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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신당창당 어떻게 볼것인가?
민주당과 호남, 김대중을 보는 영남의 민심과 시각이 옳은가
 
강준만   기사입력  2003/06/20 [09:36]

▲유시민의원과 강준만교수     ©대자보

5·18과 호남 지역주의

매년 5·18을 맞이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그 답답함은 개혁과 진보를 표방한 지식인이나 정치인들마저 호남 지역주의를 다른 지역의 지역주의와 똑같이 양비론으로 다루는 발언에 접할 때면 개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보통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지만, 어찌 개혁과 진보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5·18에 대한 미화(美化)는 물론 거창한 가치 부여에 단호히 반대한다. 내가 아는 5·18 항쟁은 인간은 개돼지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개돼지가 아니라면 광주 시민들도 똑같이 개돼지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관련기사] 미둥, 누가 전라도와 김대중을 모욕하는가  ,시대소리

광주 시민들은 당시 신군부에 의해 개돼지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자비한 '인간 사냥'이 자행되었다. 신군부와 그들이 세운 5공은 그 학살을 은폐하고 왜곡했다. 훗날 민주화가 이루어져 5·18의 진상에 대한 정보에 자유롭게 접할 수 있게 되었을 땐 '광주'는 이미 역사가 되고 말았다. 다수 한국인들은 무고한 동족에 대한 학살극을 방관했던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기회를 상실했으며, 이는 광주학살과 5공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5·18 항쟁은 광주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전남 전역에 걸쳐 일어났으며, '광주'가 '호남'과 동일시되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호남인들은 광주학살과 5공을 분리해 생각할 수가 없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광주학살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 그 깊은 상처를 한(恨)으로 가라앉히면서 겨우 투표를 통해 그 한을 표출했던 호남인들이 온전히 이해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해심이 좀 있다는 사람들조차 나중엔 지겹다고 짜증을 내지 않았던가.

1971년 대선에서 강한 지역주의 투표 성향을 보인 건 영남이었지 호남이 아니었다. 영남은 김대중에게 45만표를 준 반면 박정희에겐 그 5배나 되는 222만표를 주었다. 반면 호남은 김대중에게 준 140만표의 반이 넘는 77만표를 박정희에게 주었다.

87년 대선 이후 선거 때마다 호남인들이 김대중과 그의 정당에 90%를 넘나드는 몰표를 준 걸 꾸짖는 사람들은 왜 그런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꾸짖음에 따르자면, 호남인들이 5공을 계승했거나 그 주체세력을 수용한 정당에게도 많은 표를 주어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는 것인데, 이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게 호남인들의 생각이다.

문제의 핵심은 호남 몰표가 아니라 광주학살과 5공의 분리주의다. 5공에서 맹활약을 했던 인사들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 어떤 반성이나 참회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지금 대통령직까지 염두에 둔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광주학살과 5공의 분리주의에 감염돼 있으니, 이게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비극의 본질이다. 5·18의 진실은 '경제'로 기름기가 끼어 무뎌진 그들의 양심을 바늘로 찔러 아프게 만들어야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누가 무슨 수로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개혁'과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나마 과거를 망각하는 '역사의 빈혈증'을 치유해주길 바랄 뿐이다.

유시민이 김근태에게 보낸 공개 편지

이상은 내가 {한국일보} 5월 19일자에 기고했던 칼럼이다. 지금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개혁당 국회의원 유시민을 염두에 두고 썼던 건 아니지만(김원웅은 염두에 두었다), 유시민의 주장에 반론을 펴는 데에 필요할 것 같아 미리 소개하였다.

신당 논의에 있어서 유시민이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유시민이 5월 15일 민주당 국회의원 김근태에게 보낸 공개 편지를 반론의 주요 대상으로 삼기로 하자. 유시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 의원님은 '수평적 정권교체와 정권재창출을 이룬 대중을 분열시킬 위험'만을 강조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선거 때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을 그대로 안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또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어라고 한나라당만 찍어온 대중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정권재창출을 이룬 대중은 소중하고 거기 협조하지 않은 대중은 그냥 버려 두어도 좋다는 말입니까? 만약 개혁신당 말고 영호남 유권자를 통합하는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면 저도 개혁신당론을 접고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에 앞서 우선 유시민의 선의(善意)만큼은 강조해두고 싶다. 유시민은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다. 그는 {한겨레21} 5월 15일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지난 대선은 전반전에서 겨우 1 대 0으로 이긴 것에 불과하다. 후반전에서는 두 골을 먹을지 세 골을 먹을지 모른다. 내년 총선에서 낡은 정당문화와 지역주의 정치지형을 허물지 못할 경우 한국 정치는 대선 이전 상황으로 복귀할 것이다. 앞으로 10년, 20년 한국 정치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분수령이다." (한겨레21)

