는 노무현 지지파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민주당이든 아니든 노무현이 좋다.' 둘째. '민주당 후보이기 때문에 찍겠다.' 셋째. '노무현은 괜찮은데, 민주당이라 찜찜하다.' 여기서 현재의 신당으로 인한 충돌은 첫째 + 셋째 대 둘째가 될 것이다. 여기에 이 모든 수와 비슷한 한나라당을 지지한 숫자와 무관심층(기권) 30%를 합치면 우리나라 국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강준만은 무관심층과 한나라당 지지자를 제외하고도, 또 노무현 지지자 중에서 첫째와 셋째를 제외한 두 번째 계층에게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거론한 ‘5ㆍ18’과 지역주의는 그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위험을 안게된다는 말이다. 결국 강준만은 ‘5ㆍ18’을 내세워 ‘전라도의 특수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한발 더나가 그것을 인정해 달라고 유시민에게 말한다.

‘박상천과 정균환이 아무리 혐오스럽고 그들에게 그 어떤 문제가 있을망정, 그들은 그 어떤 한나라당 의원보다 더 한국 사회의 개혁과 진보에 기여해 온 사람들이라고 보는 호남의 시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에서 드린 말씀으로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그러나 ‘호남의 시각’을 거론하며 전라도를 자꾸 특수하게 인정해달란 말인데 안될 말이다. 그 특수함을 이야기할수록 전라도와 타지역간의 거리는 멀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호남도 타지역과 똑같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한다. 전라도에 필요한 것은 ‘호남의 특수함’이나 ‘5ㆍ18’의 숭고함이 아니라 ‘호남의 보편성’인 것이다. 호남의 특수성이 아니라, 호남의 보편성을 말해야 한다. 얼마나 더 ‘5ㆍ18’과 전라도를 타지역에서 멀리 놔야 한단 말인가!

강준만은 유시민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한다.

“한나라당에 대해선 열받을 정도로 강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기존 지역구도를 타파해보자는 말을 해야지, 민주당 구주류에 대한 모욕적인 비난으로 대응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구주류와 호남을 하나로 묶는 시도를 깨야 할 사람은 누군가? 바로 강준만 아닌가 말이다. 이런 어이없는 시도를 깨야 하는 것은 바로 강준만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 ‘5ㆍ18’의 정신이 사는 것 아니냔 말이다. 강준만과 전라도에서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해준다면 유시민은 한나라당을 비판하기만 하면 된다. 강준만이 인정한대로 유시민은 미약할지 모르나 경상도 비판을 병행하고 있는데 강준만은 과연 구주류 비판을 했는가 말이다.

이런 구주류의 횡포를 깨야 할 사람은 바로 강준만 같은 사람이란 말이다. 유시민에게 ‘5ㆍ18’이나 ‘호남의 시각’을 왈가불가 할 때가 아니라, 그렇게 ‘5ㆍ18’이 훼손되고 ‘호남의 시각’이 굴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단 말이다. 강준만은 ‘구주류’ 공격이 불러일으키는 파급효과를 직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시민의 본심을 왜곡해서 이용해먹고, 곡해하는 내용을 제대로 알리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것을 ‘호남 소외론’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자들을 질타해야 하는 것은 유시민이 아니라, 강준만의 몫이란 말이다.

강준만은 ‘5ㆍ18의 진실은 '경제'로 기름기가 끼어 무뎌진 그들의 양심을 바늘로 찔러 아프게 만들어야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누가 무슨 수로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개혁'과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나마 과거를 망각하는 '역사의 빈혈증'을 치유해주길 바랄 뿐이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해답 없는 이 힘없는 한탄은 바로 강준만의 한계이기도 하다.

강준만은 어떻게 경상도와 국민을 바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설마 순진하게 옳은 것만 외친다고 세태가 바뀌리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벌써 세상은 바뀌었을 것이며, 강준만이 지금도 10년전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를 깰 어떤 대안도 없다. 그저 ‘공부 잘 해야 한다’는 원론만 되풀이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5?18’의 아픔과 전라도의 특수함을 이야기하는 이외에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라도의 아픔을 건들지 말고 해답을 제시하라고 한다. 이는 결국 ‘아픔을 이해 못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모두 침묵해서는 어떤 일도 풀릴 수 없다. 언제고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너 5ㆍ18의 아픔을 알어?’만을 되풀이 할 것인가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 5ㆍ18의 아픔에 대한 ‘독점’을 놓칠까 하는 두려움의 표현일 수도 있다.

‘호남 지역주의를 다른 지역의 지역주의와 똑같이 양비론으로 다루는 발언에 접할 때면 개탄’으로 이어지듯, 호남의 특수성을 인정해달라는 말도 개탄으로 이어지기는 마찬가지란 말이다. 유시민이 경상도를 책임져야 하듯, 강준만이 책임져야 할 곳은 전라도다. 강준만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유시민이 나서고 있는 것 아니냔 말이다.

