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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시민사회 '제3 피플파워' 태동하나?
아로요, 퇴진요구에 '친위쿠데타 의혹 비상사태'로 반정부세력 억압
 
최별   기사입력  2006/03/02 [17:30]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한 지 1주일이 지나고 있다. 그녀는 일부 군경 요원들과 좌파계열 활동가들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혐의로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아로요 퇴진운동을 벌이는 시민사회는 무능과 부정부패를 단죄하려는 여론을 억누르려는 음모로 소위 '친위 쿠데타'라고 비난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04년 부정선거로 대권을 잡은 증거가 들통나고 유권자들의 퇴진압박이 거세지자 이를 덮으려는 술수라고 반발하고 있다.

필리핀 언론 뿐 아니라 외신들도 필리핀의 비상사태 선포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쿠데타 혐의가 뚜렷하지 않은데다 좌파정치권의 반정부 행보는 민주사회의 기본권리로 정당한 움직임이 아니냐는 것이다.
 
"2004년 부정선거 의혹 덮으려는 음모"
 
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반정부 성향의 언론을 폐쇄한 것도 납득할 수 없다는 태도다. '피플파워' 20주년에 터져나온 아로요의 강경 조처가 위기 탈출을 위한 시나리오가 아니냐는 게 필리핀 시민사회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공감대이다. 두 번의 피플파워로 권력을 향유한 정치엘리트들이 민주주의 발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길거리에서 아로요 퇴진 현수막을 들고 시위중인 필리핀 시민들.     © 필리핀인디미디어

필리핀 정부는 비상사태 선포 닷새째인 28일 아로요의 퇴진을 요구했던 야당 의원을 포함해 대통령을 축출하려 한 음모와 연관된 16명을 반란혐의로 체포해 기소했다고 밝혔다. 야당 연합 대표이며 하원의원인 크리스핀 벨란트, 퇴직 장군인 라몬 몬타뇨 등이 포함돼 있다. 또 검거를 피해 잠적한 사뚜르 오캄포(바얀뮤나당), 리사 마사(가브리엘라당), 라사엘 마리아노(아낙파위스당) 하원의원도 추적하고 있다.

계엄당국은 또 쿠데타 혐의로 2명의 군 관계자와 1명의 고위 경찰인사를 직위해제 한데 이어 구금,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당국이 밝힌 3명은 필리핀군 특수부대 사령관인 다닐로 림 준장, 해병여단 지휘관인 아리엘 퀘루빈 대령, 경찰 특수기동대장인 마르셀리노 프랑코 총경이다.

필리핀 정부는 이밖에도 쿠데타 연루 인물이 더 있어 추적 중이라고 언급했다. 물론 그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야당 의원, 군경 요원, 그리고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일단의 사람들이 아로요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해 모의를 했으며 무장투쟁으로 권력찬탈을 노렸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정당성이 결여된 비상사태에 대해 나라 안팎의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아로요 대통령(58)은 1일 전국에 생중계된 대국민 연설에서 이른 시일에 비상사태를 종결하겠다고 말했다. AFP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국방, 법무, 경찰청에 사흘안에 쿠데타 혐의에 대한 최종 결론을 보고하라고 요청했으며 치안이 확보됐다는 판단이 서면 즉시 비상사태를 해제키로 했다는 것이다.
 
정치인, 좌파, 군인 등 반발인사 잡아들여
 
라울 곤잘레스 법무장관은 아로요의 대국민 연설이 끝난 직후 언론과 대담에서 "상황이 안정되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비상사태를 끝내라고 보고할 시점은 아닌 것 같다"고 밝혔다. 위기가 완전히 마무리됐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설명이었다.