이 발언이 말해주듯이, 유시민의 꿈은 매우 정의롭고 원대하다. 그러나 정의롭고 원대하기로 말하자면, 유시민이 발을 벗고 뛰어도 민주노동당 사람들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유시민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처럼 유시민의 꿈도 단지 정의롭고 원대하다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데엔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유시민의 꿈을 비판하는 나는 유시민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뜻인가? 그렇진 않다. 나는 그 누구건 아무리 '진보'를 자처하더라도 '호남차별'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구'라고 말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유시민은 '호남차별' 정서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로 호남을 적극 옹호해온 훌륭한 지식인이었다. 호남 문제를 떠나서도 그 유명한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인물과사상사 참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후 그의 언행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유시민의 선의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관련기사]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전문보기(대자보 62호)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유시민이 그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본의는 아닐망정 '호남 폄하'를 범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원하는 정치 실험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그 실패의 결과로 인해 호남이 부당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거니와 민주화의 역사가 훼손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유시민의 전략적 발언

유시민의 위 발언 가운데 핵심은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어라고 한나라당만 찍어온 대중은 어떻게 하시렵니까?"이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고민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권재창출을 이룬 대중은 소중하고 거기 협조하지 않은 대중은 그냥 버려 두어도 좋다는 말입니까?"라는 유시민의 다음 발언엔 동의하기 어렵다. 이게 유시민의 발언인가 하고 의심할 만하다. 지금 문제가 누가 더 '소중하다'거나 누굴 '버려 둔다'거나 하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유시민이 '전략적 발언'에 능하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시민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 발언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유시민의 목표가 과거의 잘못된 역사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고질적인 딜레마를 일시에 깨겠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그 부작용은 '호남 폄하'다. 유시민이 그걸 의도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히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민주당과 호남과 김대중을 보는 영남의 전반적인 민심과 시각이 옳은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딱 깨놓고 이야기해보자. 잠시 16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유시민은 "노태우 진영이 자기네 강세지역에서, '전략적 투표행위'를 유도하는 …… 반(反) 김대중 선전 선동을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전개했다고 믿는다"며 자신이 87년 대선 기간 중 대구에서 직접 목격한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골목시장 한 모퉁이에서 생선 장수, 생닭 장수, 참기름집 아저씨, 야채가게 아주머니 등등 보통 시민들이 모여서 선거 이야기를 하는데 누군가 대낮부터 한잔 걸친 거나한 목소리로 말한다.

"전두환이가 참말로 잘하기는 다 잘했는데 딱, 한 가지는 잘못한 기 있다 아이가."
"먼데?"
"김대중이 안 죽이고 놔둔 거. 그기 잘못한 거 아이가 이 말이라."

생각이 똑바른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여기저기 맞장구치는 소리와 더불어 토론 아닌 토론은 끝이 나고, 그 남자는 또 사람 모인 곳을 찾아 슬며시 사라진다. 그러나 개중에 그래도 양식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서 그나마 토론 비슷한 것이 이루어졌다.

"와? 김대중이기 니한테 돈을 돌라 카더나, 아이먼 니 딸을 내노라 카더나? 와 그 사람을 죽이삐라 카노?"
"김대중이, 그거 순 빨갱이 아이가!"
"그 사람이 빨갱인지 아인지 니가 우째 아노? 진짜 빨갱이라 카모 박 대통령이나 전두환이가 그냥 내삐리 놨겠나. 그라고 빨갱이하고 선거하는 노태우는 등신이라 말이가?"
"이 사람 이거, 혹시 고향이 전라도 아이가? 수상한 사람이네 이거 ……. 우쨌기나간에, 선거할 때 표나 마아 똑바로 찍어라. 영삼이 찍어주면, 김대중이 찍는 기나 마찬가지라꼬 안카나. 영삼이 갖꼬는 대중이한테 절대로 몬당하는 기라."

토론은 여기서 끝이 났다.(97대선 게임의 법칙, 유시민)

'호남 혐오 정서'에 기대는 건 안 된다

유시민은 "그거야 옛날 이야기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많은 영남 사람들이 김대중보다는 전두환에 대해 더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민주당과 호남과 김대중은 분리되기 어렵다는 데엔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그건 앞으로 분리되어 마땅하지만, 지금 영남 민심을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민주당과 호남과 김대중을 보는 영남의 전반적인 민심과 시각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면, 유시민의 주장은 설자리를 잃는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유시민으로선 그게 '현실'인만큼 그 '현실'을 인정하는 걸 전제로 해야 지역구도 타파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 바로 그거다.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했다간 불가피 영남 비판을 수반해야 할 것인즉,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대신 유시민이 택한 방법은 민주당 내의 인적 청산이다.