피해자는 강준만이 아니라 제정구나 유시민이다.

지역주의만 놓고 볼 때 제일 힘든 사람은 무관심층이다. 이들은 아예 관심조차 없기에 대화자체를 꺼내기가 어렵다. 그 다음이 한나라당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소위 말하는 ‘광신도’를 연발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을 제외하고 나면 지역주의를 통해 그래도 유일하게 말이 되는 대상은 위에서 이야기한 첫째와 셋째 그룹이었다.

여기서 첫째 그룹은 유시민 같은 시대의 고난을 무릅쓰고 전라도를 지켜온 부류이고, 셋째 그룹은 제정구 같은 부류다. 다시 말해 세 번째 그룹은 ‘반DJ’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류인 것이다.

강준만은 묻고 있다.

'왜 김대중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재야 출신 정치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영남 출신일까?’

왜 그것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그것은 지역주의와 DJ 때문이다. 강준만은 평소 희생을 강요하는 시민단체를 강력히 비판해왔다. 우리가 타자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 영남의 재야 출신 정치인들의 희생을 좀 생각해봐야 한다.

강준만은 지금 주장과 함께 전라도에서 언제든 국회의원 선거라도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유시민은 지금 주장을 바꾸지 않는 한 그리고 지금 경상도 정서가 바뀌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불쌍한 것은 전라도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아니라, 유시민 같이 중간에 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강준만이 <김대중 죽이기>를 써서 스타가 될 때, 그 영남의 재야 출신 정치인들은 지역주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낙선을 하고 지역과 주변에서 무시당해야 했다. 노무현, 김정길 같은 몇몇 안 되는 지조 있는 정치인도 있었으나, 누가 희생을 강요할 수 있으며, 담보해줄 수 있는가 말이다.

제정구 등은 지역주의에 의한 피해를 결국 DJ 개인에게 돌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결국 어떤 대의보다 DJ에 대한 개인 원한을 더 크게 보는 인간적 한계에 빠진다. 그런데 지금 강준만은 그들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들이 지역주의를 반DJ로 소화했다면 강준만은 지역주의를 친DJ로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제정구와 같은 정치인이 지역주의의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반DJ로 기울었다면, 그 동안 정균환이나 박상천은 떵떵거리고 있었고, 제정구보다 조금도 더 고생하지 않았다.(어차피 그들이 반DJ로 돌아선 것은 고생하던 80년대가 아니다.) 아예 그런 시련 자체를 겪을 이유가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구주류를 강준만이 옹호한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만한 일이다. 오히려 DJ 그늘에만 안주한 일부 구주류의 아픔보다 23년 묵은 역사의 상흔에 생존과 명분 사이에서 방황을 강요당했던 영남 재야 출신의 아픔이 더 컷을 것이란 말이다.

뒤집어 말해서, 전라도에서 그들이 DJ를 선택하지 않으면 뭘 선택하겠는가 말이다. 제정구 같은 이와 비교될 상대는 구주류가 아니라 이문옥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강준만이 예로 든 것처럼, DJ에게 감사해야 할 사람은 한나라당 의원도 있지만 구주류도 마찬가지다. 이들 중에 한번이라도 DJ와 다른 길을 걸은 사람이 몇이냐 되냔 말이다. 이문옥처럼 말이다.

정답은 ‘DJ에게 감사해야할 모든 사람을 없애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DJ가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DJ의 이념과 정책에 동의하거나 반대했던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반DJ’나 ‘친DJ'를 이용한 사람들은 모두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DJ가 선거지원에 나서서 정책이나 비전설명은 없이 그저 ‘나를 위해 고생한 사람’이라고 한마디하면 당선된 시절은 이제 지나가야 한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5ㆍ18로 이야기를 시작해 결국 5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5?18과 5공은 분리될 수 없고, 한나라당이 5공을 계승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주류에게 ‘명분’이 있다고 말한다. 이건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미안하지만 5공의 괴수를 용서한 것은 민주당이었다. 그것에 분노한 것은 진보세력 뿐이었다. 전라도도 그것을 받아 들였다. 5공을 말이다.

5ㆍ18과 5공은 분리될 수 없다면, 강준만은 당연히 DJ가 전두환을 용서했을 때 단식 투쟁을 하든, 분신 자살이라도 시도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5ㆍ18과 5공은 분리될 수 없다면, 어떻게 5공의 괴수인 전두환은 용서 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렇다고 전두환이 사과를 했나, 재산반납이라도 확실히 했는가 말이다. DJ가 전두환을 용서할 때 ‘현실론’을 내세워 옹호한 사람은 누구냔 말이다.

노무현, 유시민 ‘너도 경상도지!’