이 같은 당국의 움직임에 대해 시민사회는 크게 요동치고 있다. 아로요의 비상사태와 함께 시위&집회가 금지된 데 이어 언론사가 폐쇄되고 학교 폐쇄 명령이 떨어지자 정치권, 일부 군인들, 그리고 시민사회가 즉각 반박 성명을 발표하거나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아로요 정권의 비상사태에 대해 반정부투쟁을 억누르려는 '친위쿠데타'라고 비난하며 시민사회단체들은 '제3 피플파워'를 준비하고 있다.     © 인디미디어

'피플파워' 20주년 기념행사 중이던 24일 비상사태 선포소식을 접한 시민사회단체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5천여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비리 무능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이날 시위에는 86년 피플 파워로 대통령에 올랐던 코라손 아키노도 참여해 "비상사태는 독재시대의 유물"이라며 "아로요는 민주주의를 압살하려는 시도를 중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권리를 지키려면 국민이 나서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마르코스 정권시절 반정부 활동으로 여러해 감옥생활을 하다 국외 추방됐으며 아로요의 퇴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호세 마리아 시손도 비상사태가 발표되자 즉시 성명을 내고 "포고령 1017은 독재적 발상"이라며 "아로요 퇴진투쟁에 국민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리핀의 공산당 중앙위원회도 성명을 통해 "필리핀 국민들이여, 아로요 독재를 무너뜨리자"고 호소했다.

비상사태 사흘째인 26일에는 노리 카스트로 부통령도 성명을 통해 "정부에 비판적 기사를 싣는다는 이유로 데일리트리뷴지를 25일 정간한 것은 언론자유를 짓밟는 행위"라며 철회를 요청했다. 마닐라타임스도 이날 보도에서 "비상사태 선포로 언론자유를 통제하고 민주사회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아키노 전 대통령 "비상사태는 독재시대 유물"
 
당국은 비상사태 직후 반정부 논조의 신문인 '데일리 트리뷴'을 정간한데 이어 주요 방송사인 'ABS-CBN'과 'GMA'를 접수, 언론 검열을 했다. 이에 대해 필리핀언론연맹(NUJP)은 "포고령 1017은 자유언론에 대한 압살"이라고 비난했다.

이처럼 어수선한 가운데 군부 내 1백명 이상의 무장군인이 당국의 인사이동 명령에 불응하는 사태도 터져나왔다. 가디언에 따르면, 보니페이스 요새에 주둔 중인 해병대에서 사령관인 리나토 미란다 소장의 직위해제에 항의해 부대원들이 5시간 동안 명령불복 시위를 벌인 것이다. 신임 사령관의 부임을 가로막은 것이다.

하지만 이날 군의 시위는 곧 진정됐다. 군은 오해로 이런 일이 빚어졌다고 주장했다. 신임 사령관은 "미란다 소장의 인사는 순환보직 관례에 따른 것"이라며 "지휘관들이 승복을 했고 모든 게 안정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날 시위를 주도했던 미란다 장군의 수석 부관 아리엘 퀘루빈 대령이 체포됐다.

아리엘의 주도하에 명령불복을 시도하던 해병대원들은 중간급 장교들이 더 이상 가세하지 않자 실패를 직감하고 물러났다. 미란다 장군도 "군부가 분열되는 것이나 피해가 발생하는 걸 원치 않는다"며 소장직을 사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수만명의 시민들이 관련 부대가 있는 마닐라에 몰려들어 시위 부대원을 지지하는 집회를 가졌다. 아리엘 대령은 시위과정에서 민간인에게도 상부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기 위해 부대주위로 모여 저항 할 것을 호소했다.
 
필리핀언론연맹 "포고령 1017은 언론압살"
 
26일 밤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정부의 계엄령에 항의해 필리핀대학에 몰려들었다. 아울러 해병대원들의 시위를 지지하는 시민사회 지도자들도 속속 집결했다. 그 중에는 전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도 포함돼 있었으나 당국이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고 필리핀 인디미디어는 전했다.