물론 유시민은 '인적 청산'을 주장하는 건 아니라고 여러 차례 말해왔다. 그러나 말만 그렇게 할 뿐 그가 원하는 게 '인적 청산'이란 증거는 무수히 많다. 유시민은 민주당 내의 인적 청산을 통해 호남 표가 분산되기를 바란다. 호남 표의 분산이 전제되지 않고선 영남 표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그런 분산을 위해 민주당 구주류를 비난하는 악역(惡役), 아니 십자가를 지기로 작정한 것 같다.

유시민의 다음 말을 들어보자.
"김 의원님이 제시한 길은 개혁인사들이 모두 민주당의 틀 속으로 들어온 다음 당명을 바꾸고 국민참여 경선으로 국회의원 후보 물갈이를 하는 '개혁적 통합신당론'입니다. 누가 여기에 참가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지구당 위원장이기 때문에 잘 알지 않으십니까. 민주당은 당지도부 선거를 할 때도 돈봉투가 돌아다니는 정당입니다. 지구당 공조직에 속한 당원들이 자기 당의 공직선거 후보를 위해서 발벗고 뛰기보다는 후보를 우려먹는 데 골몰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민주당의 정책과 노선은 훌륭할지 모르나 조직의 구조와 문화를 보면 민주당도 한나라당이나 자민련과 별로 다르지 않은 동원형 정당입니다. 이 구조와 문화를 바꾸지 않고 도대체 무슨 수로 현역 지구당 위원장을 물갈이할 수 있다는 말씀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몽땅 껴안고 가는 통합신당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민주당은 지난해 국민경선이 끝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미 1년 넘게 사실상의 분당 상태에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안방에서 끝도 없이 불길이 타오르는 집을 증축해 봐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증축한 집도 조만간 그 내분의 불길에 휩싸이고 말 것입니다. 저는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싶지 않습니다."

김근태가 생각하는 것이 유시민이 주장한 대로라면 나 역시 단호하게 유시민의 편에 설 것이다. 그러나 그렇진 않다. 김근태는 유시민의 위와 같은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유시민의 우려엔 동의할 수 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적 물갈이 없이 신당 만들어봐야 구태(舊態)만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유시민이 그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게 아니라 인적 물갈이 방식을 선호하고 있으며 그 방식이 다분히 '호남 혐오 정서'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왜, 어떻게 그런가는 앞으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나는 그런 방식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유시민이 인적 물갈이 못지 않게 중요한 제도와 시스템의 중요성을 인적 물갈이를 위해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시민이 물갈이를 원하는 사람들도 신당이 추구하고자 하는 제도와 시스템의 대원칙들에 동의만 한다면 문제될 게 없다. 따라서 신당은 그 대원칙을 내세우면서 그 대원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빼고 가는 방식을 취해야 할 텐데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방식은 그게 아니다. 왜 그럴까?

유시민의 줄타기

유시민이 가장 염려하는 건 민주당 내 '인적 청산'을 하지 않음으로써 영남 민심에 어필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시민은 흠 잡히지 않을 '원칙적 발언'과 전략과 전술로 짜여진 '속내' 사이를 줄타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21] 5월 15일자 인터뷰는 유시민의 그런 줄타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유시민은 이 인터뷰에선 매우 '온건한' 주장을 폈다. 다음과 같다.

"법률적으로 신당이 민주당의 법통을 이어받느냐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당원이 주인이고 유권자들의 뜻을 반영하는 참여형 정당이면 된다. 내년 총선에 나설 후보자 결정 과정에서 당원경선이든 국민경선이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조건만 갖추어지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된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의 기준도 필요 없다.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한겨레21)

기자는 깜짝 놀라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인다.

"아니, 유시민의 입에서 이렇게 온건한 소리가 나오다니. 대선 때 '민주당이 왜 안 쪼개지는지 초조했다' 등의 독설을 퍼부어 민주당 내에 광범위한 혐오증을 불러일으켰던 유시민이 아니던가. 신주류로 분류되는 한 의원조차 '(재보선에서) 당선돼도 걱정이고 떨어져도 걱정'이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 유 의원은 대선 당시 민주당에 대한 자신의 강성 발언을 '상황론'과 '전략론'으로 설명했다."(한겨레21)

어디 유시민의 설명을 들어보자.

"당시 상황에서는 반노 그룹이 민주당에서 나가는 것이 대선 승리에 유리했다.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노 후보를 흔들어대니, 그럴 바에는 나가서 공격하라는 뜻이었다."
"대선 당시 표는 세 부류가 있었다. 첫째 '민주당이든 아니든 노무현이 좋다.' 둘째 '민주당 후보이기 때문에 찍겠다.' 셋째 '노무현은 괜찮은데, 민주당이라 찜찜하다.' 첫 번째는 무조건 찍을 것이고, 두 번째는 노 후보가 탈당하지 않는 한 찍어줄 것이다. 문제는 영남의 개혁성향이 대표하는 세 번째 부류다. 이들을 결속시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노무현이 당선되면 민주당을 바꿀 것이다. 그러니 믿고 찍어달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한겨레21)

기자의 해설이다.