강준만은 직시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신당 문제가 불거진 이후, 벌어진 반응 중에 제일 놀라운 사실은 [노무현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비난과 비아냥이 넘쳐 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전의 경상도에서 DJ에게 향했던 그 ‘묻지마 비난’과 너무나 흡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광신도’라고 말하면서 대화 가능성을 막았듯이, 이들은 ‘노빠’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심지어 자랑스러워한다. ‘광신도’가 ‘노빠’로 거듭난 것이다.

이런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경상도의 반DJ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경상도가 반DJ로 뭉친 것처럼, 전라도도 친DJ로 뭉친 것은 사실인데, 그 차이는 경상도가 명분 없는 막무가네였다면, 전라도는 명분 있는 막무가네였다는 것뿐이다. 예전에는 전라도라서 DJ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DJ가 옳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말이 먹힐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 전라도가 막무가네였다는 사실이 지금 들어 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노무현에 대한 지나친 분노와 ‘노빠’가 그걸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의 일부 전라도의 분노는 일정한 명분과 당위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더 당당하고, 힘이 있다. 이건 마치 강준만이 비판했던 ‘진중권 콤플렉스’와 같은 증상이다. 그런데, 강준만은 지금 진중권을 그렇게 비판하던 이 행동을 간접적으로 옹호하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당위성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강준만은 그 당위성을 다시 한번 확신 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신당 논의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명분이라는 당위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기도 하다.

지역주의 타도란 결과적으로 전라도가 타지역에서 같은 인간으로 대접받는 것이다. 여기서 부여되는 ‘5ㆍ18’로 부여되는 당위성은 이제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 당위성은 아주 당연하게 특수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를 연발한다. 그 순간 대화는 불가능하고, 결국 일방적인 목소리만 존재하게 된다. 강준만은 이런 특수한 그들을 ‘인정해 달라’고 유시민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당원모집부터 철저하게 국민운동 방식으로 하고, 지구당도 상향식으로 구성하며, 주요 당직도 각급 당조직의 당원들이 선출하는 참여형 정당을 원합니다."

강준만은 유시민이 말한 이대로만 하면 신당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궁색한 변명이다. 지역주의는 일종의 심리장애이다. 강준만도 그것이 단순한 제도로 바뀌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변화를 확실히 이뤄내는 것만 해도 엄청난 개혁이요 진보다.’라고 위안을 한다. 다시 말해 ‘5ㆍ18’을 이해할 수 없는 유시민에게 구주류는 신성불가침이니 건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강준만은 역으로 당위성을 역설한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에 떵떵거리던 사람들이 지금도 맹렬하게 활동하면서 자기 동네에서는 존경까지 누리고 있는데, 왜 김대중의 사람들만 그런 '미덕'을 보여야 한단 말인가?”

강준만은 그럼 고건을 쳐야 한다. 그는 지금도 떵떵거리고 있다. 그런 고건을 멀쩡하게 놔둔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부터 김대중 시절까지 떵떵거리던 고건은 왜 존경까지 누리고 있는데 예외냔 말이다. 그는 경상도도 아니다. 전라도가 암울했을 때 전두환 밑에서 떵떵거리던 사람 아니냔 말이다.

강준만에게 묻고 싶다. 언제까지 ‘너가 먼저 반성하고, 고쳐라’만 외칠 것인가? 그렇게 ‘전라도의 한恨’만 이야기해서 뭘 어쩌자는 말인가! 유시민 같은 이나 인내하며 겨우 들어줄 말만 되풀이해서 어쩌자는 말인가!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에 귀 기울어 줄 국민이 몇이나 있다고 보는가!

23년 동안 지역주의는 나아진 것이 아니라, 악화되었다. 그것도 DJ를 중심으로 말이다. 이것 DJ 잘하고 못하고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결과가 그렇다는 말이다. 87년 양김의 분열에 대해 DJ는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YS와 같이 충분히 역사적 죄인이 되어야 한다. 지역주의를 논하면서 ‘5ㆍ18’을 거론하면서 꼭 거론해야 하는 것이 양김의 분열이다. 그런데 강준만은 눈을 감고 있다. 강준만이 강조하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설마 87년 양김의 분열이 지역주의를 악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또 그 때가 ‘5ㆍ18’의 한恨을 해소하고, 지역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 기회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양김의 역사에 대한 배신이 얼마나 많은 역사적 희생을 강요했는지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 벌어지는 소위 영남 출신의 재야세력의 변신도 이 분열이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DJ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 그가 세워 올린 업적에 배아파하는 일부 경상도인처럼, DJ를 무조건 올려 세울 필요도 없을 것이며, DJ에 대한 냉철한 평가는 강준만 같은 사람이 앞서야 한다. 또 그동안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지금 이런 ‘호남의 시각’을 이야기하며 ‘5ㆍ18’하며 구주류를 옹호하는 것이 그 동안의 DJ에 대한 이해였단 말인지 되묻고 싶다.