▲선거부정, 무능, 세금인상 등에 항의해 필리핀 사민사회는 아로요 퇴진을 추진하고 있다.     © 인디미디어
 
27일에는 천주교주교단회의가 비상사태 철회를 요구했다. 상원도 이날 비상사태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쿠데타 음모가 사라지고 연루자가 모두 붙들렸는데 비상사태를 지속하는 건 정당치 않다"며 "비상사태의 정당성, 합법성을 따질 청문회를 열겠다"고 주장했다. 이날 변호사단체와 일부 대학교수는 비상사태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28일에는 대법이 비상사태에 대한 위헌소송에 따라 적법성심의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의회도 이날 비상사태 해제를 논의하기 위해 4일 개회한다고 밝혔다. 시민사회를 비롯해 정부기관들의 이의제기가 거세지자 아로요는 이날 "비상사태를 곧 해제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야권과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도 28일 아로요 정부를 "마르코시안"이라고 비난하며 아로요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움직임을 보였다. 전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의 잔당이라는 표현이었다. 코라손 아키노, 조지프 에스트라다에 이어 라모스까지 3명의 전직 대통령이 아로요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라모스의 측근인 라파엘 알루난 전 내무장관도 이날 언론과 대담에서 "국가를 위한 정치가 아니며 개인과 가문을 위한 정치"라고 아로요를 몰아세웠다. 두 번의 피플파워에도 불구하고 정치불안정이 계속되는 이유로 엘리트 정치인들이 민주주의가 아닌 권력유지를 위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상원 "비상사태 정당성 청문회 열겠다"
 
엘리트 정치인들의 물 흐리기 비난은 외신에서도 신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비상사태 이후 실은 기사를 통해 "미국이 1898년 스페인에서 필리핀을 뺏은 뒤 40년 식민통치를 했지만 미국식 정치제도의 껍데기만 이식한 것 같다"며 "그 결과 왕조 가문 등 정치엘리트의 지배권을 굳히는 결과를 불렀다"고 논평했다. 이 신문은 특히 "필리핀 민주주의는 국민의 것이 아니다"며 "마르코스, 아키노, 아로요 같은 명문 가문들의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아로요 대통령은 61년부터 4년간 대통령을 지냈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이다. 그는 미국의 조지타운대를 졸업하고 92년 상원의원, 98년 부통령을 거쳐 2001년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피플파워로 물러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2004년 대선에서 부정선거 의혹 속에 재선에 성공했다.

아키노는 마르코스 독재정권시절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하다 의문의 살해를 당한 남편인 아키노 상원의원의 후광을 입고 86년 '피플파워'를 거쳐 대통령이 됐다. 마르코스는 20년간 독재를 하는 과정에서 부인을 마닐라 시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지금도 필리핀 의회 의원 2/3이상이 이처럼 왕조나 정치엘리트 가문 출신으로 채워져 있다.

한편, 아로요 대통령(58)에 대한 반대운동은 지난해 6월 선거부정이 담긴 테이프가 발각되며 시작됐다. 2004년 대통령 선거 뒤 개표과정이 진행 중일 때 그녀가 한 선관위원과 한 대화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테이프에 따르면, 아로요가 선관위원에게 선거결과를 조작해달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같은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테이프 내용이 검증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워싱턴포스트 "명문 가문들만의 민주주의"
 
게다가 그녀 가족들의 부정 스캔들도 들통났다. 변호사이자 사업가인 남편 호세 아로요와 현재 하원의원인 아들, 그리고 시동생이 불법 도박조직의 뇌물을 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군부, 정치인 등 수많은 부정부패에 대해 척결의지가 없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세금인상, 언론인과 좌파 정치인 살해 등의 혐의도 받고 있다.
 
▲86년 20년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피플파워 기념식을 기해 터져 나온 아로요 정권의 비상사태에 시민사회, 군부, 정치권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 인디미디어

6개월 전에는 아로요 정부의 장관 10명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의회에서도 탄핵 논의가 진행됐다. 하지만 부결됐다. 의원들이 대통령의 통제 하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해 말 아로요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강경조치는 오히려 그녀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서방의 한 외교관은 가디언과 대담에서 "그녀는 결코 대통령직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반발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이며, 테이프 스캔들을 해소하지 않는 한 그녀는 난국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점점 더 악화될 뿐이라는 것이다.

필리핀 정치권에서도 군부가 그녀에게 등을 돌리지 않는 한 아로요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물론 여론의 악화는 불가피하다는 데도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리아하야운동' 등 아로요 퇴진을 추진하는 시민사회가 이후 어떤 대응을 할 지가 관건이다. '제3의 피플파워'가 태동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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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3/02 [17:3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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