"하지만 유 의원은 대선 이후에도 민주당을 자극했다. 그는 '개혁당의 목표는 2004년 총선 때 전국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를 내는 것이다. 적어도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 개혁당 후보들이 일정한 득표를 한다면 구태의연한 민주당 후보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개혁당 후보들은 당선은 안 되더라도 최소한 민주당 의원은 떨어뜨릴 수 있다는 '협박'이다. 유 의원은 '협박'이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를 '치킨 게임'에 비유했다.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돌진해오다 먼저 피하는 사람이 지는 경기 말이다."(한겨레21)

이어지는 유시민의 발언을 들어보자.

"치킨 게임은 잃는 것이 적은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민주당과 개혁당이 서로 부닥칠 경우 개혁당은 잃을 것이 별로 없는 반면, 민주당은 손실이 너무 크다. 그러니 '민주당이여, 기득권에 안주하지 말고 어서 환골탈태를 서두르라'는 촉구성 발언이다."(한겨레21)

유시민 전략의 함정

유시민의 그런 '전략가적' 면모를 이해한다면, 그가 '원칙적 발언'과 '속내'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민주당 의원들을 다 끌어안고서도 유시민이 김근태에게 토로한 다음과 같은 희망 사항은 실현될 수도 있다.

"저는 당원모집부터 철저하게 국민운동 방식으로 하고, 지구당도 상향식으로 구성하며, 주요 당직도 각급 당조직의 당원들이 선출하는 참여형 정당을 원합니다."

이 원칙에 따르지 않겠다는 민주당 의원들만 빠지면 되는 것이다. 굳이 처음부터 '청산'을 내걸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민주당 의원들이 '도박'을 하는 자세로 그 원칙에 따르기로 해 모든 의원들을 다 끌어안고 가게 된다면, 그게 과연 유시민이 원하는 걸까? 아니다! 유시민이 앞서 던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유시민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어라고 한나라당만 찍어온 대중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대중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영입해야 할 한나라당 의원들도 문제가 될 것이다. 유시민은 {월간중앙} 2003년 6월호 인터뷰에서 그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신당이 어떤 양식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민주당의 리모델링 방식이 된다면 한나라당 의원들이 절대 참여하지 않을 겁니다. 참여가 곧 죽는 길이 될 테니까요. 그러나 기성 정당과 절연하는 방식의 신당이라면 참여할 겁니다. 그럴 수 있도록 신당의 주체와 지향을 뚜렷이 하는 한편 지역주의와는 단절하고 기득권은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야죠. 그래야 명분 있게 참여할 수 있고, 그 분들이 철새가 안 되죠."(월간중앙)

신당이 민주당의 리모델링을 훨씬 뛰어넘는 그 이상의 방식이 되더라도 모든 민주당 의원들이 다 참여하게 되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마찬가지로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유시민이 의도적으로 민주당 구주류 인사들을 계속 자극하는 발언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시민은 "민주당 구주류의 행보는 어떻게 예측합니까. 그들의 이른바 민주당 '법통론'은 어떻게 보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구주류는 (민주)당을 뛰쳐나가면 '호남 민국당', 남으면 '호남 자민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됐든 결과는 호남 민국당 신세죠. 나가면 더 소수가 될 것이고, 남아서 민주당의 법통을 잇는다고 해도 물질적 기초, 즉 재정면에서야 더 유리하겠지만 무엇에 의존해 내년 총선을 치르겠습니까. 호남 민심밖에 더 있어요? 아마 호남에서 승인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존속 가능한 세력으로 자리잡기는 어려울 거예요."(월간중앙)

과연 그럴까? 신당이 개혁당과 같은 참여형 정당으로 변신하는 데에 반대해 빠진 사람들은 호남에서 승인하지 않겠지만, '모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한 자극을 주어 민주당 구주류로 하여금 딴 살림을 차리게 한다면, 호남 민심은 결코 유시민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유시민의 일견 탁월해 보이는 전략의 깊은 함정이 있다.

유시민의 이중 잣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유시민의 이중 잣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의 과거에 대해선 더할 나위 없이 관대하면서도 민주당 구주류의 과거에 대해선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 기자와 유시민이 주고받은 문답을 음미해보자.

기자 : "개혁신당파 쪽에서는 박상천·정균환 의원의 자격에 대해 말하지만 유 의원에게 우호적인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일반론이지만 정치인들은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면 개혁과 수구를 넘나들 수 있다는 거죠."