강준만은 '자기 중심주의' 문화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강준만은 ‘518’과 김대중을 모욕하지 말라!

지역주의를 이야기하면 결국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 경상도와 전라도의 차이이며, 그 현실적 해결책을 논하려면 사회적 모든 분야를 건드려야 할 정도로 광범위해야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해결책은 ‘호남의 시각’이 아닌 ‘한국의 시각’으로 만들어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5ㆍ18’은 이제 전라도를 뛰어 넘어 ‘대한민국의 5ㆍ18’로 계승되어야 한다. 그렇게 전라도를 뛰어넘어야 한다. 4ㆍ19가 대한민국의 역사이듯, 5ㆍ18도 그렇게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아니 프랑스의 68처럼 세계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5ㆍ18 때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민주당 구주류 인사들의 항변에 분노해야 할 것은 전라도 사람이지, 유시민이 아니다. 그 진실을 전국에 알리려고 노력해온 강준만 같은 사람들이어야 한단 말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5ㆍ18’을 팔고 있을 것인가 말이다. ‘호남인들은 광주학살과 5공을 분리해 생각할 수가 없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분리할 필요도 없고 그러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전라도에서 풀어 전국적인 공감대’로 만들자는 말이다. 5공을 비난하려면, 전두환을 풀어준 DJ도 같이 비난하란 말이다!

5ㆍ18은 DJ을 위했던 것도, 그렇다고 구주류를 위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구주류의 그런 말도 안되는 질문에 화도 나지 않느냔 말이다. 진정 5ㆍ18을 전라도에서만 논하고, DJ를 위해서만 논해야 하는 것인가 말이다.

강준만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이야기한다. 이 무슨 헛소리인가? 그럼 앞서 영남 재야인사의 멍청한 행동을 왜 비판했는지 모를 일이다. 강준만은 DJ가 그들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고 믿는 것인가? 아니면 강준만이 아파한다고 말하는 제정구 같은 인물들이 지금 ‘구주류’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더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어이없게도 강준만은 ‘제정구와 박계동은 인간 김대중의 한계와 문제는 제대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김대중에게 부과된(또는 김대중이 영악하게 포착한) 역사적 의미는 읽어내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들고 있다. 도대체 제정구와 박계동에게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불필요하단 말인지, 아니면 구주류는 ’노무현에게 부과된(노무현이 영악하게 포착한) 역사적 의미는 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게 지금 제 정신으로 쓰여진 글인가 말이다.

무슨 ‘인간적 예의인가!’ 그럼 YS가 ‘인간적 예의’를 저버리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집어넣은 것이고, DJ는 인간적 예의를 차려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풀어주었단 말인가! 아니면 인간적 예의를 지키면 구주류가 정신차린단 말인가!

강준만은 더 이상 ‘5ㆍ18’와 ‘DJ’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 이런 강준만의 이런 글이야 말고 진정 ‘5ㆍ18’와 ‘DJ’를 욕보이는 행동이며, 모욕하는 행동이다. 언제까지 특수한 전라도만의 ‘5ㆍ18’와 ‘DJ’를 이야기 할 것인가 말이다.

‘5ㆍ18’과 DJ는 역사 앞에서 당당하게 심판 받아야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런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의 5ㆍ18’과 ‘대한민국의 DJ’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인간에 대한 예의’ 지키며 전라도만의 구주류를 위한  5ㆍ18과 DJ가 되어야 하냔 말이다.

강준만은 지식인이 할 역할을 정치인에게 미루지 마라. 정치는 현실로 미래를 담보하는 것이고, 지식인은 미래로 현재를 담보하는 것이다. 강준만은 지식인에게 할 질타를 정치인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경상도인에게 질타할 사람은 지식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들에게 너무 큰 부담이다. 왜 그래도 깨어서 노력하는 정치인만 못살게 구냔 말이다. 유시민은 지금 예전의 지식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강준만은 옳은 길을 가면 되는 지식인이지 타협을 해야 하는 정치인이 아니다. 지금 ‘전라도 시각’에 상관없이 ‘대한민국의 5ㆍ18’과 ‘대한민국의 DJ’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5ㆍ18’을 내세워 구주류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다시는 이런 일로 ‘5ㆍ18’과 ‘DJ’ 팔지 않기 바란다. 그건 미스코리아의 참배보다 몇 천 배 못한 짓이다.

강준만은 이제 전라도와 DJ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지역주의와 전라도 그리고 김대중을 보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미둥 올림.

 * 본문은 시대소리 (http://www.sidaesori.com/) 에 실린 글입니다. 대자보와 시대소리는 연대 매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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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6/21 [13: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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