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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보이즈와 스윙걸스, 꼴찌들에게 박수를
[비나리의 초록공명] 야구치 시노브 감독과 대책 없는 아이들의 세계
 
우석훈   기사입력  2006/04/08 [07:12]
1.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스

나는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영화라는 게 대체적으로 '맥락'이 바뀌면 재미가 없어지는 게 대부분이고, 시대상이 바뀌면 전혀 엉뚱해지는 게 일반적이다. 옛날에는 그렇게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들도 요즘 보면 별 시시한 영화인 경우도 많고, 대화 중에 나오는 비꼬는 대사들의 원맥락을 모르면 웃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채플린의 영화들이 돋보이는 것은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동이 줄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에 새로 복원해서 출간한 '로버트 태권V'를 보았는데, 사실 괴로웠다. 필름 상태도 그랬지만 어쩌면 그렇게들 촌스럽게 대사처리를 하는지, 요즘 관점에서 본다면 "여자는 남자가 하는대로 따라야 한다"는 훈이가 영희에게 하는 대사는 그야말로 '마초영화'로 몰려 대중비판에 올라가기 딱 좋다.

아마 시간이 흘러도 재미가 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영화 중에 내가 최고로 치는 영화가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워터 보이즈’이다. 얼마나 이 영화를 재밌게 보았냐면 결국 다시 수영을 하기 시작했는데, 언젠가는 '플라맹고' 동작을 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 개봉한 '스윙걸즈' 역시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영화인데, '워터 보이즈'만큼 재밌지는 않지만 도대체 시노부 감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 영화 <워터 보이즈>의 한장면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질 수 있다. "가난하고 공부못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 남자학교에서의 축제를 위해서 준비되는 수중발레나 여학교에서의 듀크 엘링턴의 "A선 기차를 타요(Take the A train)"이라는 재즈곡 연주에 도전하는 것까지는 모두 장치일 뿐이다. 참고로 A선은 뉴욕시에서 할렘까지 왕복하는 8번선 기차를 의미한다. 도대체 학교에서 문제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유쾌하면서도 경쾌한 시각으로 푼 것이 두 영화의 특징인 셈이다.

2. 뭔가를 배워야 하지 않겠어?

두 편의 영화는 무명의 고등학생 배우들이 공개 오디션을 통해서 선발되었고, 수개월에 걸쳐서 진짜로 수중발레와 악기들을 배웠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소위 일본식 '하이틴 돌' 중에서 그냥 데려다가 사용하는 방법도 있을 테지만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덕분에 제작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수개월 동안 진짜로 뭔가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정성마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이렇게 수중발레를 배운 남학생들이 우여곡절 끝에 축제 때 학교 수영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서 인근 여학교의 50m짜리 풀장에서 벌이는 '워터보이즈'의 20분간이 넘겨 펼쳐지는 수중발레신은 최고의 초절정 감동이고, 이 마지막 장면을 웃음 없이 보기 어렵고, 매번 보면서도 눈물 없이 영화를 끄게 되지는 않는다.

울음이 나는 것은 고3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수중발레라도 해보고 싶다는 경우가 우리나라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고 두 개의 영화 모두 이 불량아들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작은 구멍가게 주인을 포함한 지역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일도 우리나라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별로 기술이나 예능도 없는 18세 청소년들이 미래에 대한 '투철한 의지' 없이 "재밌을 것 같아서" 혹은 "뭔가 의미있을 것 같아서" 학교에서 벌이는 '명랑한 감동'이 바로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일본에서 벌어진 실화이다.

▲ 영화 <스윙걸즈> 포스터     © 시네서울 제공
3. 학교가 지옥이 될 것인가 해방구가 될 것인가?


수중발레를 배우거나 재즈의 곡 하나를 더듬거리면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인생이 화려하게 바뀌거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대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러한 노력이 아름답고 박수를 받는 것은 그들이 승자라서가 아니라 모두가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공부를 잘 하는 것만이 태어난 이유가 아니라는 한국과 일본의 공통적인 감정 때문일 것이다. 고 2, 고 3, 예능계로 진학을 레슨을 받고 있지 않고, 그렇다고 공부를 특출나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집도 특별히 잘 사는 것도 아닌 아이들에게 사회나 학교가 해줄 수 있는 얘기는 사실상 없고,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길도 없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영화 워터 보이즈는 미래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지도 않고,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와 같은 청승맞은 독백 따위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미래에 잘 되기 위해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니까"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학생들은 학교라는 공간, 게다가 선생님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유와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찾게 된다.

야구치 시보느 감독은 교육인이 아니지만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셈인데, 도대체가 답이 없고 대책 없는 이 아이들에 대해서 그래도 재미있고 의미 있는 놀이들을 계속 찾아내는 셈이다. 만약 누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 역시 "글세, 어렵겠지"라는 말 외에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이미 더 이상 공부로는 어쩔 수 없는 이 청소년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모두가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건 전부 알고 있고, 또 모두가 공부를 잘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데, 그 소수의 성공한 학생들 외에는 도대체 학교에 왜 와야 하는 것이고 도대체 그 따분한 수업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교육들을 왜 받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그 나이에 동네 깡패밖에는 할 것이 없다는 궁색한 변명 외에는 없어 보인다.

예술과 스포츠에 밥 먹고 사는 기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감독의 시각은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지옥이었던 학교가 수중발레와 재즈를 통해서 잠깐이지만 해방구로 변하는 순간이 바로 스크린에 투영되어 있다.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서 여전히 답은 없지만 여전히 답을 찾아보고 싶은 애정만큼은 스크린에 가득 차있다.

"너희들은 제국의 군인들이 아니야!"

어쩌면 좋으랴! 우리나라의 학교는 다양한 형태로 제국의 군인이 되기를 요구하는 사관학교의 연장에 다름 아닌데 말이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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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4/08 [07:1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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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2006/04/10 [21:41] 수정 | 삭제
  • 잘 읽었습니다.
    영화를 비디오로라도 꼭 보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