유시민 : "거의 모든 것이 까발려질 겁니다. 보호색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김홍신 의원은, 소위 '공업용 미싱' 발언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그 발언은 사실 과했습니다. 그러나 과한 발언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야죠. 그런 발언도 웃어넘기는 정치가 돼야 합니다. 그 발언에 대해서도 평가받겠죠. …… 신당의 주체로 지역주의를 주도적으로 선동했거나 능동적으로 활용한 분이 나서면 실패입니다.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 분, 정치생명을 '올인'(포커 게임에서 판돈을 한꺼번에 모두 거는 행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서야 돼요. 노무현 대통령 이후에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야죠. 다선 의원, 고위직 출신, 큰 계보의 보스 따위의 기준은 의미가 없습니다." (월간중앙)

나 역시 김홍신의 그 발언을 문제삼아 김홍신의 개혁신당 합류에 반대하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유시민처럼 웃어 넘길 수는 없지만, 유시민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 문제는 유시민이 그렇게 웃어 넘길 수 있는 포용력을 민주당 구주류에겐 전혀 발휘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유시민은 "민주당 사람들, 특히 개혁신당에 비판적인 구주류에게 고언을 한다면"이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민심의 바다'에 자신을 띄워 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스스로 떳떳하다면 단일 신당에 못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분들 중 자기 힘으로 의원이 된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DJ(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13대 때부터 내리 당선된 박상천·정균환 의원은 99%가 DJ 덕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던 지도자의 시대가 가면 그 시대와 함께 퇴장하는 미덕을 보여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자라나는 싹들이 꽃을 피우죠. 그 분들이 그런다고 대통령 할 것도 아니잖습니까. 무슨 열망이 남아 개혁적 흐름을 방해하는지 모르겠습니다."(월간중앙)

나 역시 지난 대선 국면에서 구주류의 '노무현 흔들기'를 강하게 비판했던 사람으로서 구주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지만, 유시민의 위와 같은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위 발언을 의도적인 도발로 이해한다. 내가 아는 유시민은 호남 지역주의에 대해 그렇게 천박한 인식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따질 건 따져보자. DJ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들이 오직 그들뿐일까? 모든 한나라당 의원들이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나라당 의원들 가운데 내리 당선된 의원들도 99%가 DJ 덕이 아니란 말인가? 유시민식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게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지역주의와 관련하여 한국 사회 일각에 떠돌고 있는 이른바 '엘리트-민중 분리주의'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지역주의로 재미를 본 건 영호남의 엘리트일 뿐 영호남 민중은 피해자라는 식의 주장 말이다. 나 역시 그런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일면일 뿐 전체의 모습은 아니라는 점을 늘 분명히 해왔다.

그런데 유시민의 위와 같은 주장은 과도한 '분리주의'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이 섬기던 지도자의 시대가 가면 그 시대와 함께 퇴장하는 미덕을 보여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라는 발언은 지나치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에 떵떵거리던 사람들이 지금도 맹렬하게 활동하면서 자기 동네에서는 존경까지 누리고 있는데, 왜 김대중의 사람들만 그런 '미덕'을 보여야 한단 말인가?

나는 유시민이 구주류의 과오를 응징하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친 모욕적 발언으로 그들을 키워주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결과가 나타날 경우 유시민의 오류가 비판을 받는 게 아니라 호남인들의 선택이 욕을 먹게 돼 있다는 점이다. 이건 곤란하다는 것이다.

구주류에 대한 모욕적인 비난으론 안 된다

유시민은 "한나라당을 어떻게 보나요?"라는 질문엔 이렇게 답했다.
"선거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영남을 볼모로 잡고 있는, 극우세력 주도의 병든 보수 정당이죠. 인구가 가장 많은 영남이 기반이다 보니 선거 제도를 고치려 들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역주의라는 외피랄까, 일종의 보호막을 걷어내면 왜소한 당으로 전락할 겁니다. 합헌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 보호막을 제거해야죠. 지역주의를 깨려는 의지가 손톱만큼도 없는 당이 뻔뻔스럽게 무슨 국민통합을 입에 올립니까."

기자는 "이 대목에서 그는 '열받는다'며 하던 말을 잠시 중단했다"고 밝히고 있다. 유시민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신당도 호남 기반을 다 가져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영남의 지역주의가 우월적인 패권의식이라면 호남 지역주의는 역사상의 사건으로 인한 피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서로 등가(等價)는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이런 지역주의를 반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월간중앙)

그렇다. 이마저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지만('피해의식' 정도가 아니며 그런 지역주의 반복의 책임을 호남에게 물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말을 하려면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 한나라당에 대해선 열받을 정도로 강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기존 지역구도를 타파해보자는 말을 해야지, 민주당 구주류에 대한 모욕적인 비난으로 대응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또, 앞서도 지적했지만, 유시민 자신이 자꾸 '원칙적 발언'과 '속내' 사이를 줄타기하고 있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유시민은 {시민의 신문} 5월 12일자 인터뷰에선 "여야 의원 및 참여 인사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면"이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하는 기준은 없다. 인적 청산은 신당의 목표가 아니다. 심지어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나 민주당 정균환, 박상천 의원이 입당한다 해도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당에 참여한 분들 중에서 경선을 통해 당원과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 공직후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물교체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다."(시민의신문)

그러나 유시민은 이 같은 인터뷰에서조차 "40, 50대 시민사회 지도자들의 신당 참여 결단과 협력을 요구했는데, 현재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을 밝힌다면"이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특정인의 실명을 거론할 수는 없지만 시민사회로부터 존경받아온 훌륭한 분들 중 신당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분이 적지 않다. 이미 만난 분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많은 분들을 만날 것이다. 국민들이 보고 '저 사람도 참여했어, 이번 신당은 정말 다르겠는데'라고 하실 수 있는 분들이 참여할 것이다."(시민의신문)

이러한 구상이 말해주듯이, 인적 청산은 유시민이 생각하는 신당의 절대적 전제 조건이다. 새로 수혈할 시민단체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혁당 내부 사정도 있는데, 민주당 의원들이 모두 다 참여하겠다고 한다면 무슨 일이 되겠는가?

'이념적 보수성'과 '행태적 보수성'

유시민의 고충을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 유시민이 쓰고 있는 '구주류 모욕하기'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들이 지난 대선에서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적어도 민주 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엔 광주학살 세력과 한 이불을 쓰면서 잠을 자고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뛰었던 한나라당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진 않을 것이다. 유시민이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유시민이 생각하는 '개혁'의 실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이른바 '이념적 보수성'과 '행태적 보수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민주당 구주류의 '행태적 보수성'에 대한 유시민의 비판에 동의한다. 내가 주목하는 건 유시민이 오직 '행태적 보수성'만을 문제삼고 있다는 것이다. 유시민이 지칭하는 '한나라당 개혁파'(나는 이 말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원이라는 사람들이 그 어떤 '행태적 진보성'을 갖고 있을망정(나는 그렇게 보지도 않지만), 그들은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뛴 '이념적 보수성'을 보인 사람들이다. 반면 민주당 구주류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때로 노무현보다 더 '이념적 진보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유시민이 '내부 갈등의 함정'도 유념하면 좋겠다. 크게 보자면, 유시민은 그간 '범민주당 사람'이었다. 그래서 민주당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고 추악한 꼴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원 없이 지켜봤을 것이다. 또 지난 대선 기간 중 싸움도 많이 벌였다. 내부 싸움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이게 원수 만들기 십상이다. 외부의 적(敵)은 주로 이념적 적이기 때문에 감정이 상할 일이 없는 반면 내부의 적은 그렇지 않다. 나도 겪어봐서 알지만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더티플레이(dirty play)로 공격을 해오면 인간에 대한 혐오와 환멸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마지막 균형은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혹 유시민은 과거 꼬마 민주당이나 통추의 정서에 기울어 있는 건 아닌가? 나는 월간 {인물과 사상} 2003년 4월호에 쓴 <지구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도는가?: '자기 중심주의'는 개혁의 최대 적(敵)이다>는 제목의 글에서 그 정서는 역사적으로도 옳지 않았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박계동과 제정구'라는 소제목하의 글만 여기에 다시 소개하고 싶다.

박계동과 제정구

지난 2월 7일 고 제정구 의원의 4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이 추모사를 했다. 노무현은 97년 대선 때 고인과 갈라졌던 걸 언급하면서 미안한 심정을 토로했다. 추모사가 끝나자 전 의원 박계동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던가.

"노무현보다는 제정구가 옳았습니다. 무슨 변명을 그렇게 해!"

그러나 나는 박계동의 이 외침에서 제정구를 앞세워 자신의 이회창 지지를 정당화하려는 야욕을 읽는다. 노무현보다는 제정구가 옳았다는 주장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박계동이 적어도 자신의 반평생 동안 민주화와 개혁과 진보를 표방해온 인물인 이상 자기 정당화를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은 면키 어려울 것이다.

나는 제정구보다는 노무현이 더 옳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은 김대중을 한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그의 역사적 의미를 비교적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래서 대통령도 될 수 있었다. 김대중이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라는 말은 이런 점에서도 타당하다.

반면 제정구와 박계동은 인간 김대중의 한계와 문제는 제대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김대중에게 부과된(또는 김대중이 영악하게 포착한) 역사적 의미는 읽어내지 못했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도 순진했거나 단순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김대중이라는 개인과 그 개인의 역사적 의미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과거 재야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김대중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깨끗하고 존경받을 만한 과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김 정치 구도하에서 소외되거나 아예 정치판에서 퇴출당한 쓰린 경험을 갖고 있는데, 그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사람이 3김 가운데 김대중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들의 민주화 투쟁 경력에 존경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이 일그러진 역사의 부산물로 생성된 정치 구도에서 비롯된 문제의 책임을 김대중에게만 돌리면서, 김대중에게 인간적인 증오와 혐오까지 드러낸다는 것은 철딱서니 없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김대중을 지지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을 미치광이로 보는 게 아니라면, 그건 불행한 역사의 업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김대중에 대한 증오와 혐오는 무서운 '인정 투쟁'의 결과일 수도 있다. 김대중과 갈라선 사람들은 보수 정치인들 가운데 김대중의 상대적 진보로 인해 졸지에 자신이 훨씬 더 보수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나라당에 들어가 있거나 그 쪽과 상종했던 재야 출신 정치인들이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좀더 솔직해지기를 바란다. 김대중만 물고늘어질 것이 아니라 김대중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의 선택에 정면 대응해주기를 바란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어떤 집단적 광기에 감염되었었다거나 아니면 무슨 다른 문제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다. 김대중의 역사적 의미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선택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했다. 상업 고등학교 출신도 쉽게 이해하는 문제를 왜 그 수많은 서울대 출신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실제로 김대중을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재야 출신 정치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다.) 서울대가 조장해 온 '자기 중심주의' 문화와는 무관한 것일까?

궁금한 건 또 있다. 왜 김대중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재야 출신 정치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영남 출신일까? 민주화건 진보건 그 무엇을 내세우건 그런 사람들마저도 영남의 자기 중심주의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앞으로도 당분간 불행한 사태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김대중의 반대편에 섰던 재야 출신들의 명예는 반드시 김대중을 죽여야만 복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개인에게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집권을 통해 실현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러나 그건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김대중을 악마 비슷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나는 이들의 그런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믿는다. 나는 글쟁이이기에 앞서 한 시민으로서 그런 불순한 책동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혼자 잘난 척해서 미안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신범이 아전인수격으로나마 강조한 바 있는 '역사와 국민'에 대한 범죄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23년 묵은 역사의 상흔이다

위에 소개한 글이 너무 거칠어 미안하게 생각한다. 유시민이 자주 거론하는 박상천과 정균환이 아무리 혐오스럽고 그들에게 그 어떤 문제가 있을망정, 그들은 그 어떤 한나라당 의원보다 더 한국 사회의 개혁과 진보에 기여해 온 사람들이라고 보는 호남의 시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에서 드린 말씀으로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유시민은 텔레비전 토론에서 민주당 구주류의 사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게 신당 참여의 조건이라는 데엔 동의할 수 없다. 그 조건이 성립하려면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의원들의 사과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사과를 할까? 유권자들이 알아서 응징할 일 아닐까? 유권자들의 응징을 믿는다는 게 아니다. 지금 나는 시종일관 형평을 말하고자 하는 거다.

'형평'만 따졌다간 유시민이 원하는 개혁은 물 건너갈 수도 있다. 그래서 앞서 유시민이 생각하는 개혁의 본질이 뭐냐고 물은 것이다. 유시민의 오랜 민주화 동지인 이명식이 인터넷신문 {이윈컴} 5월 17일자에 올린 글도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한 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명식은 유시민이 "존경하는 김근태 의원님, 개인적으로 잘 알고 존경하는 선배와의 정치적 결별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겨냥해 다음과 같은 고언을 주었다.

"개혁을 이루고 국민통합을 지향해 가는 과정에서 동지들 간에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차이를 지나치게 부각시켜 '정치적 결별'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김근태 의원과도 함께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유시민 동지가 함께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유 동지가 하고자 하는 정치가 어떤 정치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명분과 시대의 흐름도 중요하지만 민주화와 통일로 가는 험난한 과정을 함께 해온 동료 선후배들에 대한 애정과 배려도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국민을 믿고 개혁세력의 독립선언을 시도한다면 우선 역사와 국민 앞에 겸손해지고 스스로를 낮출 줄 알기를 진심으로 당부드립니다."

그렇다면 나의 대안은 무엇인가? 유시민의 생각과 같다. 물론 그의 '원칙론'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내가 반론을 제기한 건 그의 '속내'였지 그의 '원칙론'이 아니다. 다시 소개한다. 유시민이 김근태에게 토로한 다음과 같은 희망 사항을 실현해보자는 것이다.

"저는 당원모집부터 철저하게 국민운동 방식으로 하고, 지구당도 상향식으로 구성하며, 주요 당직도 각급 당조직의 당원들이 선출하는 참여형 정당을 원합니다."

이 원칙에 따르지 않겠다는 민주당 의원들만 빠지면 되는 것이지, 구주류에 대한 모욕과 자극을 통해 그들을 애써 분리시킴으로써 영남 민심에 영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변화를 확실히 이뤄내는 것만 해도 엄청난 개혁이요 진보다.

지금 유시민은 지역구도 타파라는 목표에 과욕을 부린 나머지 본말의 전도를 범하고 있다. 유시민이 한나라당 개혁파나 민주당 신주류를 향해 "5·18 때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민주당 구주류 인사들의 항변을, '미래를 위한 지역주의 타파'라는 말로 잠재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이다.

내가 유시민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80년대 내내 그가 걸어온 가시밭길에 대한 존경이다. 80년대 내내 편하게 살다가 세상 좋아지니까 개혁과 진보를 혼자 전세낸 것처럼 떠드는 건 아무리 '미래'를 강조해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나 같은 사람의 한계도 바로 거기에 있으며 나는 그 한계를 흔쾌히 수용한다. 그래서 유시민의 그런 발상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유시민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폄하'의 권리는 있겠지만 그가 옹호하는 사람들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유시민은 다시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어라고 한나라당만 찍어온 대중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나는 그들이 5·18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게끔 우리 모두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건너뛰고 유시민의 뜻대로 '호남 폄하'를 통해 전국 정당이 만들어진다 해도 그걸로 지역주의가 타파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23년 묵은 역사의 상흔이 그렇게 일거에 해소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한 <5·18과 호남 지역주의>라는 글과 서남대 교수 김욱이 {오마이뉴스} 5월 20일자에 올린 다음과 같은 주장에 유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유 의원은 전국적인 득표가 가능한 정당만 만들어지면 지역주의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가치판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유 의원이야 지역주의의 원인이 양김이고 모든 것을 단절시킨 채 새출발(?)만 하면 지역주의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최근사의 지역주의의 핵심은 5·18이고 우리들 마음속에서 이 5·18에 대한 평가가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는 한 지역주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유시민도 그 점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나는 유시민이 어떻게 해서든 지역주의를 타파해보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걸 높게 평가한다. 다만 성급한 과욕과 '호남 폄하'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전략적 사고가 그 선의(善意)와는 달리 오히려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는 말을 하고자 할 뿐이다. 유시민이 호남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애쓴 자신의 과거에 누가 되는 발언을 더 이상 하지 않기를 바라며 유시민과 개혁당의 성공을 기원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

이 글이 인쇄돼 독자들의 손에 들려 있을 때면 이미 민주당 내분이 갈 데까지 가서 완전한 분당 사태로 귀결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영남 민심에 영합하기 위해 구주류를 모욕하지 말고 제도와 시스템 중심의 개혁을 시도하라. 그렇게만 하면, 기존의 갈등과 분리는 얼마든지 다시 봉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구주류가 김대중 정권의 성공을 위해 자기들의 모든 걸 바치기보다는 정권교체의 과실을 향유하는 데에 바빴다고 보며 그래서 그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글을 통해 그런 생각을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유시민에게 구주류를 모욕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뜻을 깊이 헤아려주기 바란다. 한국인은 형평성에 대단히 민감한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시민은 민주노동당 기관지가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한 기사를 실은 걸 봤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기사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양쪽이 힘을 합해 극우세력과 싸워도 이쪽 힘이 모자랄 텐데 왜 민주노동당은 유시민 비판에 더 열을 올리는 건가? 그런 답답함이었다.

나는 유시민이 민주노동당의 그런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민주노동당의 비판은 그 알맹이만 보자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민주당 덕분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유시민이 민주당 구주류를 모욕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대의(大義)를 위해 그런 정도의 작은 모순을 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능가할 수 있을 만큼 절박한 당위와 명분은 흔치 않다. 김대중은 그 점에선 실패했다. 김대중은 역사적 소명에 충실했을망정, 그 소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 못했다. 유시민 주변에 김대중을 증오하는 재야 출신 인사들이 많이 있을 것이기에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것이다(나는 김대중이 어떤 식으로건 그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했어야 옳았다고 믿는다).

지금 유시민이 민주당에 대해 문제삼고 있는 건 바로 김대중의 그런 점일 수도 있다. 나는 유시민이 김대중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유시민에겐 김대중이 추구했거나 이용했던 '역사적 소명'의 무게에 값하는 소명이 없다는 것도 감안하면 좋겠다.

신당 문제에 대한 견해는 좀 다르지만, 유시민에 대한 나의 지지와 존경은 변함이 없다는 건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유시민이 기존의 잘못된 확신을 버리길 간절히 바란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http://inmul.co.kr) 7월호에 게재된 것을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대자보에 독점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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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6/20 [09: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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